바람의 아들
장혜영
2
도량석이 울리자 윤정은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밤에도 자정이 넘어서야 잠들었지만 지저분한 꿈자리 때문이 잠을 설쳤다. 그러나 참선자는 새벽 목탁소리와 함께 일어나야 한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시 사다비야
노전스님의 천수경 독경소리는 언제나 구성지다. 살구나무목탁에 대추나무 채를 쓰면 그 소리가 도솔천내원궁까지 들린다는 노전스님의 목탁소리가 큰 법당 섬돌에서 시작해 사천왕문을 돌아 명부전과 관음전을 끼고 돌 무렵 윤정은 이부자리와 목침을 걷어 벽장 속에 넣고 암자에서 나와 뒷간으로 들어갔다. 소피 보고 냉수 마시고 방청소하고 좌선을 시작해야 한다.
날은 아직 어두웠다. 그러나 암자 아래의 폭포소리는 청정하고 밤새 무르익은 꽃향기가 골짜기를 진동한다.
능선 아래 산사의 선방에도 벌써 등불이 켜져 있다. 사교입선을 한 스님들의 화두참선이 곧 시작될 것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위해 울리는 종성, 번뇌를 끊어버리는, 서른세 번의 천상세계를 상징하는 법종소리, 축생고를 받는 생명들에게 감로의 법을 들려주는 법고성, 물고기들을 위해 울리는 목어소리, 천상의 새들을 위해 울리는 우판소리가 울리면 선방입승의 죽비가 세 번 울릴 것이다. 죽비신호에 맞춰 세 번 절하고 시방삼세의 부처님과 시방삼시의 사찰과 스님들께 예불을 드리고 화두참선에 몰두할 것이다.
선방은 경전공부를 끝낸 스님들이 참선 수행하는 곳이다. 윤정은 산사에 들어 온지 이제 겨우 6개월밖에 안된다. 초발심경, 반야심경, 예불문공부도 끝냈고 화엄경, 법화경, 능가경도 두루 읽었지만 아직은 입문정도에 불과했다. 그 동안은 후원에서 밥도 짓고 뜰도 쓸며 사미승으로만 지냈었다. 그러나 그녀의 불심이 유다르게 깊고 경전에 대한 터득도 남달라 큰스님께서 몸소 산사 뒤 능선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에 거처를 정해 주시고 화두참선을 하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다. 법혜스님이 그녀에게 내린 화두는 사대四大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참선 중에 윤정은 무념법無念法을 습득하게 되었고 요즘은 무념참선에 정진하고 있었다.
윤정은 방청소와 환기가 끝나자 반가부좌자세로 면벽하고 앉았다. 이 좌선은 마음이 흩어 지지 않고 상서로운 서기를 그러모으며 명상과 참구를 하기 좋고 악귀를 쫓는다는 신비로운 자세이다. 두 손은 차수叉手상태로 배꼽 부근에 가볍게 고정하고 허리를 곧게 편다. 천천히, 가늘게 호흡을 조절하며 날숨으로 복중의 혼탁한 기운을 뽑아내고 들숨으로 밖의 신선한 공기를 흡수한다. 두 눈을 완전히 감으면 혼침昏沈현상이 생길 우려가 있으므로 가늘게 뜬 채 시선을 벽에 맞춘다. 50분에 한 번씩 경행徑行하는 것으로 졸음을 쫓고 근육의 긴장과 혈액순환을 풀 뿐 온종일 좌선을 계속해야 한다. 발우공양도 그녀는 저녁 한 끼만 먹으며 온정신을 참선에 몰두하고 있다.
법혜스님께서는 본심을 알면 그것이 해탈이고 만약 해탈을 얻는다면 그것이 반야 삼매이며 그것이 곧 무념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모든 경계위에서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그것이 무념이라고 하셨다. 무無란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양相이 없고 모든 쓸데없는 망상이 없는 것이며 념念이란 진여의 본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니 진여란 곧 염念의 본체이며 염은 곧 진여의 작용이다. 마음이란 그림자와 같은 것이어서 잡을 데가 없으며 진여는 이런 망념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내 본성품은 원래 청정하다. 선은 상相을 떠남이며 정靜이란 마음의 청정함이다. 견성성불이라고 함은 마음속에 본래부터 있으나 망념이나 탐진치 삼독에 파묻혀 보이지 않던 본성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본성만 발견하면 곧 부처가 될 것이고 부처가 되면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다.
한마디로 무념참선법은 망령된 생각을 거부하는 『생각』이며 그 속에 묻혔던 본성을 발견하는 수행법이다.
망령된 생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연에 집착하는 욕망이다. 남편, 자식, 친지, 친구, 인정, 사랑, 부귀영화, 쾌락……
악착 같이 참선에 집념하지만 그 모든 인연들에서 자유롭기커녕 점점 더 꽁꽁 얽매이고 있었다. 휴대폰전화를 끊어놓으면 무엇하랴.
지난밤 꿈에서도 남편과 딸애를 보았다.
남편은 기를 쓰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었다. 생리통을 호소하며 거부했지만 한사코 덮쳐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남편의 모습은 법혜스님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법혜스님 앞에서 윤정은 갑자기 전신이 굳어짐을 느꼈고 저항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냥 스님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마저도 윤정은 그것이 꿈인 줄을 알았고 음탕한 본능적 욕망을 해결하는데 늘 가까이에 모시고 있는 스님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행위는 스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본능의 광란을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억제할 수 없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정을 제거하려고 식사도 하루 한 끼만 공양 받았지만 허사였다. 때로는 화산처럼 용솟음치는 욕정을 참을 수 없어 한달음에 산을 내려가 남편의 품에 얼싸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육신의 쾌락은 환영이요 허깨비일 따름이니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인연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자신을 단단히 불심의 말뚝에 비끄러맸다.
윤정은 속세에 버리고 온 인연을 끊으려고, 굵직한 정 줄을 잘라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편을 이어 이번에는 딸애 미미의 모습까지 기억의 쪽문을 열고 빠끔히 들어선다.
악몽이었다. 미미한테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 걸까?
꿈속에서 새끼비둘기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새끼비둘기는 갑자기 전선줄에 충돌하며 허공 땅바닥에 곤두박질했다. 급히 달려가 보니 부러진 비둘기의 날개 죽지에서 피가 콸콸 솟구치고 있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상처를 처매주려고 했지만 출혈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윤정은 안타까운 나머지 발만 동동 굴렀다. 새끼비둘기는 애원의 눈길로 윤정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새끼비둘기는 불현듯 미미의 모습으로 바뀌어졌다.
“엄마. 나 죽어, 미미 살려줘.”
미미는 엄마의 목에 매달리며 홀짝홀짝 우는 것이 아닌가.
아니, 우리 미미가 무슨 일이니? 어디가 아프지?
미미를 품에 꼭 껴안았지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새끼비둘기 한 마리가 딸애를 등에 태우고 하늘 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우리 미미를 내려 놔. 어딜 데려 가는거야?”
정신없이 쫓아가다가 새벽 목탁소리에 놀라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아무래도 미미의 신상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부처님. 제발 우리 미미만은 보살펴 주세요!”
피로와 졸음이 무겁게 적치되어 자꾸만 눈까풀이 아래로 처져 내려왔다. 한잠 푹 자고 싶다. 그러나 그건 육신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헛되 짓을 뿐이다. 잠이나 잘 것이면 집에서 잘 것이지 무엇 때문에 고독한 산사행을 했겠는가.
남편은 물론이고 그녀를 아는 사람이면 한결같이 윤정의 느닷없는 출가 결단에 의혹을 품고 있다. 남편과 딸 가족밖에 모르던, 현처양모인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을 버리고 초연히 출가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사실 윤정의 자신도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어리둥절할 뿐이다.
굳이 이유를 대라면 외할아버지의 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자랐다. 외할아버지가 손녀인 윤정을 대학공부를 시켜서 시집까지 보내주었다. 그분은 윤정에게 외할아버지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이기도 하고 어머니이기도 하고 오빠이기도 했다. 윤정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 분이 죽을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분의 죽음은 윤정에게서 세상 전체를 빼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의 타계는 그분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라 동시에 윤정의 죽음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부재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윤정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녀를 세상에 홀로 버리고 떠나가셨다.
“결국은 이렇게 죽 걸 살겠다고 버둥거린 게 어리석구나. 아무래도 죽을 바엔 애당초 태어나지나 말던지. 죽음 앞에서 영욕이란 다 무엇이고 인정이란 다 무엇이더냐. 모든 것이 허망하구나.”
임종 전에 남기신 외할아버지의 탄식은 윤정의 가슴에 커다란 충격으로 남았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한 번도 진지하게 숙고해보지 못했던 인생의 문제가 그녀를 깊은 고뇌에 빠트렸다.
외할아버지는 만년에 늘 마을의 절에 다니셨다. 그 사이 사찰의 큰스님과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큰스님은 외할아버지가 임종하실 때에도 머리맡에 앉아 노인의 황천길을 바래주었다. 그때 스님이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은 윤정의 고요하던 가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살겠다고 버둥거린 건 인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공하고 사대는 허깨비에 불과한데 허망한 세상과의 인연에 집착하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느라 고통스러운겁니다. 인연을 끊으면 깨달음을 얻을 것이고 깨달음을 얻으면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도 중생은 허상의 유혹에 빠져 부처가 되는 길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허깨비라니?!
세상 모든 것이 허상이라니?!
인연을 끊으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수많은 의문들과 호기심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행렬을 맞춰 지나갔다.
사대와 오온五蘊이 본래 헛것이고 실체가 없으며 그 본성이 공하여 마치 거울속의 그림자 같고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 육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 윤정은 경악했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건 마음뿐이며 진여는 무명과는 달리 생겨남도 없어짐도 없는 것이고 자신속의 불심을 발견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며 그 깨달음은 생사를 모르는 영원함이라는 걸 큰스님의 설법을 통해 알았을 때 벌써 부처님을 향한 그녀의 불심은 싹트고 있었다. 육신이라는 허깨비와 속세라는 허망함을 떠나서 생사를 초탈한 깨달음의 세계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미타부처님의 서방정토에는 생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연에 의한 고통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절에 들어와 불도를 닦고 참선수행해보니 고통도 그대로이고 인연도 잘라버릴 수가 없다. 물론 아직은 수행이 부족하고 불심이 옅어서일 것이다. 닦고 닦노라면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고 말 것이다.
돈오성불頓悟成佛이라고 하지 않는가. 깨달음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불문에 입문하자마자 득도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세속의 인연을 깨끗이 잘라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발견하는 날 깨달음은 이루어지겠지.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정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금이 찡찡 저려나고 졸음이 파도처럼 의식의 방파제를 때리며 밀려든다.
몸속의 불순한 기운이 땀구멍을 통해 배출된다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어깨와 고개를 움직였다. 손바닥을 비벼 가열하고 눈 등을 마사지한 뒤 두 눈을 떴다. 계속하여 손으로 코, 목덜미, 복부, 발바닥을 충분히 마사지하고 나서야 좌선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된 근육을 풀고 혈액순환을 순통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경행이 필요했다.
좁은 암자를 나와 정원으로 나섰다.
어느새 날이 희붐히 밝아 있다. 푸르스름한 서기가 하늘 가득하고 계곡에는 가느다랗고 투명한 안개 필들이 실실이 흘러간다. 암자로 통하는 산길을 훨훨 빗자루질 하는 사미승의 모습이 그림같이 황홀하다. 법당에서 들려오는 아침예불소리가 청아한 물소리와 어울려 낭랑하게 들려온다.
암자 주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개나리꽃, 철쭉꽃, 목련꽃들에서 풍기는 꽃향기가 이슬을 함초롬히 머금은 채 벌써부터 계곡에 넘치며 그윽하게 진동한다.
저것들이 다 허깨비상이라니!
가끔은 불법의 교리가 허망하게 느껴 질 때가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마음에 보이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육식六識에 관한 이론……
문득 산 아래 산사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험준한 비탈길을 따라 두 사람이 안개 필을 찢으며 암자로 허위허위 올라오고 있었다.
앞에 선 분은 법혜스님이시다. 푸른 승복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안개 필이 찢기며 산산이 흩어진다. 지난밤 꿈속에서 법혜스님과 있었던 얼굴 뜨거운 정사 장면이 떠오르며 윤정은 불현듯 스님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졌다. 세상 모든 것을 손금 보듯 환하게 알고 계시는 신통력을 가진 분이시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윤정은 스님을 피해 암자 뒤로 몸을 숨기려다 말고 고개를 돌이켰다. 스님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익었던 것이다. 법혜스님이 굽이 길을 돌며 몸을 비키는 순간 정체를 드러낸 불청객은 절 사람이 아닌 세속차림을 하고 있었다. 보통 키에 암팡진 체구, 활달한 걸음걸이와 떡 버러진 어깨, 지적인 세련미가 돋보이는 호남형의 얼굴……
남편 윤정도였다.
아니, 저이가 무슨 일로 이 새벽에 산사까지 찾아온거지?
스님한테 남편이 사찰에 몇 번 다녀갔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녀는 얼굴조차 구경하지 못했었다. 더구나 이렇게 아내가 수행하고 있는 암자에까지 직접 방문한 적은 없었다.
“행자께서는 이 암자에서 참선수행에 정진한지 벌써 수 개월이 넘습니다. 하루도 암자를 떠난 적이 없지요.”
법혜스님은 평탄한 암자 뜰에 올라서며 뒤를 따르는 정도에게 윤정의 그간 상황을 소개한다.
“참선 중에는 속인을 만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시주께서는 특별한 사정이라 제가 율법을 어기고 안내하는 겁니다. 될 수 있으면 긴 시간을 점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법혜스님은 정중하게 읍을 하고는 다시 올라오던 길로 내려갔다.
정도는 스님이 멀리 내려갈 때까지 묵묵히 바래주더니 시야에서 사라져서야 드디어 몸을 돌이켜 암자를 쳐다본다.
윤정은 남편을 보자 저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남편의 품에 와락 안기고 싶었다. 안겨서 그 넓고도 포근한 품에 볼을 부비며……
“여보. 보고 싶었어요. 왜 인제야 오셨어요. 여긴 너무 외로운 곳이예요. 절 잡아끌고서라도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데려가 주세요. 당신과 미미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말이에요.”
이렇게 애걸하며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참아야만 했다. 이미 반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돌아서기에는 너무나 멀리에까지 와 있다고 느껴졌다. 그녀와 남편 사이에 놓여진 철길에는 이미 가시덤불이 무성하고 열차는 녹이 쓸어 폐철이 되어버린 것이다. 역도 역무원도 없고 신호등도 대피선도 없다. 회귀하려면 탈선과 충돌과 파괴뿐일 것이다.
정도는 조급한 걸음걸이로 뜰을 지나 나지막한 암자의 섬돌위에 성큼 올라선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걸음걸이가 불길한 예감을 던져온다. 암자 안을 기웃거리더니 낮으나 다급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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