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바람의 아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2.07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19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농가주위는 인기척 하나 없이 물 뿌린 듯 조용하다. 새들과 벌레들의 울음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이다. 냇물이 자갈위로 흘러가는 쪼르륵 소리가 가늘지만 절주 있다. 한낮의 무더운 태양이 폭염을 쏟아 붓는 농가는 전쟁 같은 것은 아예 없었던 듯이 권태로우면서도 평화로웠고 아늑하면서도 지친 모습이다.
 밥 한 그릇만, 보리밥 한 그릇만이라도 아니, 감자 한 덩이만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군침이 저도 모르게 목구멍을 타고 꿀떡 넘어갔다. 가물거리던 의식도 머리를 쳐드는 식욕의 유혹에 불심지를 돋운다.
 젖 먹던 기운까지 다 내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굴뚝을 돌아서 집 앞으로 나갔다. 싸리바자 안에 붉은 벽체가 당금이라도 허물어질 듯 금이 나 있고 문짝마저 찌그러든 오막살이가 나타났다. 뜰에는 닭 몇 마리가 한가로이 모이를 쫒고 있다. 노란 햇빛이 발바닥에 묻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가득 깔려있다.
 창호지가 찢어져 넌덜거리는 부엌문이 삐거덕 열리더니 한 농부가 삼태기에 무언가를 담아들고 툇마루로 불쑥 나서는 바람에 박병술은 미처 몸도 피신하지 못한 채 그냥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있었다.
 농부는 삽짝문밖에 갑자기 나타난 국군병사를 보자 놀란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인민군치하의 마을에 백주에 국군병사가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할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우? 국군이 어떻게 여길…… 어서 안으로 들어 가유.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내남없이 죄다 목이 날아나요.”
 농부는 허둥지둥 뜰을 달려 나오더니 아랫마을 쪽을 연신 흘끔거리며 박병술을 부축하여 서둘러 집안으로 들인다.   
 “배가 고파서요. 먹을 것만 주면 곧장……”
 “글쎄 우선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들어가서 얘길 해유. 밖에 서있지 말고. 발각되면 큰일 납니다.”
 “이 마을에도 북괴군이 들어왔습니까?”
 “들어오다마다요. 인민군천하지유.”
 말소리를 듣고 집안에서 나온 두 여인의 얼굴에도 순식간에 공포와 두려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40대의 여인은 농부의 아내로 보이고 10대의 어여쁜 처녀는 딸인 듯싶다. 봄날의 버들가지처럼 물이 통통 오른 처녀는 수태를 담뿍 머금은 채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엄마의 등 뒤에 숨어서 불청객을 가만히 훔쳐본다.
 “어서 그 군복을 벗고 옷부터 갈아입어요. 누가 보기 전에.”
 농부는 벌써 눈치껏 챙겨온 아내의 손에서 낡은 무명한복 한 벌을 내놓는다. 낯선 군인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라도 좋고 자기가족의 신변안위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좋고 아무튼 농부의 진심에 박병술은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문전축객한들, 인민군에 고해바친들 궁지에 몰린 그로서는 할말이 없는 처지가 아닌가. 이 무시시한 세월에 목숨을 걸고 남을 돕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댁에 몸을 숨기려고 들어온 게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들어왔으니 먹을 것만 좀 주면 더 이상 폐 끼치지 않고 그냥 선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되지도 않을 소리구만요.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래요. 안보면 몰라도 두 눈 뻔히 뜨고 보고서도 이대로 보낸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요. 다른 말 말고 어서 시키는 대로 옷이나 갈아입구려. 여보, 거기 어디 감자 삶은 것 있지? 그거라도 먼저 들여오구려. 보리밥은 나중에 지어주고. 우선 배고플 테니까 요기라도 해야지.”
 박병술은 하는 수없이 농부가 주는 옷을 갈아입었다. 체소한 농부의 몸에 맞춰서 지은 한복이 몸집이 우람한 그의 체구에 맞을 리가 없다.
 농부의 아내가 부엌으로 나가더니 커다란 버들광주리에 식은 감자 대여섯 덩이를 담아들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열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예쁘장한 딸은 하릴없이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불청객에게 신비한 눈길을 자꾸만 던져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병술은 짐승처럼 감자를 집어 들고 껍질 채로 닁큼닁큼 베어 삼키기 시작했다. 체면이고 인사고 차릴 경황조차 없었다. 감자 맛이 천하별미라는 걸 이전에는 왜 몰랐을까?
 “천천히 먹게나. 젊은이. 체하겠네. 얘. 복금아. 물 한 그릇 떠오너라.”
 심한 수줍음을 타며 엄마 뒤에 숨어 몰래 시선을 던져오던, 복금이라고 호명된 애가 아버지의 분부가 떨어지기 무섭게 쪼르륵 밖으로 달려 나가더니 마당안의 우물을 길어서는 한 그릇 떠들고 방으로 올라온다.
 복금은 우연히 박병술과 눈길이 마주치자 그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또다시 엄마 등 뒤에 숨어 물그릇만 달랑 내민다. 수줍음을 몹시 타는 그 모습이 더구나 앳되고 순진하다.
 “발이 심하게 부었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나? 쑥 뜸질을 하던지 오소리기름을 바르던지 해야겠어. 이런 발로 어떻게 산 속을……”
 “복금이 아빠. 인민군이나 민청에서 반동분자색출이라도 나오면 어떡해요?”
 농부의 아내는 걱정스러운 듯 박병술의 부은 발목과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그녀의 초췌한 얼굴에 우려와 걱정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있었다.
 “오겠으면 오라고 해요. 오면 숨으면 될 거잖아요.”
 복금이가 엄마의 등 뒤에 얼굴을 묻은 채 나직하나 당돌하게 말한다.
 “언제 올 줄 알고. 밤이고 낮이고 시도 때도 없이 불시에 들이닥치는데……”
 “괜찮아. 다 방법이 있어. 그 뭐냐. 젊은이만 괜찮다면 그냥 우리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하게나. 집은 전라도에 있는데 전쟁난리판에 길이 막혀 못 갔다고 둘러대면……”
 “복금이 아빠!”
 “아버지!”
 두 여인은 동시에 농부의 말을 제지한다.
 박병술이도 농부의 느닷없는 제안에 흠칫 놀라 먹던 감자를 허공에 든 채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이 난데없이 데릴사위라니?!
 박병술의 눈길과 시선이 마주친 복금이의 얼굴이 금시 빨갛게 고추물이 든다. 옷고름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밖으로 졸랑졸랑 달려 나간다.
 “그러잖아도 복금이 저년 때문에 크게 걱정했는데 차라리 잘 됐어. 조병태놈이 자꾸만 복금일 눈독 들여 어떡하나 근심했는데.”
 “당신 민청위원장 비위를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화를 당하려고 그래요.”
 “당신은 걱정 마. 잠자코 굿이나 보다가 떡이나 먹으라고.”
 “지금이 누구천하인데 감히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겠다는 거예요.”
 “내가 비록 천한 농사꾼이긴 하지만 딸을 그 망나니 병태놈한테는 안줘. 차라리 개한테 주면 주었지.”
 “목소리 좀 낮춰요. 누가 듣겠어요. 이 양반이 오늘 환장을 했나 원.”
 “듣겠으면 들으라지. 내 딸 갖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어느 놈이 뭐라 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농부의 눈길은 부단히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소설 "바람의 아들" 21  (0) 2009.12.21
장편소설 "바람의 아들" 20  (0) 2009.12.14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18  (0) 2009.12.07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17  (0) 2009.11.30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16  (0) 2009.11.24
Posted by 아데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