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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3 장편연재 "붉은아침"7 by 아데라

장편연재 "붉은아침"7
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3장 뜨거운 호수
                                                                                                                               


    
                                                2


                                                                                       
 
준호가 택시를 타고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5시였다. 택시에서 한잠 잤으나 술기운은 여전히 말끔하게 털어버리지 못했다. 계단을 올라가기가 숨이 차고 걸음이 비틀거렸다.
 무심히 미닫이를 열고 방 안에 들어서던 준호는 뜻밖에도 아버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부친은 방 가운데 장승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키가 껑충하고 허리는 구부정했으나 거창한 체구 때문에 방 안이 갑자기 비좁아 보였다. 공사판에서 햇빛과 바람에 꺼멓게 그을고 탄 얼굴, 푸시시 헝클어진 머리카락……. 오늘따라 더욱 낯설어 보였다.
 아버지는 냉엄한 눈길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게다가 부친의 장신, 거구가 던지는 그늘은 준호를 덮어버릴 듯 심신마저 짓눌렀다. 벌써 저 그늘 밑에서 진옥의 싱싱하던 청춘이 시들어버렸다. 자식한테 엄하기만 하고 자애롭지 못한 아버지,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도 부친이 아닌 그냥 당 간부였다. 마주앉기만 하면 훈시뿐이었다. 그렇게 원칙에만 집착하는 아버지여서 싫었다.
 “명색이 박사 공부한다는 녀석이 밤새 어딜 쏘다니다가 새벽에야 기어드는 거냐?”
 아들의 무절제한 사생활에 추상같이 노한 듯싶다. 그러나 준호는 오늘만큼은 기가 죽지 않았다. 아직도 증발되지 않은, 혈관 속을 누비는 술기운을 빌어 용기를 추슬렀다.
 “한종수 노인을 취재하러 갔댔어요!”
 “한종수라니?”
 최영식은 자리에 앉다 말고 엉거주춤한 채 아들을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궐련갑 안에서 담배를 꺼내다가 동작을 멈춘 그의 손은 유난히 거칠고 투박해 보였다.
 “아직도 살아있다던 그 한지주의 아들 말이냐?”
 “네.”
 준호는 며칠 전에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전화로 알려 주었다. 그때 아버지는 준호더러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고 꾸짖었다.
 “아니 그럼 그 작자가 정말 살아있단 말이냐?”
 “네.”
 “이런 환장할! 네 할아버진 분명 그 작자가 죽었다고 하셨잖냐. 그런데 살아있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
 “저도 아직 사건의 상세한 시말은 모릅니다.”
 “그건 그렇고 이 미친 녀석아! 설사 그 작자가 살아있다 해도 그렇지. 네가 왜 그놈을 만난다는 거냐. 그 자식은 우리 가문하고는 철전지 원수라는 걸 뻔히 알면서, 할아버지한테서 피맺힌 과거사를 귀 아프도록 듣고서도 그 영감탱이를 찾아가.”
 최영식은 갈고랑이처럼 구부정한 손가락을 펴들고 준호의 얼굴을 찌를 듯이 사납게 삿대질해댔다.
 “자료 수집 때문에…….”
 “자료는 무슨 썩어빠진 자료 수집이야.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쓰면 될 걸 가지고. 그놈한테서 무슨 들을 말이 있다고.”
 최영식은 몇 번이나 라이터를 켜서 겨우 불을 붙인 담배를 몇 모금 뻑뻑 빨아대고는 기침을 쿨룩거리더니 금방 재떨이에 비벼 껐다. 어찌나 손에 힘을 주었던지 담배는 볼품없이 옆구리가 터져 볼품없이 속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전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공정한 책을 쓸 겁니다. 만일 제가 할아버지의 말씀 대로 글을 쓴다면 한종수는 또 자신의 손녀를 시켜 자기가 구술한 대로 글을 쓰도록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일방적 기술은 전쟁의 절반 모습밖에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전쟁의 전모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점에서, 이념을 떠나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이해하고 재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래 그놈을 만나서 무슨 좋은 소리라도 들었냐?”
 “그분도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쓰지 않으면 전쟁담을 들려 줄 수 없다며 취재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울적하던 차 그분 손녀와 술 한 잔 하고 오는 길입니다.”
 술 한 잔이 평소 말수가 적은 그더러 횡설수설 수다를 떨게 했다.
 “그놈 손녀하고는 또 어떤 관계냐? 진작부터 알고 있던 사이냐?”
 나와 유리가 어떤 사이인가?
 준호 자신도 아리송했다. 두 번을 만났고 커피를 마시고 식사를 했다. 술도 마셨고 호수공원에서 이인용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에 대해서도, 성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저 그것뿐이다. 유리가 아닌 다른 어떤 인연 있는 아가씨와도 가능할 수 있었던 그런 관계일 뿐이다.
 아니다. 준호는 유리에 대한 자신의 인상이 남다르다는 걸 그녀와 만났던 그 첫 순간부터 느꼈다. 두 번의 만남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준호의 기억 속에 그녀의 모습을 깊숙이 심어 놓았다. 육교를 내려가는 계단 위에서 있었던, 그 순간의 접촉은 유리에 대한 그의 특별한 감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 분명 유리 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건 또 아직까지는 호감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설마 좋아하는 사이는 아니겠지?”
 아버지의 누렇게 뜨고 핏발이 선 눈길이 준호의 표정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종수와 아들의 관계가 취재의 범위를 넘어서서 그 손녀와의 애정관계로 비약할까봐 두려운 모양이다. 원수가 사돈이 되고…….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수락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다시는 한종수의 손녀와 만나면 안 된다. 그 애의 할아비는 네 큰할아버지를 죽인 원수란 말이다. 그러니…….”
 당 간부다운 아버지 특유의 훈시가 또 시작된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념과 사랑은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 되는 원칙문제이다. 입당 연령 30년, 당 간부경력 15년이라는 그 기나긴 조직생활은 아버지에게 인생과 사회문제는 물론이고 가정의 대소사와 사생활까지도 당의 원칙을 척도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주었다. 당에 대한 이러한 절대적 충성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비판과 적대시로부터 시작되고 연장될 수밖에 없다.
 “난 한국을 조상의 땅이라는 의미에서는, 동포의 나라라는 의미에서는 애착을 느끼지만 한국이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모방한데 대해서는 저주한다. 소수의 자본가들만의 천국이 아니냐. 노동자는 개, 돼지보다 못한 천대와 학대를 받고. 넌 아마 공사 현장에 가보지 못해 모를 거다. 이 애비랑 돈 있는 놈들에게 어떤 수모와 천대를 당하는지 알기나 하느냐.”
 당 생활에서 몸에 밴 아버지의 교육과 비판은 언제부터인가 준호에게 강요와 세뇌로 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준호의 인생관,  가치관은 아버지보다 세련되고 성숙된 만큼 교육을 받을 쪽은 준호가 아니라 당연히 아버지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권좌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네 신분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니냐. 할아버진 인민군 출신이고 아버진 당 간부이고  너 또한 나라에서 육성해낸 대학생이고 국비유학까지 나온 볼셰비키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 전 정말 신분이라는 올가미에 목매어 근시안이 되고 싶지 않아요. 신분을 초월하여 인류를 위해 뭔가를 기여하고 싶습니다.”
 “되지도 않을 소린 그만해라. 계급을 떠난 인류란 있을 수 없어. 정녕 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등지고 조국과 신념을 배반할 수 있겠니. 그건 효도와 애국을 동시에 포기하는 행위다.”
 “우리의 조국은 이곳일 수도 있잖습니까.”
 “조국이 뭔데. 조상의 땅이냐 출생한 땅이냐. 아니면 이념과 신념을 함께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냐.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조국이냐? 남북이 같은 조국이 아니어서 분열되고 6.25전쟁을 치렀냐. 조상이 같다는 것보다 이념이 같다는 게 더 중요한거야.”
 이념을 같이 한다. 그러고 보면 6.25는 피보다는 이념을 더 중히 여겨 발발한 전쟁임이 틀림없다.
 아버지의 이런 고정불변의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 때문에 준호는 진옥이와 아픈 이별을 해야만 했다. 이제 더 이상 이념이 이별의 구실이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포라는 사실도 결코 이념보다 가치가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전 꼭 한종수 노인을 취재할 거예요. 그래서 6.25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릴 거예요.”
 ‘그래 어디 네 맘대로 해 보거라. 고얀 놈!“
 최영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옷걸이에서 때 묻은 점퍼를 와락 벗겨 입는다.
 “아니, 식사나 하고 가세요.”
 “몸이 불편해서 며칠 휴식하려고 왔다만 네가 하는 꼬락서니가 눈꼴사나워 못 있겠다.”
 “아버지.”
 최영식은 팔소매를 잡은 아들의 손을 사정없이 뿌리치고는 우락부락 밖으로 나가버렸다. 원칙 앞에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아버지다. 쿵덕쿵덕, 계단이 구둣발에 짓밟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준호는 밖에까지 나와 언덕을 내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꾸부정한 등에 허름한 공사판 가방을 둘러멘 아버지는 거구인데도 불구하고 왜소해 보였다. 아버지의 인생은 당신의 신념 때문에 가치 있는 것만큼 또 신념 때문에 고달플 것이다. 아버지가 걸어 내려가는 골목에는 아직 햇빛도 들지 않았고 행인도 드물었다.
 준호는 술에 녹초가 된 몸뚱이를 간신히 이끌고 3층으로 올라왔다.
 지은이는 지난밤에도 외박한 모양인지 미닫이문만 반쯤 열려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방에 들어오자 이부자리를 펴고 자리에 누웠다. 조반이고 뭐고 한잠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눈을 감았으나 자꾸만 텅 빈 골목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던 아버지의 구부정한 모습이 떠올랐다. 안쓰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침밥은 지어드렸어야 자식 된 도리를 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는 인간적으로는 거짓과 가식을 모르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양심에 미안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정치 인생은 그분을 이념의 조종을 받는 하나의 기계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의 제약을 벗어나기 어렵다. 자연 환경, 경제 환경, 사회 환경, 문화 환경(종교, 풍습), 정치 환경, 계급 환경, 이념 환경……. 일단 자신에게만 주어진 이러한 환경을 이탈하여 다른 환경의 영역에 진입하기만 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거부심리 또는 반감까지 느끼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거부반응과 반감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잠시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도 적응되는 양 만큼 그러한 반응들도 감소된다. 준호도 처음엔 한국의 자본주의 생활방식이 눈에 거슬렸고 거부심리와 반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이념투쟁의 목적의식이 희미해질 만큼 새로운 생활방식에 적응되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죽는다. 아버진 그분이 배워온 ‘썩어빠진 자본주의사회’에 적응하기에는 너무나 힘들 만큼 당신만의 울타리 안에 굳게 갇혀있다. 마치 열대식물이 남극에서는 살 수 없듯이. 그렇다고 열대가 덥다는 사실이 북극이나 남극의 추위를 비난할 이유로는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북극이나 남극은 혹한을 이유로 열대 혹서를 평가절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다만 인간은 섭리에도 없는 이념을 만들어내어 인류사회를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놓고 서로 싸우고 있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념을 위한 희생물이 되고 있는가. 어쩌면 이념은 정치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요 제물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지금 적응이 아니라 반항하고 있다. 이념과 신념의 타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아버지…….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진옥이와 유리가 꿈속에 나타났고 망연한 표정을 지은 아버지의 구겨진 모습도 지나갔고 술에 취한 지은의 얼굴도 보였다.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전화벨소리에 잠을 깬 준호는 벽시계부터 쳐다보았다. 오후 2시 12분 42초를 막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가 천근같이 무겁고 띵하고 두통이 극심했다.
 “오빠!”
 오빠라는 호칭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여동생도 없는 준호다. 그를 오빠라고 스스럼없이 불러 주었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진옥 한 사람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의 곁을 영영 떠나버렸다.
 유리 씨!
 아니, 유리는 아직 한 번도 그를 오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준호 씨’라고 정중하게 불렀다. 오빠라는 호칭 때문에 혹시라도 넘을 수 있는 친분의 경계를 준호 씨라는 점잖은 호칭으로 절제하려는 뜻일까. 아무튼 유리는 두 번의 만남으로, 커피 한 잔과 술 몇 잔으로 호칭을 비약하는 그런 속없는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서도 너무 보수적이었다.
 “저예요. 비둘기.”
 아, 비둘기! 그래 진옥이 말고도 나를 오빠라고 불러준 지은이가 또 있었지. 그런데 너무 쉽게 얻은 칭호여서인지 마음속에 각별한 의미로 와 닿지는 않는다.
 “어디 계세요?”
 어딘가 말마디들이 부서진 느낌이다. 과음 때문일 것이다.
 “깜박 잠이 들었네요.”
 “공부하신다는 분이 낮잠 자고 잘 하시네요. 부친도 함께 계세요?”
 “우리 아버지가 오신 걸 어떻게 알고?”
 “어제 오셨는데……. 오빠도 집에 안 계시기에 대신 식사 한 끼 대접하려니까 단마디로 거절하시던 걸요.”
 “아, 그러셨군요. 아침에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럼 잘 됐네요. 지금 여기로 오세요.”
 ‘오실 수가 있어요?’ 하는 식의 예의바른 말은 지은에게서는 아예 기대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의 의사나 편의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수요가 무엇보다 우선했다.
 “오늘은 피곤해서……. 거기가 어딘 데요?”
 “대학로예요. 르시엘카페. 혜화전철역에서 내려 카톨릭대학 쪽으로 오세요. 기다릴게요.”
 통화는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이건 정중한 초대가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한 강요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건 그녀 특유의 호의라 이해하고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나갔다. 이도 닦고 세면도 했다. 반듯한 예의로 사람을 대하는 유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성격이라는 생각을 건지며 준호는 집을 나섰다. 그녀의 이런 스스럼없는 접근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만큼도 그녀는 진중하지 못한 존재였다.
 문화의 거리, 예술의 거리, 젊은이의 거리답게 낭만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대학로를 걸어 그녀가 기다린다는 르시엘카페로 갔다.
 지은은 프랑스풍으로 장식한 스탠드바에 마주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표현한 특이하고 우아한 천장 디자인 아래에 앉아 6층 창 밖으로 대학로를 부감하며 칵테일을 마시는 지은의 모습은 너무나 낭만적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대학로의 젊음과 낭만을 독차지하고 마음껏 농락하는 탕녀처럼도 보였다. 그 모습이 왜 멋스럽게 보이지?
 “오빠, 어서 이리 와 앉으세요. 오늘은 제 지갑이 두둑하거든요. 한턱 쏠 테니까 우리 실컷 즐겨요.”
 “어제 아침에 차려준 조반상이 고마워서 나왔습니다.”
 절대로 호출에 응한 이유를 달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점수 따기 쉬운 걸 보니 오빤 착한 분이시네요.”
 가까이에 앉아 자세히 보니 그녀의 웃는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그늘이 비껴 있다. 백옥같이 눈부신 하얀 눈자위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녀가 거느린 전체적인 낭만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아버님께서 아마 저 때문에 화나셨을 거예요. 한국에 와본 소감이 어떠세요, 하고 물으니까 내가 미국 땅에 온 건지 일본 땅에 온 건지 헷갈리신다며, 무슨 놈의 나라가 이 꼴이냐, 돈만 많으면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 같아야지, 이러시는 게 아니겠어요.  한국에 대한 인상이 나쁘셨던가 봐요. 말씀을 하실 때 면부근육을 떨고 계셨거든요.”
 준호는 우선 진토닉을 조금 마시고 그 맛을 음미했다. 연예인들도 자주 찾는다는 소문난 이름에 걸맞게 은은한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대신 체리와 레몬을 술 위에 띄운 카카오를 마시는 지은은 사치스러워 보인다. 준호도 칵테일 한 잔을 주문했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사회상은 저 열악한 환경 속의 공사현장과 그 현장 속에서  고역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일용직노동자 즉 ‘노가다’들뿐입니다. 아버지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는 바로 그것일 수밖에 없겠지요. 게다가 아버지는 중국에 사실 때 30년 당 생활 경력을 가진 볼셰비키였고 당 간부였습니다. 언젠가 한번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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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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