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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7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3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유치해!”
 정도는 사진첩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미경은 점심때가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고 오전 내내 손님들도 둬 서너 명 다녀갔을 뿐 한가했다. 늘 다니던 단골들이 건너편 사진관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도 정도는 입가에 쓴 웃음을 지을 뿐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단골들도 정도의 눈길을 피해 저만큼 멀리 에돌아 다닌다.
 사진 현상하러 손님 몇 명이 다녀갔지만 필름만 접수하고 일손은 잡지 않았다. 손맥이 풀렸다. 일도 기분이 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냥 좁은 실내를 서성거리기만 했다. 아내, 가정부, 미경이, 석준범, 『동양사진관』…… 이런 사유의 파편들을 하나로 일관된 궤도에 연관시킬 수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뭔가로 확인……
 문득 출입문 쪽에 웬 아가씨가 나타났다. 외부세계와 통한, 햇빛이 투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실내 안쪽에서 내다본 아가씨의 실루엣은 날씬했다. 그녀의 얼굴이 유리문에 다가와 클로즈업되며 실내를 기웃거린다.
 “어서 오세요.”
 정도는 조금은 급한 걸음으로 출입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문을 열어주어서야 아가씨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스튜디오안으로 들어섰다.
 홀연 실내에 태양이라도 옮겨놓은 듯 밝아진 느낌이다.
 검은 스커트에 양복저고리를 입고 치렁치렁한 장발을 우아한 곡선의 등 뒤에 늘어트린 아가씨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황홀하기까지 했다. 여유 있으나 절제된 이목구비, 미소 한 점 없지만 온화한 표정, 옅은 수심이 흐르는 듯 하면서도 깊은 은근함과 중후함이 곁들인 세련미까지 거느려 숙녀 같다. 그래서 약간은 대하기가 부담스럽다.
 “무슨 일로?”      
 이제는 『동양사진관』이 아닌 『패밀리』를 찾는 손님들이 도리어 이상해진다. 더구나 지적 분위기가 다분한 아가씨가 한물간 사진관을 찾아온 데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우아한 그녀의 모습과 허름한 사진관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필름현상 가능하죠?”
 “그렇습니다만…… 여기서 현상하실 건가요?”
 “네.”
 완벽한 옷차림과 절제된 표정과 마찬가지로 언어표현도 간단명료하게 응축되어 있다. 그녀에겐 미소조차도 군더더기요 요염함조차도 불필요할 것 같았다. 그만큼 고도의 세련미가 돋보였다. 지금은 물론이고 삼촌과 함께 이 사진관을 운영할 때에도 이 동네에 이렇듯 우아하고 품위 있고 세련된 아가씨의 출현은 드물었다. 게다가 그녀는 정도의 눈에도 낯선 어느 도심지에서 온 귀객 같다. 얼핏 그녀의 스타일은 공항에서 근무하는 공항아가씨를 방불케 한다. 이런 구석진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미모다.
 정도는 영문도 없이 자신이 일상의 평온을 상실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약간은 허둥지둥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실내의 응고된 분위기에 일으킨 파문은 그만큼 컸고 그러기에도 충분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웬만한 여자에 대해서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정도였다.
 아가씨는 핸드백 안에서 30컷짜리 필름 세 개를 카운터위에 꺼내놓았다. 그 손결이 맑다 못해 푸른 옥돌 같았고 얼굴은 정교한 인형이나 조각품 같았다.
 “명함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봄바람이 굴러가며 살랑살랑 꽃 숲을 설레게 한다.
 “은파랑이에요.”
 “빨강, 노랑 하는 그런 색깔 말씀인가요?”
 “네.”
 이름마저도 포근하고 정겹다. 아니, 신비하고 특이하다.
 파란색!
 그 속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원색 중의 하나이고 명도나 포화도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B,4/8의 한색계통의 색깔! 중량감과 안정감을 주면서도 냉담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색깔이다. 파랑이 사람들에게 던지는 『경고』는 도대체 어떤 메시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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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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