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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3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1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행복이나 쾌락은 우리와 인연을 가진 공동체가 공유할 때에만 그 가치와 의미가 생산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 혼자만 행복하다면 그건 이기적인 행복이겠죠. 때로는 남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양도 하는 것도 이타적인 행복일 거고요.”
  “사랑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양도하는 것도 행복이라는 궤변은 자신에 대한 기만일 뿐이야. 솔직히 말해 봐. 자기는 신랑이 총각 때부터 병신이었다면 그와 결혼했겠어? 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했겠냐고? 왜 대답을 못해. 미경이 뿐만 아니라 세상 어느 건강한 여자도 결혼을 하지 않을 거야. 이게 현실이고 우리의 진실이야.”
 “부부사이에는 사랑 말고도 양심과 윤리 같은 것도 있잖아요.”
 어느 사이 미경은 자신이 단순하다고만 생각했던 진남의 조리정연하고 정밀한 이론공세에 대답이 궁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진리는, 승자는 언제나 이성의 편에 있었다. 그런데 패배의 운명이 낙인 찍힌 본능과 욕망의 편에 선 진남이 진리의 편에 선 미경을 수세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양심 같은 게 있었다면, 윤리 같은 게 있었다면 자기는 진작부터 나와의 인연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어. 나랑 침대위에서 정사를 벌일 때 자기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이 있었어? 행복과 쾌락은 바로 그런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야. 양심이요 윤리요 하는 것들을 느끼는 순간부터는 벌써 불행의 시작이지. 내가 장담하지만 미경은 지금도 우리 사이에 있었던 그 행복한 순간들을 바라고 있어. 그런 미경이가 진정한 미경이야. 그 외의 모든 것은 기만이요 허위일 뿐이라고.”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말이어서 미경은 갑자기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많은 가치와 의미들을 포기할 때 인간은 비로소 질곡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질 수 있다. 그때의 자신이 진정한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인간은 스스로 너무 많은 짐을 어깨에 지고 주저앉아 있다. 정직한 삶이라는 이 인생의 짐 보퉁이는 저기 태산 만큼이나 거창한 무게로 행복과 쾌락과 욕망의 자유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그 짐이 무겁다고 벗어던지면 그 순간부터 인생은 부정의 낙인이 찍히고 말 것이다.
 이럴 수도 저러 수도 없는 인생길!
 솔직히 미경이도 진남이와의 결합을 원하고 있다. 남편과의 결합은 어떤 외압에 의한, 그녀의 의사와는 상반되는 외적 강요에 의한 타의적 선택일 뿐이다. 타의적인 규제는 언제나 정당하지만 그만큼 진실 되지 못했고 자의적인 선택은 언제나 진실하지만 그만큼 정당하지 못했다. 정당함은 허무하고 부정함은 진실하지만 정당함은 언제나 부당함을 압제하고 그 위에서 군림한다.
 “누군가 사랑은 섹스이다, 라고 말하면 그건 틀린 말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사랑은 섹스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 역시 맞는 말은 아닐 거잖아. 그러니까 정당하다는 것도 완벽한 진리는 아니라는 거야. 정당함 만큼일 뿐이지. 사랑의 전부가 섹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섹스가 없다면 그게 무슨 사랑다운 사랑이겠어. 한마디로 사랑이 아니지.”
 미경은 가만히 앉아 듣기만 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에 설득된다고 느꼈는지 진남은 성수가 났다. 그로서는 평생 써보지 못했을 유식한 표현까지 가끔씩 끌어들이며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하려고 애썼다.
 “이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만큼 사랑에는 규정된 공식이 없어.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마음이 진정하다면 그것으로 족할 수도 있잖아. 난 미경일 사랑해. 물론 중국집배달이나 하는 주제에 자기의 상대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아. 그러나 미경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야. 그것으로 족하잖아. 미경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미경의 애인이 될 자격이 있는 건 아닐까. 어때?”
 나도 진남 씰 사랑해요 하는 말이 혀끝까지 굴러 나왔으나 미경은 애써 입을 꼭 다물어 유출을 금했다. 그 말이 또다시 불륜을 재개하는 빌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진남이와의 관계를 정리했었다. 이번에 또다시 마음이 흔들리고 그와의 인연을 회복한다면 다시는 그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부터 앞선다.
 “속 시원히 말해봐. 용기를 내어 자신을 위해 인생을 선택해 보라고. 선택의 기준을 자신에게 둬 보란 말이야. 하느님도 자신을 돕는 사람을 돕는다고 했잖아.”
 진남은 미경에게로 바싹 다가앉아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미경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왜 울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무엇 때문에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가?
 오빠의 말을 들으면 그게 옳은 같고 진남의 말을 들으면 그 역시 맞는 것 같다. 여자의 마음을 갈대라 함은 남성의 세계에 유리하도록 구축해 놓은 견고한 윤리적 질서 속에서 욕망과 도덕의 깊은 계곡을 넘나들어야 하는 특이한 운명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 계곡을 건너려면 죽음마저도 감내해야 하는 위험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금과를 따먹으려고 죽음을 무릎 쓰고 남몰래 그 계곡을 넘나든다. 윤리의 올가미는 수족을 옭매고 쾌락의 황홀한 유혹은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혼을 못하겠으면 나랑 도망쳐. 멀리, 아주 멀리 섬에라도 들어가서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자고. 난 미경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어. 정말이야.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당장 미경이 앞에서 칼로 손가락이라도 썩둑 잘라 보일 수 있어. 씨발! 정말 보여줄까. 칼이 어디 있어?”
 진남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카운터의 서랍들을 벌컥벌컥 뒤지기 시작했다.
 “됐어요. 진남 씨가 보여 주지 않아도 난 알아요.”
 미경은 급히 일어나서 진남을 제지했다.
 “안다면서 왜 내 말대로 따르지 않는 거야. 날 사랑하긴 하는 거야?”
 “응.”
 미경은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픔은 그녀를 진실의 세계에로 복귀시켰다. 눈앞의 현실을 부정한다고 부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자기식대로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미경아.”
 진남의 억센 두 팔이 와락 그녀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남자의 무궁무진한 힘은 다시 한 번 그녀의 가슴에 강렬한 욕망을 출렁이게 했다. 이 품, 이 힘, 이 뜨거움, 이 고동소리는 여자의 가슴에 달콤한 감로수로 흘러들며 기름진 토양을 만들어 낸다. 싱싱한 생명과 왕성한 의욕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미경의 몸뚱이는 지금 메마르고 곰팡이 끼고 녹이 쓸고 이끼가 돋고 있다. 그 육체에 생기와 활력을 쏟아부어 줄 사람은 진남이 뿐이다.
 “진남 씨. 우리 이러면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내 말대로만 따르면 안 될 게 하나도 없어. 우리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지 말자고. 자기는 남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태어난 거지.”
 “그래도 안 돼요. 난……”
 미경의 울먹이는 말을 가로막으며 진남의 뜨거운 입술이 접목되었다.
 “으음- 으으-음-”
 언제나 미친 듯한, 탐욕스러운, 입술이 터지는 듯 혀뿌리가 뽑히는 듯한 그 강력한 키스는 미경을 당혹과 함께 황홀한 행복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했다. 벌써 미경의 육신은 익숙한 사내의 점유 욕을 충족시켜 줄 만반의 준비를 갖추며 진남의 무모하기까지 한 손놀림에 활짝 가슴을 열어주고 있었다. 천리마가 질풍같이 달릴 일망무제한 초원을 펼쳐 주었고 비상을 꿈꾸며 달리는 비행기의 활주로를 길게 열어 주고 있었다.
 “자기야. 전화 왔어.”
 느닷없이, 바야흐로 달아오르기 시작한 흥분을 깨트리며 휴대폰벨소리가 울렸다. 그 벨소리는 남편 광혁이 특별히 지정해준 것이었다.
 미경은 흠칫 놀라며 진남의 품 속에서 빠져 나왔다.
 “빌어먹을! 어떤 놈인데? 분위기 다 깨고 있네. 바보, 등신 같은 놈!”
 진남은 다시 본래의 거칠고 막된 모습으로 돌아가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네. 저예요.”
 “어떤 놈인데?”
 진남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미경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눈을 깜빡했다.    
 “어딘데?”
 광혁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찢을 듯이 쩌렁쩌렁 울린다.
 “어디긴요. 가게죠.”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자기야.”
 “알았어. 아무튼 알아서 해. 내 눈은 못 속이니까. 끊어.”
 통화는 그렇게 허망하게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어쩌면 남편은 귀신 같은 신통력이 생겨 지금 사진관에서 벌어진 불륜을 죄다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녀를 전율시켰다.

 

                                                    6장 꽃은 왜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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