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 소설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4.17 장편연재 "붉은아침"24 by 아데라

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3장 만리장성

 

 

 

 

2

 

 

 

 

 빗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굵어졌고 게다가 비바람까지 몰아쳤다. 빗방울들이 콘크리트 광장 바닥을 난타하는 소리가 나뭇잎들이 비바람에 몸부림치는 소리와 합성하며 요란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포옹한 채 열정적인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엔가 폭풍우 같은 거센 비바람에 유리의 손에서 우산이 빠져 달아났다. 누구도 키스를 멈추고 우산을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산은 제멋대로 바람을 타고 광장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준호는 갑자기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빗물에 흠뻑 젖은 전신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냉기가 엄습해왔다. 키스를 하는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고 상체도 화들화들 떨렸다.
 “어머, 준호 씨. 추우신가 봐요?”
 “괜찮습니다.”
 “괜찮으시긴요. 이까지 덜덜 쪼시면서. 우리 여기서 비 맞지 말고 어디 들어가요.”
  두 사람은 그제야 우산을 찾았지만 진작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들은 어린애들처럼 손에 손을 맞잡고 촘촘한 빗줄기의 숲을 뚫고 달려갔다. 맞불어치는 비바람 때문에 달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절 미국으로 보내시겠대요. 아버지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뭐라고요?”
 비바람소리 때문에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리의 목소리는 워낙 낮았다.
 “할아버지께서 절 미국으로 보내시겠대요.”
 소리를 질러서야 들릴 정도로 광장은 쏟아지는 폭우로 가열 처절한 전쟁터처럼 시끌벅적했다. 유리가 큰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듣는 준호는 웬일인지 낭만적인 기분이 들었다. 비 내리는 밤의 공원을 달리며 큰소리로 말하는 연인, 옷은 물자루가 되고 구두 안에도 빗물이 들어차 쿨렁거리고 머리카락과 얼굴로는 강물처럼 빗물이 흘러내리고……
 그러나 그녀가 던져온 화제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심각한 것이었다.
 “유리 씬 어떡할 겁니까?”
 “글쎄요. 아버진 제 의사를 무시하고 강요하실 분은 아니에요. 그러나 아버진 또 소문난 효자시거든요. 미국으로 할아버질 모셔가려고까지 하셨어요. 할아버지가 거절하셨지만……”
 “만일 부친께서 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선택하신다면 우린 이대로 헤어져야 하나요. 우린 이제 시작인데요.”
 강물처럼 빗물이 좔좔 흘러내리는 아스팔트 위로 차량들만 미친 듯이 굴러다녔다. 그들은 텅 빈 도로를 건너 시내로 진입했다.
 유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회피하고 엉뚱한 화제를 만들어냈다.
 “옷이 다 젖었으니 식당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어떡하죠?”
 맞쪼는 그녀의 잇새에서 말마디들이 동강났다. 두 사람은 다 추위에 몸을 옹송그린 채 전신을 우들우들 떨었다. 빗줄기가 시야를 가로막아 거리는 가로등 아래서도 부옇게 윤곽만 겨우 드러냈다.
 “전 이대로 집에 가겠습니다. 유리 씨도 그만 집으로 들어가세요.”
 준호는 속으로는 그녀와 갈라지고 싶지 않았지만 예의상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준호 씨와 함께 있고 싶어요.”
 유리의 목소리는 어찌나 낮은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고개를 떨어트리고 살포시 외면했지만 오늘 그녀가 전에 없이 솔직하고 대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바람에 준호는 은근히 놀랬다. 그들은 사랑의 천당으로 한걸음 더 다가선 것이었다. 호숫가에서의 길고도 뜨거웠던 키스로 그들은 부끄러움과 수줍음의 다리를 건너 좀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의 눈길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빗줄기 건너편에 어렴풋이 보이는 어느 여관 간판에 가 멎었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외면했다.
 “어디 가서 옷이라도 말릴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준호는 민망한 분위기를 돌려보려고 횡설수설했다. 그렇게 두 번째 여관까지 지나갔다. 세 번째로 여관 간판이 나타나자 준호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여기 들어가서 잠시 몸이나 녹이고 나올까요?”
 유리는 금방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길이 떨어진 길바닥으로는 나무 연륜 같은 파문을 오불고불 그리고 있는 빗물이 철철 흘러내렸고 그 위로는 수만 개의 빗방울들이 하늘에서 곤두박질치며 콩 볶듯 튕겨 오르고 있었다.
 프런트에는 40대의 중년 사내가 의자에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그러나 발자국 소리를 듣자 금방 눈을 떴다. 사내의 눈에는 졸음이 안개처럼 껴있었지만 두 손은 어느새 기계적으로 볼펜과 『숙박자 등록』 카드를 쥐고 있었다.
 “방이 있습니까?”
 준호는 게슴츠레한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는 그 사내의 표정에 조소와 비난이 실려 있는 것만 같아 감히 눈길을 마주치지 못했다.
 “밤중에 계집이나 차고 여관으로 기어드는 방탕한 여석!”
 사내의 눈길이 그렇게 질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사내는 하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난 돈만 받으면 되니까. 이렇게 말하듯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아침에 나갈 겁니까?”
 “네. 비에 옷이 다 젖어서 좀 말리려고요.”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 듯 화끈거렸다. 구질구질한 설명이 왜 필요한지 스스로도 몰랐다.
 “2만 5천 원입니다. 303호 방으로 올라가세요.”
 돈을 받고는 방 번호가 새겨진 키를 넘겨주더니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두 눈을 감아버렸다.
 준호의 뒤를 이어 50대의 중년 남자가 20대의 날씬하고 예쁜 아가씨를 데리고 로비에 나타났다.
 “올라갑시다. 옷만 말리고……”
 “먼저 올라가세요.”
 “303홉니다.”
 준호는 도둑놈처럼 고개를 수굿하고 붉은 주단을 깐 계단을 올라갔다. 방 안에 들어가 보니 2인용 침대 하나에 키 낮은 냉장고, TV수상기, 낡은 에어컨, 실내전화가 전부였다.
 유리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방으로 올라왔다.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가을고추마냥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먼저 씻으세요. 옷을 씻어서 널고……”
 “준호 씨가 먼저……”
 “아니 전 나중에 옷을 짜 입으면 됩니다. 저 밖에 나가 있을게요.”
 준호는 급히 복도로 나왔다. 나온 김에 아예 거리로 내려가 부근의 슈퍼마켓에서 소주 두 병과 마른안주와 빵을 사가지고 올라왔다. 그 사이 유리는 옷의 빗물을 짜 입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더운물도 안 나와요.”
 “무슨 여관이. 겉옷을 벗고 이불을 덮고 누워 있으면 몸이 좀 녹을 텐데. 전기장판은 있잖아요.”
 “인젠 괜찮아요. 준호 씨도 옷을 짜 입으세요.”
 “나도 괜찮습니다. 술을 마시면 추위를 덜 것 같아 사왔습니다.”
 방바닥에 사온 음식들을 꺼내놓고 마주앉았다.
 갑자기 옆방에서 우당탕, 퉁탕! 하는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이어 여자의 숨넘어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파요! 나 죽어요!”
 그리고는 금방 짝짓기 철이 된 고양이의 울음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절주 있게 들려왔고 그럴 때마다 여자는 비명을 내지르곤 했다. 총각이 아니라 중학생이라도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준호는 아까 그와 함께 투숙한 50대의 사나이와 20대의 아가씨를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유리도 고개를 숙인 채 쳐들지 못한다.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술병을 따고 준호의 종이컵에 따라주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살결이 포동포동하면서도 미끈한 그녀의 손목은 옥으로 쫀 듯, 우유로 빚은 듯 투명하고 맑고 부드러웠다. 준호는 얼었던 속이 녹지 않아 자꾸만 이가 덜덜 맞쪼이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음탕한 소리를 못들은 척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고 술잔만 부지런히 기울였다.
 “어쩐지 이번에 할아버지가 결심을 굳히신 것 같은 예감에 불안해져요.”
 유리가 먼저 침묵의 뚜껑을 열었다.
 “미국으로 보내려 하신다고요.”
 “네. 미국으로 떠나면 우린 갈라져야 하는데……  전 준호 씨 곁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요.”
 비바람 때문에, 어둠 때문에, 옆방에서 들려오는 얼굴 뜨거운 신음소리 때문에 그도 아니면 방금 전 호숫가에서의 키스 때문인지 그녀의 수줍음은 오늘따라 많이 해소되어 있었다. 사랑에도 준호 못지않게 적극적이었다.
 “나도 같은 심정입니다만……”
 술을 마시면 추위를 덜려니 했는데 아무 소용도 없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에 오장육부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방바닥이 차서 안 되겠어요. 전기장판이 있는 침대 위로 자리를 옮겨요.”
 유리의 제의에 따라 술과 안주를 들고 침대 위로 자리를 옮겼다. 따스한 전기장판 위에 앉자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옆방의 낑낑거리는 음탕한 소리가 아까보다 더 치열하게 들려왔다. 때로는 엉엉 울다가 때로는 킬킬 웃어대고 때로는 질식할 듯 괴괴하다가 갑자기 야릇한 괴성이 터져 나오기도 하고 쿵덕쿵덕, 삐거덕삐거덕 잡음이 들리기도 하고……
 추위를 덜어보려고 연신 마신 술에다가 한기까지 풀리면서 갑자기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오늘은 느닷없이 진옥 씨가 생각나요. 그때 준호 씨가 진옥 씨의 간청을 들어주었더라면 모르긴 해도 준호 씨 아버님의 고집을 꺾을 수도 있었을 거 아녜요. 어쩌면 우리의 지금 처지도 그때와 비슷한 경우인지도 몰라요. 뭔가를 보여드려야, 만회할 수 없는 극한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드려야만 부모님들의 고집을 꺾을 수 있다면, 사랑은 그 어떤 대가나 가능성마저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진옥 씬 깨달았던 것 같아요.”
 준호는 유리의 느닷없는 말에 놀랐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진옥이가 선택했던, 그러나 준호의 냉담한 거절로 수포로 돌아갔던 그 옛날의 기억 속에 묻혀버린 길을 다시 걸어가겠다는 말인가. 그처럼 수줍던, 성품이 온화하고 단정하던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세대의 골짜기를 메우고 이념의 벽을 허물고 평화와 사랑을 여는 길이 그것밖에 없다면 말이에요.”
 어찌 보면 유리는 과음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짓궂게 뭔가를 지향하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취하려고 일부러 폭음함으로서 윤리와 관념의 포로가 된 이성의 일방적 권위를 박탈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전 요즘 진옥 씨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어요. 할아버지가 우리의 사랑을 반대하셨을 때, 준호 씨의 부친께서 우리의 사랑을 반대하셨을 때 이 견고한 벽을 어떻게 하면 허물어 버릴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거듭했어요.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모습이 바로 진옥 씨였어요. 진옥 씨는 자신들의 결합으로 부모님들의 원한을 화해시키려 했던 거예요. 진옥 씨가 바랐던 결합은 지금 저 옆방의 남녀가 추구하는 단순한 동물적인 성욕이 아니었어요.”
 그렇다. 유리 씨는 스스로 제 2의 진옥이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순결한 사랑으로써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준호 씨, 제가 취했나 봐요. 정신이 촛불처럼 가물가물해져요. 정신이 촛불처럼……”
 유리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맥없이 스르르 쓰러졌다.
 “유리 씨.”
 불러도 대답이 없다.
 준호는 술과 안주를 침대 위에서 치우고 그녀를 자리에 눕힌 다음 베개를 베우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방바닥에 내려와 누웠다. 바닥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다시 일어나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대었다. 아직도 의복은 축축하다……
 “준호 씨. 차가운 방바닥에서 주무시다가 감기라도 들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세요. 어서 침대 위로 올라오세요.”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유리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방바닥에서 잘게요.”
 “아니, 함께 올라갑시다.”
 준호는 침대 변에 엉거주춤 누웠다. 그러나 바로 옆에 누워있는 유리가 느껴지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기억의 아득한 숲 속에서 진옥이 걸어 나왔다.
 “오빠, 기회는 한 번밖에 없어요. 그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예요. 유리 씨 할아버지와 오빠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반대하잖아요. 두 분이 헤어지지 않으려면 오늘밤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라요. 진옥의 불행을 잊지 마세요. 이건 불륜도 불효도 아니잖아요. 사랑의 확인이고 검증이고 약속일뿐이에요. 사랑에 충직하고 위기 앞에서 스스로를 구해 사랑의 포로로 만드는, 책임적인 행동일 뿐이에요. 서로를 맡기고 책임지세요. 후회하지 않도록. 모든 여자들은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저 만큼 기억의 강 건너에 오도카니 서있는 진옥의 눈에서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이상한 것은 강을 사이에 둔 먼 거리인데도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 조용히 돌아서더니 다시 기억의 숲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버린다.
 “진옥아.”
 가만히 불러보았으나 그녀는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리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벽 쪽으로 누워있었다. 방선을 해제한 그녀의 이런 행동이 정말 술에 취해서인 듯도 싶고 어쩌면 그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기 위한 위장술 같기도 했다.
 그녀에게로 돌아누웠다. 동그스름하고 탄력 있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볼까 생각을 했다. 그러나 금시 가슴부터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숨결마저 거칠어지며 목구멍에 걸렸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꼭 이렇게 해야만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가. 그러나 솔직히 오늘밤의 인연으로 그녀의 영원한 죄인이 되어 유리 씨를 책임지고 싶어졌다. 그 죄를 명분으로 말이다. 강력한 소유욕과 집착이 망설이는 준호에게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할아버지세대와 아버지세대가 구축해 놓은 견고한 원한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천으로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사랑 앞에서는 이념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다.
 떨리는 팔을 가까스로 움직여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불덩이에 닿은 듯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유리의 상반신도 가늘게 경련했다. 심장의 박동소리가 어깨에까지 미쳐 콩닥거렸다. 준호는 생각했다. 우린 지금 비단 우리 자신의 성역에 도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의 권위에도 도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체험하고 윤리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 하나의 완전한 독립적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이것은 또한 생명의 성숙이기도 하고 권위에 반발하고 기존질서에 대항하는 혁명이기도 하다고.
 그때쯤, 옆방에서는 모든 분망한 작업이 종료된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끝없는 정적의 공간이 이제 두 사람의 흥분과 욕망으로 꽉 들어차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준호는 자신의 성기능이 만가동이 되어 발차신호만을 고대하고 있음을 느끼며 고도로 긴장되었다. 26년 만에 처음으로 떠나는 감격의 여행이었다. 그 여행길에 진옥의 초청을 받은 적도 있고 지은의 초청을 받은 적도 있지만 그는 죄다 사양했다. 어쩌면 유리와의 오늘 여행을 깨끗하게 출발하기 위해 거절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같이 떠나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다.
 준호는 그녀의 상반신을 안아서 돌려 눕혔다. 그녀의 온몸이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 마른 나무토막 같았다. 그러면서도 유연하고 부드럽고 탄력 있었다. 비옥한 토양 같고 떠오르는 태양 같고 은빛 찬란한 보름달 같았다. 그녀의 온몸은 한 줄기의 황홀한 광선이었다. 아름다움의 원천인 광선! 그리고 그녀에게는 향기로운 체취까지 있었다.
 “우리 이래도 되는 거죠?”
 눈을 감은 채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잉걸불 속에 묻은 감자마냥 하얗게 익어들며 구수한 향기를 발산했다.
 “두 번 다시 진옥의 불행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전 오늘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나도요.”
 두 사람의 몸뚱이는 나무뿌리처럼 칭칭 얽혀들기 시작했다.
 “유리 씬 유리 씨가 태어날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신성한 순간을 앞두고 준호의 사고는 이상하게도 냉정한 코스를 고집했다.
 “아니요.”
 유리는 벌써 준호가 묻는 물음의 함의를 깨닫고 있는 듯 했다.
 “물론 우리는 죽음도 알지 못하겠지요.”
 “그럴 테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생은 앞뒤가 잘린, 중간토막일 뿐입니다. 시작과 끝을 모르니 즉 원인과 결과를 모르고 결국 과정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종교나 과학에 의한 간접적, 추상적 인식에 의존할 따름이지요.”
 “그러니 인간은 과정만을 즐기는 동물인 셈이군요.”
 준호의 손은 보습처럼 상대방의 달아오른 육신을 흥분으로 갈아 번지며 달콤한 애무를 파종했고 혀와 혀는 입술을 뚫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시간도 정지하고 세상의 모든 움직임도 멈춰 섰다.
 어느덧 두 사람의 몸은 나신이 되어 있었다. 기름이 팍팍 뿜겨 나오며 두 나신은 욕정의 불길에 휩싸였다. 준호의 육신은 힘찬 백마처럼 가없이 넓고 푸른, 기름진 들판을 줄기차게 달렸다. 박차를 가할 때마다 방울소리가 구성지게 울렸다. 싱싱한 잔디는 말발굽에 짓이겨졌다가도 지나가기 무섭게 다시금 빳빳하게 일어섰다. 호수는 맑고 투명한데 백마는 물속 깊숙이 주둥이를 들이밀고 시원하게 갈증에 탄 목을 적셨다. 살진 물고기 떼가 유유히 노니는 호수 위에는 아름다운 원앙새 한 쌍이 떠 있었다.

 “우린 오늘 우리 자신에게 속한 독립적자아를 확인하고 찾았어요.”
 “슬픈 일이지만 무엇 때문에 우리의 금일 밤이 번식을 위한 동물의 가장 단순한 성 결합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까. 이제 인간은 가장 원시적인 성 결합에서까지 정치적인 의미의 타산과 개입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윤리의 규제도 모자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어른들은 성 결합 앞에서는 굴복하고 양보하는 거죠? 성적 또는 본능적인 하나의 성 결합이 어찌 사랑의 전부의 의미가 될 수 있나요. 실은 그런 성적결합 없이도 인간의 사랑은 가능한거잖아요. 성 결합은 가능해도 사랑은 고갈되어 이혼을 하듯이 말이에요.”
 다시 술상에 마주앉았고 화제는 비약하기 시작했다.
 “마치도 정치인들이 전쟁을 통해서만 승패를 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전쟁에서 이긴 쪽에 반드시 진리가 있다고 할 수 없듯이 전쟁에서 패했다고 반드시 불의라고 할 수 없잖습니까.”
 금방 흥분의 대해를 건너온 그들에게 이런 말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화제 말고는 다른 화두를 만들 줄조차 몰랐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탕진하고 도덕적으로 철저하게 무너진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모님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불안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지기 위해 부모님에 대한 책임을 포기했다는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뭐라고 해도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자신이라는 존재는 많건 적건 다른 존재의 걸림돌이 된다.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시공간이 그를 위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요. 이제부터 전 준호 씨 한 사람만을 믿고 따를 거예요.”
 유리는 또다시 수줍고 온화한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가 있었다. 노을처럼 비낀 얼굴의 홍조가 그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수줍음은 결코 그 자신을 속박하는 한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오늘 준호에게 보여주었다.
 “그렇습니다. 우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지요. 말하자면 우리의 도하는 의지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성숙의 강을 건너 사랑의 섬에 도착한거지요. 이 섬에는 유리 씨와 저 준호밖에 없습니다. 이 섬의 주인은 우리 두 사람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의 섬에서 떠났습니다. 누구도 우릴 지배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우리 자신입니다. 유리 씨의 할아버지께서나 저의 할아버지, 아버진 우리더러 불륜의 강, 불효의 강을 건넜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사랑의 강을 건넜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에게 예속시켰습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까.”
 준호는 약간 흥분했다. 하나의 평범한 행동이 그렇듯 많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데 스스로도 놀랐다.
 “어쩌면 우리는 이념의 강, 신념의 강을 건넜는지도 몰라요. 우리가 닻을 내린 이 섬에는 오로지 사랑과 평화만 있기를 바라요. 우리는 평생 사랑과 평화를 수출하면서 우리의 애정을 경영해 나가요.”
 “그럽시다. 우리에게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인간이 있는 한, 국가와 사회가 존재하는 한, 계급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할 거잖아요. 그게 두려워요.”
 “설령 유토피아라고 하더라도 우리 영역에서만이라도 전쟁을 추방합시다. 동물의 영역을 위한 싸움은 먹이를 확보하기 위한 한계까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준호는 진옥을 생각했다. 한국에 나올 수 있도록 초청장을 만들어 보내달라던 간청이 아직도 그의 귓전에 쟁쟁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고도 아버지의 일, 자신의 일 때문에 아직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은 꼭 여행사로 찾아가 봐야지.
 유리를 알고 나서부터 진옥의 불행이 더욱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감이 들 때가 많았다. 사랑이 책임이라고 할 때 더구나 그랬다. 준호도 분명 진옥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지켜 주진 못한 것이다.
 “우리의 결합이 두 이념의 화합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인간도 동물처럼 단순하게 살 수 없을까요?”
 “사랑이 이념보다 의미나 가치가 부족하다는 이유는 없습니다. 이념은 인간을 둘 또는 셋으로 분열시키지만 사랑은 인간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사랑은 반드시 이념을 이길 것입니다.”
 “이제부턴 「6.25참전자 실록」을 집필하실 거죠?”
 “네. 유리 씨가 도와 준 덕분에 드디어 집필을 착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훌륭한 글을 쓰시길 기대하겠어요.”
 “고맙습니다.”
 화제가 오가는 사이에 어느덧 날이 훤히 밝았다. 창문커튼의 꽃무늬가 아침노을에 물들어 불그레했다.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언제 비가 내렸던가 싶게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 또 추궁 받을 텐데 어떡합니까?”
 “잠자코 듣기만 하면 되는 걸요 뭐. 궁상을 짓고 있으면 할아버지의 동정과 연민을 쉽게 유도해낼 수 있거든요.”
 “할아버지의 선량함을 악용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할아버지에겐 그런 대응방법이 악용이 될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사랑을 지켜야 하는 저에겐 일종의 전략전술에 불과한거예요.”
 “정말 유리 씰 미국으로 보내면……”
 “심신이 하나가 되었는데 몸이야 어디로 가던 무슨 상관이에요.”
 “하긴 그렇습니다만. 보고 싶어서……”
 그들은 여관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학교로 나오실 겁니까?”
 “오늘은 일요일이잖아요.”
 “아참, 내 정신 봐라. 깜박했습니다.”
 결국 진옥을 위해 모처럼 마음을 먹고 여행사로 가려던 계획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준호 씨만 생각할거예요.”
 유리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얼굴에 노을이 비끼며 그의 귓전에 대고 가만히 속살거렸다. 입김마저 달콤했다.
 준호는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넣어 꼭 껴안았다. 유리는 그의 팔을 살며시 풀어내며 주위를 살펴본다. 준호는 한사코 팔을 풀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유리의 수줍은 모습을 보기가 재미있었다. 실은 준호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대담해졌다. 이제 그들 사이엔 어떠한 간격도 없었다.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유리는 플랫폼에서 열차가 사라질 때까지 준호를 바래주었다.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화가 잔뜩 나서 손녀딸이 나타나기만을 고대할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났다.
 준호 씨!
 금방 손을 놓고 갈라졌는데 곁이 허전하다. 세상을 통째로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냥 어디까지고 따라갔을 걸! 벌써 보고 싶어지니 어떡해.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벼락이 떨어질 줄로만 알았던 할아버지는 이상하게도 손녀가 밤새 외박하고 아침에 나타났는데도 말 한마디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태연하게 TV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벌써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고 바닥에 꿇어앉히고 벌을 주었을 분이 의외로 무심하게 대하니 유리는 도리어 공포감에 질렸다.
 가정부 아줌마가 주방에서 가만히 그녀를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유리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아가씨, 지난밤 어딜 가셨어요? 어르신께서 한 잠도 주무시지 않고 밤을 새웠어요. 식사도 안 드시고.”
 “다른 일은 없었어요?”
 “왜 없어요. 미국에 전화를 걸어 아가씰 당장 데려 내가라고 엄포를 놓으시던 걸요.”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죠?”
 “가만히 들으려니 그러마고 대답하는 것 같았어요. 저더러 아가씨 짐을 챙기라고 시키던 데요. 하루도 더 둘 수 없다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지난밤의 사건이 어쩌면 문제를 더 악화시켰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건지며 유리는 거실로 나왔다. 할아버지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것 없다. 나도 너하고 할 말이 더 없고. 하루빨리 보퉁이 싸가지고 네 아비, 어미한테로 떠나거라. 그 사이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할 줄 알아라. 내가 네 지도교수와 전화로 네가 유학을 갈 거라고 말을 해 놓았으니까 그리 알거라.”
 “가더라도 학위증서나 받고 떠나야……”
 “그까짓 학위증서 같은 건 필요 없다. 미국 가서 따도 되는 거니까.”
 “할아버지……”
 “꼴도 보기 싫으니 그만 네 방으로 올라가거라.”
 할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손녀에게서 등을 돌렸고 결심은 바윗돌처럼 굳어진 것 같았다.
 “네.”
 유리는 조용히 2층 침실로 올라왔다. 그러지 않아도 피로가 쌓였었다.
 “인젠 제 멋에 다 컸다고 할아비 허락도 없이 제 맘대로 외박까지 턱턱 하구 잘한다!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그 말이 하나도 그른 데 없구나. 어디 네 애비, 어미한테 가서 맘대로 해봐라. 난 자신이 없다. 할아비 말도 안 듣는 못된 계집애 같으니라고!”
 거실에서 할아버지가 퍼붓는 욕설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의 귀에는 그 소리가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방 안에 가득 찬 준호의 체취를 싱싱하게 느꼈고 아직도 그의 말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난밤의 황홀했던 정사의 아름다운 화면들이 영화필름처럼 기억의 스크린에 방영되었다.
 준호 씨, 사랑해요! 미국에 가든 안 가든 준호 씨를 사랑하는 제 마음은 변함없을 거예요.
 유리는 준호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그의 체취를 음미하며 입 속으로 가만히 속삭였다. 부모님의 사랑은 자식이 그 소유권에서 이탈하려 하는 순간부터는 사랑이 아니라 부담과 장애로 역작용할 경우도 있다. 지금 할아버지가 그랬다. 참으로 손녀딸을 사랑한다면 유리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랑에도 한계가 있을까? 아니야. 나와 준호 씨의 사랑에는 절대로 한계 같은 건 있을 수 없어. 조건도 없고 범위도 없어. 난 아버질 설득할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까 한국에 남게 해달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릴 거야. 할아버지세대의, 아버지세대의 원한이 삼세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쳐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걸 보여드려야지. 제발 우리를 전 세대 원한의 희생물로 제단에 바치지 말아달라고 사정할거야. 사랑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다는 걸 아버진 알고 계실 테지. 이 딸이 할아버지의 원한을 이어받아 복수의 화신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 사랑의 천사가 되기를 바라겠지.
 유리는 이런저런 생각을 더듬다가 밀려드는 피로에 떠밀려 꿈속으로 들어섰다.
 “유리 씨, 어서 이쪽으로 건너오세요.”
 넓고 깊은 강이 흐르고 그 대안에는 준호 씨가 서서 이쪽에 대고 안타까이 손을 젓는다.
 “기다리세요. 금방 건너갈게요.”
 유리는 서슴없이 강물에 뛰어들었다. 첫발을 들여놓자 벌써 물결이 가슴을 친다. 느닷없이 조각배 한 척이 나타났다. 빈 배에 오른 그녀는 손으로 노를 저어 강물을 건너갔다. 그러나 강 중간에 이르자 물살이 어찌나 급한지 배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준호 씨! 준호 씨!”
 유리는 연신 준호를 부르다가 벌떡 깨어났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돋아 있었다.
 “강은 이미 건넜는데 또 무슨 강이지? 미국과 한국을 가로막은 태평양을 의미하는 걸까?”
 기분이 착잡해졌다. 전쟁이 발발하지 말거나 아니면 준호 씨의 할아버지와 그녀의 할아버지 사이에 악연이 없거나 그도 아니면 우리들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거나 할 것이지 하필이면 그 모든 악연들이 죄다 우리의 어깨에 지워질 건 뭘까 싶었다.
 준호 씨!
 자꾸만 불러 보고 싶은 이름이다. 그렇게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르면 마음속의 모든 번뇌와 고독과 불안과 초조가 잠시나마 말끔히 가셔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준호가 자취방으로 돌아오니 지은의 모친 아산 댁이 와 있었다. 그녀 한 사람이 와있는데 방 안은 역 대기실처럼 소란스러웠다. 한 번 입을 열면 다른 사람은 말할 사이도 없이 수다스러운 여인이었다. 목청이 유난히 높은데다 말까지 빨라 앞말의 발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뒷말이 굴러 나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얼버무려댔다.
 “그 영감태기가 너네 집을 다녀갔단 말이지? 왜 우리 집은 피해 갔다냐? 지은 죄가 있으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테지! 쌍놈의 영감탱이! 반평생이 다 지나갔는데 인제 와서 그 말을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냐. 불쌍한 사람에게 있지도 않은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씌우고는 폐인을 만들어놓고 인제 와서 그 말은 왜 하냐 말이다. 참으로 죄지은 놈은 자기면서도 벌은 내가 받고. 아이고, 억울해라! 내 가슴이 터진다. 분통하고 원망스럽다. 이 원수를 누구한테 갚고 불쌍하게 썩어버린 내 청춘을 누구한테서 돌려받는단 말이냐. 그 빨갱이가, 영감의 총에 맞아죽은 인민군이 네 할아비가 아니면 네 할아빈 또 누구란 말이더냐. 하느님 맙소사! 세상에 어찌 이런 한심한 일이 다 있습니까. 이 불쌍한 여자를 좀 굽어 살피옵소서!”
 아산 댁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명철은 민망하여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지은은 냉담한 표정을 지은 채 엄마를 직시하며 위안이라기보다는 빈정대고 있었다.
 “그만 좀 해. 동네가 창피하잖아. 이제 누굴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 그 사람도 인젠 늙은이고 더구나 불구자고 피해자잖아. 우리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야지.”
 “새롭게 시작하다니, 다 늙어 꼬부라든 할망구가 뭘 어떻게 새롭게 시작한다는 거냐. 인젠 몸에 병까지 들어 비실비실 하는데…… 내 그 늙다리를 찾아가 손해배상금이라도 받아내고야 말 테다. 그저 당하고만 있을 줄……”
 그제야 로비에 우두커니 서서 방안을 기웃거리는 준호를 발견하고는 지은이가 먼저 알은체 했다.
 “오빠, 어디 갔다 인제야 오는 거야?”
 “밖에 일이 좀 있어서. 어머님 오셨어요?”
 준호는 아산 댁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운명의 희롱을 받은 그녀, 억울하게 소외당했던 그녀의 심리고충을 이해할 듯도 싶었다. 송사나 보상은 고사하고 하소연할 곳도 없는 그녀의 마음은 어두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 신음소리를 듣기가 괴로웠다. 그는 그냥 자기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지은이가 뒤따라 들어왔다.
 “난 엄마의 수다가 딱 질색이야. 성격장앤지도 몰라.”
 “어머니하고 그게 무슨 말이냐.”
 “오빤 저 절망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듣기 좋아? 엄마를 저렇게 만든 사회도 싫고 운명 앞에 비굴하게 굴복한 엄마도 싫어. 참, 그런데 오빠.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구나. 그지?”
 “일은 무슨 일?”
 “외박했잖아. 어디 지은이가 맞춰볼까? 유리 씨와 함께 있었지? 지난밤 어른이 된 거지. 맞지?”
 “그게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거짓말 마. 얼굴에 다 쓰여 있는 데도 속이려고 해. 난 어젯밤 유리 씨를 만나 어른이 되었다 이렇게 말이야.”
 “뭐라고? 어른이 되었다고! 그럼 난 여태 어린애였단 말이냐.”
 준호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웃지 마. 사람은 꼭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니야. 어른이 되는 경험을 해야 어른이 되는 거지.”
지은인 무슨 신비한 비밀이라도 발견해낸 듯 손뼉까지 짝짝 치며 깔깔거렸다.
 “그 경험이라는 게 뭔데?”
 준호는 시치미를 떼고 능청을 떨었다. 지난밤의 정사가 기억의 숲을 헤치고 나오며 가슴속으로 파도처럼 행복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그게 어른이 되는 경험이라고? 그 표현이 맞는지는 몰라도 꽤 재미있게 느껴졌다.
 “오빤, 알면서.”
 지은은 준호의 팔소매에 매달리며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간질였다.
 “알긴 뭘 알아.”
 “오빠. 나 명철 씨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어. 엄마도 허락했어.”
 “그래. 정말 잘됐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오빠도 결혼식에 참가할거지? 유리 씨와 함께 참 인젠 유리언니라고  불러야겠네.”
 “참가하구말구. 그런데 공부는 어떻게 하구?”
 “물론 대학을 졸업한 다음이지.”
 “난 또. 어서 엄마한테 나가봐. 위로도 좀 해 주고. 마음에 받은 상처가 얼마나 심하시면 저러시겠어. 나도 옷을 갈아입고 나갈게.”
 “알았어. 금방 나와. 나 지금 오빠가 좋아하는 매운탕을 끓인다. 우리 술 한 잔 해.”
 지은은 물새처럼 포르르 날아나갔다.
 어른이 되었다!
 준호는 지은의 말을 입 속으로 되뇌며 지난밤에 있었던 유리와의 정사를 다시 기억 속에 떠올렸다.`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연재 "붉은아침"26  (0) 2012.05.11
장편연재 "붉은아침"25  (0) 2012.04.29
장편연재 "붉은아침"23  (0) 2012.03.31
장편연재 "붉은아침"22  (0) 2012.03.20
장편연재 "붉은아침"21  (0) 2012.03.04
Posted by 아데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