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장편연재 "붉은아침"23
장혜영
3장 만리장성
1
백로가 지나더니 혹서는 한풀 꺾이며 주춤한다. 아직은 산과 들에 묻어 있는 더위를 식히며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이따금 불어왔다. 가을바람에 수분이 증발되는 가로수 잎들은 낙엽을 앞두고 마지막 푸름을 싱싱하게 자랑한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 위로는 유람선 한 척이 뱃고동을 울리며 뚝섬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요트에 달린 끈을 잡은 수상스키운동원이 물결을 가르며 아슬아슬한 재주를 넘는다.
유리가 운전하는 아반Ep는 한강을 끼고 넓게 펼쳐진 88올림픽대로에 진입했다. 준호는 유리의 옆 좌석에 앉아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던져 놓고 있었다.
준호는 강릉을 다녀온 뒤로 오늘 처음 유리를 만났다.
며칠 전 준호는 아버지의 느닷없는 사고소식을 접하고 강릉을 다녀와야만 했다. 아버지가 체불임금을 받아내려고 사장실에서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다가 신고로 경찰에 구속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공사판에서 작업 중에 손가락을 잘려 병원에서 복구수술을 받긴 했지만 체불임금은 고사하고 치료비조차 부담하지 않으려는 사장의 비열한 태도에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한 모양이다. 결국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아버지의 평소의 삐딱한 시선이 수습불가의 불행으로까지 이어지고 만 것이다. 다행이도 아버지가 그때까지 입원중이고 경찰의 조서가 작성되기 전이어서 인맥을 통해 법무부에 넘겨져 강제추방당하는 변고는 면할 수 있었으나 연줄을 댄 사람이 유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최영식은 그녀의 호의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 순간 아버지의 표정은 감사는 고사하고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랬구나. 알고 보니 그런 영문이었구나. 그러니까 나를 도와준 사람이 한종수의 딸이었단 말이지. 저기 경찰아저씨, 어서 날 파출소로 압송해가시오.”
“아버지, 왜 이러세요?”
“이 아빈 죽으면 죽었지 원수 놈 집안의 도움은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준호 너도 명심해라. 저 다시 한 번 경고한다만 아버지나 할아버진 너희들의 결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터이니 그리 알고 일찌감치 헤어져라.”
그렇게 아버지는 제 발로 경찰서로 찾아갔다. 준호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볼 뿐 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세대의 한이 아버님의 가슴속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렸나 봐요. 도와준다는 게 도리어.”
유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저분들에게는 전쟁이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겁니다.”
“참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강릉에 계세요. 제가 소개했다는 말씀을 드리지 말고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요?”
“안 됩니다.”
“왜요?”
“아버지는 30년 경력을 가진 당 간부입니다. 종교 같은 건 인민을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지요. 그러니 어찌 목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 길로 가시는 건 아버지의 운명입니다.”
준호는 무거운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아버지는 피해가야 할 길이 너무 많았다. 이 세상에 길은 많고 많은데 오로지 한길만을 고집하니 그 길이 막히기만 하면 갈 길이 없어진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강릉에서 준호와 유리 그리고 지은이 세 사람은 아버지 사건 때문에 우연히 한 자리에 마주앉게 되었다. 유리는 해외공관에 근무하는 아버지의 친구인 국회위원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내려왔고 지은은 내막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걱정이 된다며 제 발로 강릉으로 달려왔다. 공작산 등산을 다녀온 뒤로는 유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다. 전화 통화에서 그는 유리가 할아버지의 감시 때문에 외출이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자신도 자취방에 있으면 하루에 두세 번씩 아버지의 감시전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 이제는 그런 감시가 두려울 것이 없었다. 부모님들이 훼방한다고 하여 마음이 변할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그들은 한동안은 만나지 말고 각자 밀린 공부를 하기로 약속했다. 감시가 완화되면 그때 만나도 늦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또 만나게 된 것이다.
“오빠, 여기 있었구나!”
지은이가 환성을 지르며 달려 들어오는 바람에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쏠렸다. 다소곳이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숙인 채 무슨 생각에 잠겨있던 유리의 시선도 천천히 그녀 쪽으로 이동했다. 지은은 커피숍에 들어서다 말고 준호 옆에 앉은 낯선 아가씨를 보자 흠칫 놀라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금방 혀를 홀랑 내밀며 자신의 결례를 애교로 넘기려고 했다.
“오빠,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숨겨두고 나 몰래 사귀고 있었구나. 오빠, 너무한다.”
아무 주저 없이 그들 사이에 의자를 들이밀고 끼어 앉았다.
“명철 씨는 어쩌고 너 혼자 온 거니?”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난감해진 유리에게 지은이한테는 명철이라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함으로서 혹여 불러올지도 모를 불필요한 오해를 일소시켰다.
“오빠 보고 싶어 왔는데 명철 씨의 동행이 왜 필요해. 아가씨, 저한테도 녹차 한 잔 주세요. 둘이서 나 몰래 데이트하느라고 속인거구나. 그지 오빠?”
“아니라니까. 일이 좀 있어서. 난 어제 오고 유리 씬 아침에 도착했어.”
진실인데도 변명처럼 들려 준호는 얼굴이 붉어졌다.
유리도 고개를 숙인 채 귀뿌리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눈은 속이지 못해. 얼굴에 다 써져 있어.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처럼 속은 거지. 말해 봐. 사귄지 얼마나 됐어? 사랑의 이정표는 어디까지 지났어?”
“그러지 말고 서로 인사나 해.”
“유리 씨라면서. 전 지은이예요.”
지은은 도발적인 표정을 구태여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알릴 듯 말 듯 그냥 가벼운 목례만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립니다.”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녹차가 배달되어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준호는 분위기를 어떻게 조절하면 좋을지 몰라 유리의 표정만 살폈다. 유리도 몸 둘 바를 모르며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지은은 그게 재미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혼자만 소외당했다는 불만과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아간 유리에 대한 질투가 꿈틀거리는 모양인지 그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골라 던져 왔다.……
“오늘 저희 집으로 가요. 할아버지께서 친구 생신잔치 때문에 부산으로 내려가 집을 비우셨어요. 같이 할아버지의 육필초고 정리해요.”
아버지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지은과의 삼각관계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는 조금 서먹해진 듯싶었다. 차에 올라 캠퍼스를 빠져나오면서 먼저 화제를 유도해낸 사람은 유리였다.
“아버님의 체불임금과 보상금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변호사 한 분 계세요.”
“고맙습니다만, 왜서인지 변호사까지 청하며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받아내면 좋고 받지 못해도 무방합니다. 몇 백만 원으로 빚을 청산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저도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것으로 아버님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서.”
유리의 한없이 그윽한 눈동자에 이슬이 반짝였다. 아버지에게 이유 없는, 억울한 무시와 외면을 당하고도 그분의 마음의 상처까지 보듬어 주는, 그녀의 샘물 같은 진정이 뭉클하고 가슴에 와 닿았다. 아들이 못한 효도를 그녀가 대신하고 있었다. 진옥이와의 이별 때문에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만은 준호가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데 알게 모르게 장애물 같은 작용을 했다. 준호에게 아버지는 부친이기 전에 기득권을 명분으로 자신을 억압하는 어떤 견고한 감옥이나 형틀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유리에게 아버지는 아파할 줄도 알고 보상심리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마주보기가 부끄러웠다. 부자간의 천륜과 도리를 지키기도 전에 세대차이의 깊은 계곡을 두고 전쟁부터 하려 한 자신이 민망해졌다. 내 가슴 속엔 아직도 관용과 너그러움이 부족하다. 나에게 불리함을 주었다고 해서 외면하고 지어는 복수하려는 악심이 꿈틀거리고 있다. 사랑보다는 증오심이 내 마음을 정복하고 있다. 자신에게 해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아버지의 허물마저 용서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6.25참전자 실록」을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집필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우선 내 마음속에 있는 불만과 증오부터 정화해야 한다. 유리처럼 조건 없이 밝고 따뜻한 마음으로 인간과 세상을 대해야 한다. 마음의 평화가 없이는 절대로 전쟁이 근절될 수 없다.
“지은 씨라고 하셨죠?”
“네?!”
느닷없이 지은이를 화제에 끌어들이는 저의를 알 수 없어 저도 모르게 신경이 팽팽해졌다.
“솔직하고 당당한 성격이 부러웠어요.”
유리의 투명하고 보송보송한 볼에 박꽃 같은 하얀 미소가 피어났다.
“그냥 평범한 친구일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변명을 달아야 하는지, 구태여 구질구질한 주해나 설명이 필요한지도 모르며 구실을 고르기에 급급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호의적이 아니었어요. 거의 도전적이었고 적의까지 비쳤어요. 지은씬 분명 준호 씰 사랑하고 있어요.”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한 번도 지은일 이성으로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랑도 질투와의 전쟁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전 정말 자신이 없어요.”
기실 유리는 이미 사랑을 위해 부모님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는가. 그녀도 이번 전쟁에서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
“유리 씬 지은이와 전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이미 탈북자청년과 결혼까지 언약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저와 지은 씨의 사랑쟁탈은 전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었네요. 전 솔직히 두려웠어요.”
그녀의 뺨이 빨갛게 익어 능금 같았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부모님들과의 전쟁이 남아 있습니다.”
“그 전쟁은 두렵지 않아요. 자식을 미워하는 부모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승리는 반드시 우리 몫이 될 거예요.”
“신념을 천륜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잖아요.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건 혈육이 아닌가요.”
차는 그냥 한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88올림픽대로를 달리다가 행주대교를 건너 신평동 쪽으로 좌회전하여 일산으로 진입했다.
실은 지난번 강릉에서 세 사람은 유리의 차를 타고 함께 상경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는 단 일 분도 숨 막혀 살지 못하는 지은이마저 전날 밤에 뭘 했는지 뒷좌석에 혼자 기대어 이동하는 동안 내처 잠만 잤다. 차에서 내려 유리와 갈라져서야 자취방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걸어가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오빠, 그 아가씨 좋아하지?”
그 아가씨란 유리를 가리킨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지은의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자니 그녀의 마음을 불쾌하게 할 것 같고 부정적인 대답을 하자니 유리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모른 척 어물쩍 넘기려 했다.
“누굴?”
“유린지 하는 아가씨 있잖아.”
준호는 대답을 회피한 채 지나가는 승용차를 피하는 척 하며 딴전을 피웠다.
“나보다 인생을 진지하게 사는 것 같았어. 반듯하고 투명하고 지적인데다 교양미까지 넘치고. 유리 씨 앞에서 저도 모르게 나 자신이 초라하고 추접스럽고 더러워 보였어. 고속도로만 달려온 순탄한 인생, 꽃밭 속에서 향기만을 즐기며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가시덤불을 헤치고 진흙탕 속에서 더러운 악취만 맡으며 살아온 나의 거칠고 피투성이 된 인생과 대조되며 질투와 시샘을 억누를 수 없었던 거 있지. 난 많은 남자들과 지내봤지만 진정으로 이성으로서 사랑한 사람은 오빠뿐이었어. 그런데도 오빠의 사랑을 얻지 못했는데 너무 쉽게 오빠의 마음을 독점해버린 유리 씨가 미웠어.”
지은이답지 않게 그녀는 말끝을 축축하게 적시기까지 했다.
“지은아.”
부르긴 했지만 정작 할 말은 고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녀의 사랑을 아니, 진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스스로가 민망해졌다. 그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랑은 지은이뿐이 아니었다. 진옥이도 그랬다. 결코 지은이가 그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초라하고 추접스럽고 더러워서 사랑을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준호는 지은이가 여자로서보다는 동생으로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유리 씨와 사랑의 전쟁을 선포하고 싶었어. 여자 대 여자로서 사랑의 도전장을 던지고 싶었어. 패배자는 날 거라는 예감이 들면서도. 그러나 난 오빠의 행복을 위해 그녀와의 경쟁을 포기했던 거야. 오빠를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한텐 행복이잖아.”
“고마워.”
“고마울 게 뭔데. 그리고 나한텐 지금은 명철 씨가 있잖아. 난 명철 씰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명철 씨도 날 사랑하고. 이거면 충분한 거잖아. 이만하면 나도 행복한 여자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빠에 대한 지은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지은에겐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현명함까지 있었다. 그녀는 사랑을 알면서부터 한 층 더 성숙된 것 같았다. 인간의 진정한 성숙은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차를 주차시키고 집으로 들어갔다.
메마른 초가을 바람에도 끄떡없이 정원수들은 푸르싱싱하기만 했다. 그 나무들은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 침엽수였다. 목련나뭇잎이나 철쭉 잎도 아직은 여름철에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녹음이 짙었다.
집에는 가정부 한 사람 뿐이었다.
거실에 들어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방에서 한종수에게 축객 당하던 일이 새삼스럽게 기억의 수면위에 떠올랐다. 덕구의 손자라는 말을 듣자 노인은 금시 노발대발했었다. 자신의 구술을 그대로 책에 옮기면 6.25전쟁담을 들려주시겠다고 한걸음 양보는 했지만 (물론 유리가 설득한 덕분이었다.) 준호 입장에서는 집필 원칙과 어긋나는 타협은 허용할 수 없었기에 다시 한 번 노인의 축객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노인은 당신의 신념만은 지킬 수 있어도 손녀는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손녀가 할아버지를 속이고 당신이 그토록 제공을 거부하던 친필초고를 몰래 넘겨주려고 댁으로 데리고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다. 한종수는 사랑이 신념을 이기고 혈육을 능가한다는 이치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이데올로기에 눈이 먼 한종수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제 방으로 올라가요.”
그녀의 침실은 2층에 있었다. 20여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격리되었던, 아가씨의 은밀한 공간이 공개되는 순간이라 유리도 가슴이 떨리는 모양인지 얼굴에 분홍빛 홍조가 피어올랐다.
준호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부모님과 할아버지 외에는 어떤 남자도 들어가 보지 못했을 유리 씨만의 공간, 그녀의 체취가 흠뻑 배어있을 공간에 첫 연인으로 초대된다는 흥분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제 그녀는 사랑하는 준호를 누구에게도 열지 않았던 은밀한 규방에까지 안내하며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성스럽고 숙연한 기분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방문이 열렸다. 방안에는 그윽하고 달콤한 향기와 은은하고 싱그러운 체취가 싱싱하게 감돌았다. 꽃무늬 벽지는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반사되며 눈부시게 화사하다. 역시 눈 같이 하얀 시트를 편 정교한 디자인의 침대며 윤기 도는 노란색 목조 화장대와 테이블, 인형들과 벽에 걸린 산수화 그림들…… 모두가 운치 있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가에는 두툼한 전문서적들이 빼곡히 꽂혀있고 그 밑에는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그 어느 물건에도 유리의 숨결과 손길이 묻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새롭고 의미 있고 아름다워 보였다.
“할아버지께서 친필원고예요.”
유리는 테이블 서랍 안에서 두툼한 원고지를 꺼내어 준호에게 보여주었다. 볼펜으로 쓴 것이었는데 흘림체인데다 글자체가 팥알만큼씩 큼직큼직해서 부피는 두꺼워도 분량은 얼마 될 것 같지 않았다.
“원고지 300~400매 분량이에요. 이대로는 글씨를 알아보기가 힘드니까 준호 씨하고 교대로 타자하면 오늘 하루면 가능할 거예요.”
“그럼 시작합시다. 할아버지께서 오시기 전에.”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작업을 분담했다. 준호는 원고를 읽고 유리는 타자했다. 일단 작업을 시작하자 어색한 분위기는 금시 사라졌다.
유리의 워드 다루는 솜씨는 거의 자동적이었고 손가락과 워드가 동체라도 된 듯 신비하게 움직였다. 내용을 불러주던 준호는 가끔 그 황홀한 손놀림에 넋을 빼앗긴 채 멍하니 바라보다간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군 했다.
사실 그 육필원고를 정리하여 파일을 준호의 수중에 넘겨준다는 건 유리한테는 할아버지에 대한 배신과 불경을 동시에 저지르는, 범죄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엄두도 낼 수 없는 용단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그 결단만큼 그녀에게 고마웠다.
준호는 초고를 보고서야 비로소 죽었다던 한종수가 다시 부활하게 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유리가 당초에 그 사연을 차마 입 밖에 발설하지 못했던 이유도 이해되었다. 한종수는 귀신이 아니라 분명 사람이었다.
그런데 준호는 초고 내용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구절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담을 들려주면서 늘 자신을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피를 흘려 싸운 영웅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조국이 부르면, 혁명이 수요하면, 언제 어디서라도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혁명가로 자처했다. 반대로 한종수는 악질경찰이며 친일주구이며 지주아들인 반동분자로서 저주와 매도의 대상이었다. 격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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