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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11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25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오빠. 그 아가씨가 오셨어. 사진 땜에.”
 민경의 목소리가 좁은 지하실통로를 타고 굴러 내려온다.
 그 아가씨라라니?!
 정도는 흠칫 놀라 작업을 멈추고 컴컴한 지하실 철문 쪽을 올려다보았다. 돋보기를 든 손이 저도 모르게 약간 떨렸다.
 “은파랑 씨 오셨어.”
 은파랑 씨!
 정도는 그만 돋보기를 테이블위에 털렁 떨어트렸다. 자신이 왜 이렇게 허둥지둥 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너무 민감한 반응이 아닌가.
 “올라간다. 금방 올라갈게.”
 그는 급히 손에 낀 흰 장갑을 벗고 옷매무시를 바로잡은 후 암실에서 나왔다.
 모직 원단의 커피색 투피스정장차림의 한 아가씨가 카운터를 가운데하고 미경이와 마주 서있었다. 미경이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몸매나 용모가 뛰어났지만 미모가 출중한 아가씨의 앞에서는 후줄근하고 초췌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문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도는 아가씨가 파랑임을 확인했다. 화장조차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지만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는 그녀의 용모를 조금도 손색이 가지 않도록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흘러내린 한두 가닥의 머리카락은 아가씨의 담담한 표정에 깊이와 무게를 더한다. 미소가 없어도 단조롭지 않고 교태가 없어도 여성미가 넘치는 그 절제되고 가다듬어지고 분명한 이목구비의 절묘한 조화는 비너스의 조각상을 무색케 했다.
 “오셨습니까. 제가 그동안 집에 사연이 좀 있어서 작업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사진을 확대하여 액자에 넣어드리겠습니다. 내일이면……”
 “늦어도 상관없어요.”
 짧지만 모든 의미가 충분히 담겨있는 대답이다. 무표정한 것 같지만 여성의 모든 아름다운 표정을 죄다 담고 있는 그녀의 얼굴과 흡사하다.
 파랑의 앞에는 또 네 개의 필름이 놓여있다.
 “실례지만 풍경사진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죠?”
 “네? 네.”
 의문과 수긍. 대답 또한 그녀처럼 신비하다. 도대체 긍정인가 부정인가.
 “저도 풍경사진을 좋아합니다.”
 출간된 화집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제 자랑이나 하는, 그것을 밑천으로 여자들을 유혹이나 하는 시시한 사람으로 비쳐질까봐 단념했다.
 “혹시 사용하시는 카메라가 어떤 기종인지요?”
 “캐논뭐라라든지? 잘 모르겠어요.”
 “성능이 우수한 카메라네요. 그런데 그런 카메라는 프로들에게는 적합하지만……모르긴 하겠으나 촬영에는 초보자이신 것 같은데.”
 “네.”
 “캐논수동카메라는 조작기능이 복잡해서 아마추어들에게는 좀 부담스러운 기종일겁니다. 카메라촬영기술에 대한 사전상식이나 공부가 필요하지요.”
 “예술사진을 찍을 것도 아닌데요 뭐. 그럼 수고 부탁드려요.”
 은파랑은 고개를 숙여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나가려고 했다.
 “아가씨. 잠시 만요.”
 정도는 서둘러 서랍 안에서 자신이 보던 풍경사진촬영 기술서적 한권을 꺼내어 아가씨에게 건넸다.
 “혹시 도움이 되실는지. 제가 이전에 보던 책입니다. 예술사진은 아니더라도 기술을 장악하면 좀 더 보기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인사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예의에 그친 것이었다.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다.
 파랑이 사진관에서 나가자 실내는 갑자기 어둠 속에 잠긴 분위기다. 찬란하게 떠오르던 태양이 비구름에 가려진 기분이다. 사람에게는 분명 빛이 있다는 걸 그녀를 보면서 느꼈다.
 2백장에 박두하는 엄청난 숫자의 네거티브 중에서 건져낸 사진은 겨우 네 컷뿐이었다. 이번의 네 컷과 전번의 두 컷까지 합쳐 여섯 컷은 교정 작업을 거친 후 확대하여 액자에 넣었다. 물론 나머지 사진들도 모두 정상적인 인화를 했다. 그것이 은파랑에 대한 각별한 예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 같았으면 그것들은 모두 폐기처분했을 것이다.
 역광 속에서 하늘을 비상하는 독수리는, 비록 구도가 기울기는 했지만 하이라이트부분과 그림자부분이 분리되어 입체감이 강조되었고 해변의 파도는 우연히 모노톤처리가 되어 카메라가 흔들려 좌측으로 피사체가 쏘아지는듯했지만 거대한 파워와 장엄함이 돋보였다. 하지만 하늘의 구름은 여전히 콘트라스트가 심해 무슨 괴물이나 도깨비 상을 하고 있다. 보문사로 향하는 가랑비 내리는 산길은 , 물론 우연이겠지만 흐린 날의 부드러운 광선작용으로 디테일묘사가 완벽했고 안정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초점이 맞지 않아 아쉽게도 앞 흐림 현상이 나타났는데 일주문은 지옥의 문처럼 기괴하게 구부러들었다.
 한마디로 그녀의 사진은 실패였지만 그 때문에 도리어 신비의 세계 그 자체였다. 자연은 그녀의 카메라에 포착되는 순간 아름다움이 아니라 기괴함으로 둔갑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카메라렌즈조화에 따라 자연의 모습이 변할 수 있듯이 인간의 시각도 하나의 렌즈에 불과하다고 할 때 똑 같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그녀의 사진에는 또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보다는 공포를 느끼게 하는 독기와 광기가 도사리고 있다. 파랑색처럼 냉담하고 차갑고 침중한 이미지가……
 모든 작업이 끝나고 암실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미경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이다. 밀린 작업 때문에 퇴근이 늦어진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던 미경의 표정이 기억의 스크린에 재생된다.
 집으로 곧장 들어갔을까? 아니면 또 그 중국집배달 진남이한테로 갔을까? 혹시 미경의 그 밝은 표정이 어떤 쾌락의 만족에서 오는……
 우리 미경이가 그럴 리가 없어. 여자니까 아직 젊으니까 욕망도 있고 불륜도 넘볼 수 있을 테지만 사고까지 저지를 인격자는 아니야. 저 유명한 청백리, 정직한 도덕적 삶을 살아온, 참된 인생의 대명사인 아버지 윤도율의 딸이 아닌가. 8년간의 부장판사생활에서 한번도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지 않게 살아오신 분이 아버지 윤도율이다. 10년 가까운 변호사생활에서도 직분에만 충직했던 아버지이다. 어떤 경우에도 피는 속일 수 없다. 아버지의 정직함과 청백함과 도덕적 삶의 참됨은 피를 통해서도 , 당신의 솔선수범을 통해서도 가정의 맥을 바르게 하고 흐름을 정제하는, 그대로가 신성한 법이나 다름없었다. 정도가 정직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것도 아버지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컸다. 아내의 외할아버지의 영향도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장가든 뒤의 일이었다. 
 
 윤정은 자지 않고 있었다. 정원의 벤치에 앉아 망부석처럼 까딱 않고 먼 산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은행낙엽이 밤바람에 펄펄 날리는 나무아래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윤정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날씨가 쌀쌀한데 왜 밖에 나와 앉아 있어?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
 벌써 연 며칠이나 식사를 거른 윤정의 얼굴은 기름기가 증발하고 뿌옇게 먼지가 껴있다. 전혀 낯선 사람처럼 보인다. 넋은 빠져나가고 육신만 남은 시체 그 자체이다. 이러다가 정말……
 “미미아빠.”
 낮으나 분명하게 들려오는 윤정의 육성에 정도는 처음 한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착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가 말을 하다니?!
 “자기 금방 날 불렀어?”
 “나 절에 갈래요.”
 “뭐라고?”
 정도는 너무도 예상 밖의 말에 다시 한번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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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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