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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04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24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출근이 싫어진다.
 길 건너편의 그 화려한 『동양사진관』의 요란한 기염에 주눅이 들어서 뿐만은 아니었다. 윤정에게서 전염된 것인지 정도도 덩달아 살아 움직이는 모든 일상의 의미가 퇴색하기 시작했다.
 윤정의 외할아버지의 경우처럼 사진관경영이 살아남기 위해서 그 정당성이나 가치와는 상관없이 선택한 생계수단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의며 신념이며 정당성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닌지. 그저 교묘한 구실이고 명분을 만들기 위한 현혹목적의 장치이고 남의 침해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고 상대방을 견제하는 방어선이고. 윤정이 정말 인생의 이 미묘한 그러나 너무나 서투른 비밀을 죄다 알아냈다면 그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오로지 하나 죽음, 삶은 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작업일 뿐이라는 인생철리를 깨달은 윤정은 인제는 쉽게 인생의 화려한 유혹에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중충한 플라타너스가로수의 단풍잎은 붉다 못해 자줏빛을 띠고 있다. 보도와 차도에 두텁게 깔린 채 흐늘흐늘 느슨한 불길을 피워 올린다. 그 속에 드문드문 뿌려진 노란 은행잎은 화톳불에 구워진 토실토실한 감자 같다. 은행잎은 노랗다 못해 눈부시기까지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행인의 시선까지 노란 물을 들인다. 은행잎이 아무리 요염해고 뇌쇄적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윤정의 눈에는 무의미한 현혹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은행잎에 심취할 아무런 까닭도 없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은행잎일 따름이다. 게다가 그 은행잎들은 하나 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다. 윤정의 외할아버지처럼. 더구나 가슴 아픈 것은 죽음은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이 확인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확인하는 삶, 죽는다는 것을 알고서 살아가는 삶!
 그런데 붉은 색과 노란색은 색상계통에서 더운 이미지인데도 가을의 싸늘한 한기를 막지는 못한다. 어쩌면 이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은 파랑이 아닐까?
 은파랑!
 윤정의 변한 모습이 단순하고 녹 쓸었던 정도의 사유에 기름을 붓고 가동을 걸었다면 느닷없이 기억 속에 떠오른 미모의 아가씨의 모습은 정도를 시들하게 만들던 권태를 축출하며 유혹한다.
 오늘따라 미경이 벌써 출근해있었다. 전에 없이 진열창과 출입문유리도 투명하게 닦여있고 마당의 낙엽도 깨끗이 쓸려있다.
 갑자기 웬일이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마음을 돌렸나보지. 진작 그럴 것이지. 계집애가 마음은 여려가지고. 
 사진관에 들어서는 순간 정도는 그동안 잊었던 파랑의 사진이 생각났다. 오늘은 그녀의 사진을 인화하여 반환해야 한다. 벌써 약속시간을 4일이나 밀렸다. 고목사진과 청석사진은 크게 확대하여 액자 속에 넣어주어야겠다.
 저도 모르게 맥이 빠졌던 육신에 기운이 들어오며 활기를 되찾았다. 산다는 건 바로 일을 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일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어떤 아가씨가 필름을 이렇게 많이 맡겼어.”
 언제나 침울하고 수심에 잠겨있던 미경의 얼굴이 보름달이라도 돋은 듯 활짝 밝아있다. 과부들에게만 특유한, 불만이 가득 찬 그래서 험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늘은 말끔히 걷히고 첫사랑에 빠져든 소녀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명랑한 표정이 4월의 햇빛처럼 넘실거린다.
 무슨 일이 있었지?
 “어떤 아가씬데. 혹시 은파랑이라는 아가씨가 아니던?”
 “맞아. 오빠 그 아가씰 알아? 얼짱이던데. 그런데 무슨 이름이 그러냐. 파랑이? 노랑은 아니고. 웃겨.”
 대답대신 접수기록을 당겨보니 분명 은파랑이라는 이름 석자가 적혀있다. 글자들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며 금방 파랑의 예쁜 얼굴윤곽을 그려낸다. 이름마저도 그대로 파란 냇물이 되어 돌돌돌 흘러 내려갈 것 같다.
 “사진 달라고 안 하던?”
 “아니. 아무 말 없이 필름만 남겨두고 갔어.”
 “알았어. 모두 이리 줘.”
 정도는 그동안 쌓인 필름들을 한 아름 걷어 안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 문을 열다말고 고개를 돌려 한마디 물었다.
 “너 혹시 무슨 일 있었냐?”
 “오빠는, 무슨 일은.”
 수태를 머금으며 얼굴에 홍조까지 띤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듯 정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지하실계단을 내려갔다.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네가 찍어줘. 날 부르지 말고.”
 정도는 암실에 내려오자 서둘러 작업준비를 하고 은파랑의 필름부터 현상하기 시작했다. 작업에 몰두하자 그는 아내와의 불쾌했던 일이며 방금 전의 지루한 사유에서 금방 해탈할 수 있었다. 그의 손은 반복되는 숙련된 동작들을 로봇처럼 유창하게 이어나갔다.
 밀착인화를 끝내자 사진의 모습이 현상되었다.
 정도는 확대경을 들고 사진들을 일일이 관찰했다. 역시 첫 번째의 사진들과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첫 번째 사진에서 보았던 도선사나 청진사가 아닌 보문사, 마니산들이 나타났다는 사실뿐이다. 그녀의 행적이 서울근교의 산악지대에서 강화도로 옮겨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은파랑은 그냥 자연이 좋아서 유람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어떤 목적에서?!……
 또다시 그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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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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