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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04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77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어느새 준범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아났다. 사지가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띤따 딴따 따라라란따-
 전화벨이 울리자 준범은 다급히 귀전에 가져갔다.
 “너 지금 무슨 짓거릴 하는 거냐. 허튼수작 다 집어치고 나랑 직접 마나서 결판을 내자.”
 “서두를 것 없잖아요. 준범 씨를 위해서도요. 신경 쓰지 마시고 일단 배부르게 식사하고 얼근하게 마셔요. 그 식사가 최후의 만찬일지도 모르니까요.”
 “야. 이년! 너 정말!”
 버럭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떨려서 더 이상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다. 그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허망지망 빠져나왔다. 다리까지 저려와 절름거리면서.
 황혼이 어슬어슬해지자 10월의 저녁 바람은 제법 싸늘하다. 초가을바람이 밋밋한 고갯길에 와스스 뒹굴어가며 철 이르게 떨어진 한두 장의 은행낙엽을 꽁무니에 달고 성급하게 사라진다.
 “도대체 어쩌자는거야? 날 데리고 놀자는거냐.”
 “식사가 끝났으면 이제는 식당 뒷골목으로 나오세요.”
 오늘 따라 꼬박꼬박 경어를 쓰는 것도 화가 난다.
 “야. 전화 끊지 마……”
 그러나 통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다시 걸었지만 안내아가씨의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고객님께서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전화번호입니다.”
 공중전화인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한다. 그러나 네가 숨어 보았자 언제까지겠어, 하는 오기가 불뚝 치민다. 오늘은 끝까지 그녀와 숨바꼭질을 할 작정이다.
 낯익은 골목이었다. 골목에는 벌써 흐릿한 어둠이 조수처럼 흘러들며 그들먹이 차오르고 있었다. 분위기가 음산하고 무시무시하고 축축하고 썰렁하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거기가 어딘지 아세요?”
 “여기가 어딘데? 왜 날 이런 으스스한 곳으로 오라고 한거야?”
 “언니가 죽은 곳이에요. 천막 치고 살다가 짐승 같은 놈들에게 윤간 당하고 핏덩이를 낙태하고 죽은 곳이라고요.”
 그제야 기억을 가렸던 안개가 걷히며 과거가 생생하게 머릿속에 재현되었다.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진다. 무시로 어둠이 도사린 골목 구석을 흘끔거렸다. 거기 어딘가에 미혜의 죽은 혼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벽 한번 쳐다보고 인젠 골목을 나오세요. 또 가보실 곳이 있거든요. 골목을 나서시면 택시가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택시기사가 알아서 내려줄 거예요. 그럼 이따 봐요.”
 “끊지 마. 비겁하게 숨어 다니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 봐. 어디야? 골목 어디쯤인데. 네가 무서워서 나서지 못하겠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러나 전화기에서는 붕-붕-하는 통화중단음이 울린 지 오래다.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할 거야!”
 무심결에 아니, 미라의 암시가 그의 눈길을 벽 뒤로 향하게 했다. 페인트칠을 한 콘크리트벽면에는 크게 확대한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임신한 배가 남산만큼 확대된 미혜의 사진이다.
 “지독한 년!”
 준범은 사진을 벽에서 와락 뜯어냈다. 갈기갈기 찢어서는 골목 바닥에 내던졌다. 구둣발로 정신없이 짓밟아댔다. 어찌된 영문인지 임신한 배가 뒤집어지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본다. 준범은 금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등 곬에 식은땀이 쫙 내뱄다.
 당금이라도 흉악한 괴물이 으슥한 어둠 속에서 달려 나와 그의 목을 조일 것만 같아 허둥지둥 골목을 빠져나왔다. 숨이 턱에 닿아 거리에 나서니 유령처럼 콜택시 한 대가 도로변에서 기다리고 있다.
 “타세요. 모셔다 드릴테니.”
 거절할 맥도 경황도 없었다. 아무 데고 골목이 아닌 곳에만 있을 수 있으면 그만일 것 같았다. 택시 뒷좌석에 승차하여 털썩 엉덩이를 부렸다. 그런데 뭔가가 엉덩이에 짓뭉개지며 부스럭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들린다.
 엉덩이를 들고 보니 또 사진이다. 미혜가 임신한 몸으로 골목길에서 울상이 되어 서있다. 왜 나를 버렸어요? 나를 죽였어요? 하고 그를 원망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택시기사가 볼까 봐 얼른 사진을 집어 저고리 안주머니에 마구 구겨 넣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슴이 불에 단근질이라도 당하듯 뜨끔뜨끔해진다.
 택시는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달렸다. 날은 어느새 어두워졌는데 미친듯한 질주를 멈출 줄을 모르고 어딘가로 내처 달리기만 한다. 끝내는 인가도 없는 산길의 비포장도로에까지 진입했다.
 준범은 밖의 어둠과 깊은 계곡과 괴물 같은 산악들을 보자 그만 겁이 더럭 나기 시작했다. 그까짓 여자 하나쯤이야 죽기 아니면 살기지 하는 생각에서 여태껏 두려움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지만 미혜의 사진을 본 다음부터는 그의 오기가 사그라졌다. 알 수 없는 공포감과 두려움이 온 마음을 휩싼다.
 “기사님.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다 왔습니다.”
 “여기가 어딘데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 와 보는 곳입니다. 저야 뭐 전화로 알려주는 대로 운전을 했을 뿐입니다.”
 “그 전화 저한테 좀 바꿔주십시오. 아가씨죠?”
 택시기사는 귀에 걸었던 이어폰을 말없이 그에게 넘겨준다. 그러나 어느새 이어폰통화는 끊어졌고 수화기에서는 찌르륵거리는 잡음만 들릴 뿐이다.
 “다 왔습니다. 여기라고 한 것 같은데……맞습니다. 저기 산비탈에 봉분 하나가 보이네요. 무덤 아랫길에서 세우라고 하셨거든요. 숫구멍에 머리털이 돋아서는 이렇게 험한 길을 주행해 보기는 처음입니다. 차가 다 각이 물러나는 줄 알았다니까요.”
 “무덤이라니요?”
 준범이도 밖을 내다보았다. 저만큼 산중턱의 숲 가운데 자그마한 봉분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초불을 밝힌 모양 어둠 속에 묻혔는데도 확인이 가능했다.
 “그냥 차를 돌려요. 내가 왜 이런 데로 옵니까. 사람 사는 동네도 아니잖아요. 미쳤다고……”
 “저야 압니까. 요금을 선불하고 손님을 이곳으로 모시라고 하니까 모셨을 뿐이지요.”
 차를 돌리라고 독촉하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도착하셨죠? 산중턱의 봉분이 보이시죠?”
 “하필 왜 이런데서 마나자는 거야?”
 “무서우세요? 지은 죄가 있으니까 두려우신 모양이죠.”
 “무섭긴 누가 무서워 해.”
 “그럼 그냥 올라오세요. 차에서 내려 5분이면 되거든요. 설령 여기서 도망친다고 피면할 일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사내답게 당당하게 올라오세요.”
 “그래 좋아 올라가지. 기다려.”
 오기 하나로 택시에서 덜컥 내렸다. 택시가 차머리를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불안한 마음이 갈마들었으나 용기를 내었다. 아직 만나지도 못했는데 미리 무너지면 안 된다고 자신을 추슬렀다. 엄마인 척 하며 반말을 턱턱 던지던 그녀가 오늘 따라 끝까지 꼬박꼬박 경어를 쓰는 것도 적이 신격이 쓰인다. 제 딴에는 자심만만하다 이거겠지. 
 숲 속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작은 산짐승들이 부스럭거린다. 그럴 때마다 준범은 깜짝깜짝 놀라며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그런데 봉분위에는 정작 미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인젠 그만 나와. 나와서 결판을 내잔 말이야.”
 정도는 주변의 숲을 향해 마구 소리 질렀다. 적막과 어둠 속에서 그의 외침소리는 귀신의 울음소리처럼 무시무시한 메아리로 뒹굴었다.
 띤따 딴따 따라라란따 띤따-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는 머리카락을 쭈뼛하도록 거창한 공포를 거느리고 있다. 전화벨소리에도 혼비백산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준범은 다리맥이 탁 풀렸음을 느꼈다. 불길한 징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 이 게임에서 패자는 자신일거라는 예감이 그를 바닥 없는 불안의 심연에로 떠밀었다.
 “야. 너 빨리 나오지 못해!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걸 너도 알 테지.”
 “석준범 씨. 자중하세요. 당신은 지금 은미혜의 무덤 앞에 서있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뭐라고? 은미혜의 무덤이라고!”
 준범은 다시 한번 미지의 공포감에 전율했다. 오늘 온종일 은미혜의 유령은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닌다.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 대로 공손히 따라하세요. 앞으로 걸어가세요. 무덤 앞 상석에는 제사상이 차례져 있을 것이고 언니의 영정도 모셔져 있을 거예요.”
 준범은 갑자기 귀신에게라도 홀린 듯, 최면에라도 걸린 듯 미라가 시키는 대로 무덤을 향해 주춤주춤 다가갔다. 그녀의 말대로 무덤 앞의 대리석 상돌에는 젯상이 차례져 있었다. 과일, 육포, 떡, 쌀……
 촛불 한 대가 가을바람에 불 잎을 가물거리며 간신히 상석을 비추고 있다.
 무덤 옆 대리석 비석에는 「고은미혜지묘」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그 비문을 보는 순간 준범은 저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다리맥이 실타래 풀리듯이 술술 풀려 나갔다. 그냥 무덤 앞에 풀썩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이 삭신이 나른해 진다.
 “휴대폰은 상석위에 내려놓으세요. 그래도 잘 들리실 거예요.”
 휴대폰을 상돌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말처럼 소리가 잘 들린다.
 “상석 왼손 편에 술병이 보이시죠? 술병을 들고 잔에 따르세요.”
 시키는 대로 미리 준비된 소주를 따랐다. 영문 없이 눈앞에 뽀얀 안개가 피어 오른다.
 “술잔 밑을 보세요. 쪽지가 있을 거예요.”
 쪽지를 꺼내어 초불 가까이에 비춰 보았다.

 사랑하는 준범 씨.
 끝내 제 곁으로 오셨군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저한테 술 한 잔만 따라주실래요. 그게 살아서 저의 소원이었고 죽어서도 제 소원이에요.
 준범 씨를 사랑했어요. 너무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어서도 이렇게 사랑해요. 기다렸어요. 이 날이 오기만을.
 준범 씨가 따라주는 술 한 잔에 취해 보고 싶었고 한 자리에 나란히 누워 보고 싶었어요.
 준범 씨.
 사랑해요! 미혜를 춥고 을씨년스러운 이 무덤 속에 홀로 버려 두시지 않으실 거죠?
 준범 씰 믿어요.
 준범 씨도 절 사랑하셨고 또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걸 전 다 알고 있어요. 저의 25년이라는 짧았던 이승에서의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이었어요.……

 “미혜 씨!”
 준범은 화산처럼 북받치는 참회의 감정을 억제 못하고 끝내 오열을 왈칵 쏟아내고야 말았다.
 “준범 씨. 인젠 언니 앞에서 아니,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시는 거죠?”
 “그래. 내가 죄를 졌어. 내가 미혜를 죽였어. 난 죽어도 당연한 놈이야.”
 준범은 땅을 치며 꺼억-꺼억- 울었다. 자신의 한번 실수가 한 여자의 가슴에 이토록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를 남기고 결국은 죽음으로까지 내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후회막급이었다.
 “언니한테 사과하고 절을 하세요. 한 번, 두 번, 세 번……”
 준범은 흑흑 흐느끼며 잔디위에 엎드렸다 일어났다 하는 동작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잔의 술을 언니의 무덤위에 붓고 또 따르세요.”
 인제는 로봇처럼 대꾸 한마디 없이 그녀의 원격조종에 고분고분 순종했다. 맑은 술이 잔디가 다보록한 봉분위에 떨어지며 이슬로 맺히기도 하고 흙 속에 자취 없이 스며들기도 한다. 저렇게 스며드는 술 방울을 무덤속의 미혜가 달게 받아 마실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
 “인제는 무릎 꿇고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세요. 준범 씨. 언니한테 죄 지은걸 인정하시죠?”
 “그래. 내가 죄를 지었어.”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하셔야죠?”
 “벌을 받아야지.”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는 어떤 벌을 받아야죠?”
 “죽……죽여야겠지.”
 “그러니까 준범 씬 죽을 때가 되었다는 그거죠.”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죽을 때가 되었어. 죽어 마땅해.”
 “억울한 거 없으시죠?”
 “억울할 것 없어. 하물며 난 살고 싶지도 않아.”
 “그러시면 됐어요. 당신께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술 마실 기회를 드릴게요. 저승에 가서는 언니와 늘 술을 대작하실 테니까요. 안주도 앞에 있고 술도 있을 거예요. 언니가 상돌 뒤에 술을 네 병이나 준비해 두었어요. 그러니 마음껏 드세요.”
 준범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모든 판단기능과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 오로지 유령 같은 존재인 휴대폰 속 목소리의 지령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였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시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마시고 가끔씩 너털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래 당신은 내가 죽는 순간까지도 나타나지 않을 거야?”
 “이건 언니와 준범 씨 두 사람의 일이에요. 제가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마지막이니까 형부라고 부를게요.”               
 “형부? 흐흐흐……그래 나랑 미혜랑의 일이지. 넌 끼어들 자리가 없어.”
 술병이 하나 둘 바닥이 비워졌다. 그에 따라 준범의 정신도 알코올에 푹 절어 녹초가 되기 시작했다.
 “죽는 게 뭐가 그리 두려워. 난 두렵지 않아. 미혜도 죽었잖아.”
 “맞아요. 잘 생각하셨어요. 더구나 형부는 죽어야 언니를 만날 수 있잖아요. 언니를 만나야 사랑을 속삭일 수 있고요. 죽음이야말로 형부에게는 행복을 향해 가는 길이잖아요.”
 “그래그래. 죽는 게 그리 좋다니 난 서둘러야겠다. 그런데 그곳엔 어떻게 가냐? 버스도 택시도 기차도 비행기도 없잖아.”
 “봉분 뒤에 삽이 있을 거예요. 찾으셨죠? 형부. 그럼 그 삽으로 언니의 봉분 옆 공지에 구덩이를 파세요. 깊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누울 자리만 파요. 편히 누워서 죽는 게 나쁘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그래 맞아. 편안하게 누워서 죽어야지. 가정이 다 파산되고 회사에서 해고 당하고 무의미하게 고통 속에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차라리 나을 거야.”
 “지금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건가요?”
 “아니, 아니야. 절대 그런 뜻은 아니라고. 누굴 원망하겠어. 다 자업자득이지. 내가 쌓은 업보지. 업장에 대한 당연한 징벌이라고.”
 숨이 찼다. 땀이 철철 흘렀다. 눈조차 뜰 수 없고 입 안이 찝찔하다. 그러나 준범은 쉬지 않고 열심히 구덩이를 팠다. 삽날에 돌멩이가 부딪치며 불꽃이 번쩍번쩍 튕겼다. 도리어 죽음에 대한 그의 갈망을 더욱 자극했다. 죽는다는 일이 이렇게 성수날 줄은 정말 몰랐다. 심지어 흥분까지 된다. 영원한 자유와 평안의 공간인 죽음. 부푼 기대감까지 그들먹이 고여 오른다.
 “이만하면 되겠지. 허리까지 오면 안 돼?”
 “됐어요. 아주 훌륭해요. 형부는 마치도 죽음을 고대했던 사람 같아요. 너무 완벽해요. 인젠 구덩이에서 나와 상돌위에 준비된 볼펜을 잡고 유서를 쓰세요. 제가 부르는 대로. 난 사랑하는 미혜 씨를 죽인 살인범이다. 난 참회한다. 나의 즉음으로 미혜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한다. 미혜 씨. 가다려. 잠시 뒤면 미혜 씨곁으로 갈 테니. 다 쓰셨죠? 그 밑에 형부의 이름을 적으세요. 석준범. 이렇게요. 그리고 날짜까지 밝히고요.”
 “시키는 대로 다 했어. 인젠 어떻게 해야지?”
 “상석 밑에 보면 자그마한 약병이 있을 거예요. 손을 더 깊숙이 넣어 보세요. 꺼내셨죠? 그 약병에 술을 부으세요. 약병이 가득 차게 채우셨죠? 그럼 이번엔 약병을 손에 들고 힘차게 아래 위로 흔드세요. 독극물이 술에 골고루 용해돼야 하거든요. 약이 밑에 가라앉고 술만 위에 뜨면 실패해요. 언니한테 못가요. 그러니 열심히 흔드세요. 더, 더 세게요. 아직도 열 번은 더요. 그렇게 흔들면서 구덩이로 걸어가세요. 다 오셨죠? 천천히 한 발을 구덩이 아래로 내리시고……천천히요. 자칫하면 구덩이 속에 굴러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까요. 천천히. 제 말이 들리시죠? 멀어도 잘 들리신다고요. 구덩이 안에 내려오셨죠? 그대로 편히 땅바닥에 누우세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어때요? 편안하시죠? 자. 인젠 언니한테로 떠나는 거예요. 약병뚜껑을 열고 약을 마시세요. 쓰더라도 술이거니 하고 마시면 괜찮을 거예요.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말끔히 마셔야 돼요. 깔끔하게 다 마셨죠? 어때요? 아무렇지도 않으시죠? 하늘을 쳐다보면 총총한 뭇별들이 아름다울 거예요. 거기 은하수에는 언니가 계세요. 언니가 지금 형부를 부르고 있잖아요. 어서 언니한테로 가세요. 하늘을 훨훨 날아서……그럼 잘 가요……”
 준범은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미라가 시키는 대로, 유도하는 대로 모든 동작들을 고분고분 따라 했다. 미라의 말대로 준범은 자신의 몸뚱이가 하늘공중에 둥둥 떠오름을 느꼈다.
 하늘에는 뭇별이 총총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미혜 씨. 내가 왔어. 오래 기다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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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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