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미술의 도입과 전개 (1900~1945)     
 
 
part - 1

Ⅰ. 근대적 시점과 시대상
Ⅱ. 서양 미술의 도입과 한국화의 과정
Ⅲ. 한국 미술에 대한 인식과 평가

part - 2

Ⅰ. 근대 작가와 작품
1. 동경 미술학교 출신 서양화가
2. 서구로 유학한 작가
3. 한국화가
Ⅱ. 협회의 전개
Ⅲ. 조선미술전람회

 

머리글

1900년대로부터 시작되는 우리 근대 미술은 전통적 양식과 서구에서 이식된 서양의 양식으로 이분된다. 천수백년에 걸친 전통적 양식은 모필에 수묵과 채색의 매재에 의해 가꾸어진 그림으로 오랜 동양의 사상 체계와 한국인의 삶의 정서를 닮고 있는 영역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급변하는 시대적 조류에 영향을 받아 전통적 가치관에 다양한 새로운 형식적 수용을 단행 했으며 고유한 미의식을 지니면서 보편적 시대 감각을 적절히 소화하는데 주력하였다. 관념적인 산수와 화조의 범주에서 벗어나 현실에 입각한 리얼리즘의 정신을 구현한 사경적 산수와 서양의 구도법을 원용한 정물의 출현은 이 같은 시대적 변화에 대응된 것이다.
1910년대 주로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양화는 인상주의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의 형식에서 출발하였다. 초기의 기술적 습득 과정을 거쳐 고유한 정감을 구현하는 개성주의가 활발히 전개되면서 외래적인 양식의 토착화가 현저하게 이루어졌다. 30년대를 통한 향토적 정서의 주제화와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대담한 형식적 실험을 추진하는 다양한 경향이 공존하면서 현대로 이르는 풍요로운 발판을 마련하였다.
근대기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에 잇닿은 정신의 항상성을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데 참다운 의미가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미술의 한국적 정체성을 찾는데 있어 근대 미술의 전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나는 미술의 역사에 대한 평면적 서술을 지양하고 한국 근대미술의 형성에 사회․역사적 토대가 되었던 조건이 무엇이었던가를 검토하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 나타난 작가와 작품, 협회와 전시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part - 1

Ⅰ. 근대적 시점과 시대상

우리 나라 근․현대미술의 형성과 전개에 대해 논의함에 있어서 근대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나아가 근대의 기점을 언제로부터 설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예민한 쟁점 중의 하나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근대가 과연 자생적인 것이었던가, 아니면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었던가 하는 문제도 규명해야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이미 역사학계에서도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근대의 기점에 대해 멀리는 봉건적 질서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드높았던 실학사상이 태동하고 영․정조와 같은 계몽군주들에 의한 개혁이 추진된 결과 문예부흥을 이룩하였던 18세기로부터 잡자는 의견, 서세동점의 외세에 대항하여 내부개혁을 실천하고자 했던 갑오경장을 전후한 시기, 또는 일제시대 비록 식민지배 체제 아래 놓여있었던 까닭에 한계를 불식시킬 수 없었다하더라도 미약한 수준으로나마 민족자본이 형성되고 근대적 산업의 토대를 갖추기 시작하였다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 혹은 일제시대에는 어차피 외세에 종속된 것이었으므로 해방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설 등을 들 수 있다.
미술의 경우 지금까지 대체로 일본을 통해 서양미술의 기법을 배웠던 1910년경을 근대미술의 출발점으로 상정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용인되는 실정이었다. 말하자면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이 일본으로 유학, 유화를 익히고 돌아와 활동하던 시기를 근대미술의 시작으로 보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현상적인 사실에 따른 이러한 시기구분은 실상 근대미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미술의 역사가 일반역사와 동일한 진행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미술을 정치․경제․사회․문화사와 별개의 독립된 내재적 역사를 가진 것으로 단순하게 정리해 버린다면 미술을 사회적 삶과 무관한 자족적 영역으로 국한하여 미술의 사회적 연관성과 총체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또한 미술사일반에서 근․현대미술의 출현을 통상 전통으로부터의 급격한 단절과 이탈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이런 시각이 미술을 형식적 맥락으로 축소할 수 있음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만 보아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인 왕조가 무너지고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왜곡된 의식들이 파생되었고, 해방 후 미 군정체제, 정부수립 과정을 거치면서 또 다른 문화충격으로 어수선한 의식의 갈등을 느껴야 했다. 6·25동란으로 전쟁의 두려움과 동족상잔의 처절함을 겪어야 했고,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중단 없는 전진으로 경제를 일으켰다. 10·26으로 힘의 공백에 의한 혼란정국, 신군부 등장, 민주화, 문민정부, IMF체제 등 숨가쁘게 돌아가는 백년이었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통적 서화관으로 시·서·화(詩書畵)의 절대적 경지를 추구하던 때에 나라를 잃자 일제의 후원으로 세워진 서화미술원을 통하여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일제의 문화정책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열어 화가들의 주 활동무대가 이를 통해 이루어졌고, 강렬한 채색의 일본화가 우리미술의 자리를 차지하고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유럽미술이 소개되면서 일본적 시각의 미의식이 저변에 깔리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문화예술정책이 미국의 강력한 영향으로 형성되고 현대적인 대학교육으로 화가가 배출되면서 햄버거와 콜라로 상징되는 아메리카니즘으로 정신을 무장하는 꼴이 되었다.


Ⅱ. 서양 미술의 도입과 한국화의 과정

한국에서 처음 유화를 접하게 된 것은 19세기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 의해서였다. 일례로, 미국국적을 가진 네덜란드인 화가였던 휴버트 보스는 1899년 서울을 방문하여 <서울 풍경>을 그렸다. 유화물감이라는 새로운 재료로, 정동에서 광화문을 향해 보이는 풍경을 하나의 실제 공간처럼 재현한 그의 방식은 한국인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창문’과 같은 회화, 즉 삼차원적으로 실재하는 공간을 이차원의 평면에 재현해내려는 서양의 전통적 ‘회화’ 개념은 19세기말의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이후 한국인으로서는 1910년(혹은 1911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고희동이 처음으로 ‘양화’를 배운 화가로 기록된다. 그 이후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프랑스, 독일, 미국등에서 공부한 작가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대체로 일본은 한국인이 양화를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즉 한국 유화의 시작은 일본이 이해한 서구를 다시 한국에서 이해하고 소화해야 한다는 이중적 과제에 놓여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화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된 ‘자화상’이라는 주제는 화가들의 그러한 고민을 반영한다. 때로는 화공으로 때로는 사대부로 분열되어 있던 전통적 의미의 ‘그림 그리는 사람들’ 대신 이제 ‘화가’라는 근대적 인간형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서동진의 <팔레트속의 자화상>에서는 화가로서의 자기정체성이 드러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인간의 모습이 제시된다.
진정한 자기정체성은 ‘나’의 내면에 대한 질문을 확장할 때 성취된다. 나의 가족, 주변의 사물과 풍경, 사회와 환경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의 다양한 장르를 통해 발현된다. 급격하게 밀려들어오는 근대의 산물을 적극적으로 소재화 하든지 아니면 전통의 소재에 충실하면서 동양적인 미감을 개발하든지 하는 등의 선택이 화가들의 손에 맡겨졌다. 서구에서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다양한 유파들-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야수파, 표현주의 등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수용하는 문제도 근대기 화가에게 맡겨진 과제였다.
해방이 되고 전쟁을 경험한 이후에 이르러서야 한국의 유화는 동시대의 국제적인 조류를 직접적으로 대면할 기회와 여유를 갖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에서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상화의 조류는 서구의 ‘서정적 추상화’ 의 경향들과 병행하는 움직임이었다.
이렇듯 근대기 한국의 유화 · 수채화는 정치적 혼란과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새로움에 대한 충격을 소화하고, 자기정체성을 확립해가며, 더 넓어진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근대 수묵 · 채색화는 조선왕조 말기의 천재화가 장승업의 화풍을 이은 조석진과 안중식에서 비롯된다. 안중식의 <산수>가 보여주는 복고적인 성격, 길상적 성격이 강한 조석진의 <노안도>, 그리고 문인취향을 반영하는 김영기의 <난죽도>나 이도영의 <서창청공>등은 왕조 말기의 화단을 주도한 관념성과 상징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화풍은 서화미술회의 제자들을 통해 20세기 초반 수묵▪채색화단의 한 축을 형성하는 화풍으로 자리매김한다.
일본의 조선통치와 더불어 유입되기 시작한 일본 화풍은 우리의 전통 수묵▪채색화단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서화미술회 동문으로 결성된 동연사(同硏社)동인들은 자신들이 실제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을 대상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이전 시기의 산수화가 한 폭의 그림 속에 자연의 모든 이치를 포괄할 수 있는 총체적이며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자연의 모습을 담아냈다고 한다면, 이제 작가는 이상범의 <초동>에서처럼 자신이 바라보는 자연의 일부를 사생에 근거해 화면에 담아 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관념에서 현실로 눈 돌린 것으로써 이시기 변화된 작가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정찬영의 <공작>과 이유태의 <탐구>에서처럼 화조, 영모 및 인물화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한편, 위의 작품들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화풍상에서도 진한 채색을 사용한다거나 섬세하고 장식적인 화면을 선보이고 있는 등 일본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Ⅲ. 한국 미술에 대한 인식과 평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는 계몽의 시대였다. 민중은 신문, 잡지를 통해 지식을 보충해 나갔으며 그 전선에 선 기자는 애국 계몽적 차원에서 예술도 다루었고 시대의 냄새를 지울 수 없는 사회적 미술관을 보였다. 고희동의 그림을 비판한 한 기자의 글은 당시 화단에 대한 또는 다시 지식인이 지닌 미술관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작품의 전부가 산수도 아니면 사생화요, 인생의 사상 감정을, 민중의 실생활을 그려낸 인생화 · 민중화는 하나도 있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심히 유감천만이다. 원래 예술의 생명은 예술 그것에 있지 아니하고 인생의 사상 감정의, 민중의 실생활의 표현에 있다. ··· 나는 생각하였다. 조선의 예술이 아직 유치하다는 것은 이것이라고. 그리하여 혼자 애연하였다. ···조선의 예술은 현대 조선인의 머리로, 조선인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니요, 태석시대의 조선인의 머리로 손으로 된 것이니 이것이 시대적 예술이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오. 따라서 그 예술이 산 예술이 되지 못하고 죽은 예술이 되는 것도 또한 면치 못할 이세이다. 그러므로 나는 서화협회의 여러 어른들에게 이러한 부탁을 하고 싶다. 동양의 고대예술을 부흥시키는 것도 좋지만은 이보다도 새 예술을 많이 창조하여 조선인의 실생활과 부합하는 조선인의 사상 감정으로 나오는 예술을, 다시 말하면 시대적 예술, 즉 산 예술을 산출하기 바란다.
<동아일보 , 1920. 4. 1>

현실 참여의 그림을 원하던 지식인의 눈에는 동시대의 그림들이 모두 예술 자신의 세계에서 노니는, 구시대의 영화에 안주하는 전근대의 상징으로 보였다. 암울한 시대의 기운을 게으름 탓으로 돌리고 새로운 방법론으로 사회 · 현실참여적 민중화의 구현을 대안책으로 제시한 김복진의 이론은 1920년대에 시작하여 1935년에 공식 해체된 카프(KAR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합법적 토대도 제공하고 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자조적이고 전근대적인 양상으로 동시대의 미술을 정리한 것과는 달리, 김복진은 자신과 동료 작가들을 ‘근대 조선미술사의 전기적 존재’로 인식하였다. 서화협회를 근대 조선미술계의 모태로 보고 있음은 비록 그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민족적 색채가 농후한 서화협회를 다른 미술 단체보다 더욱 높이 평가한 자긍심의 일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미술 운동에서의 양상을 매우 정확히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당대인들이 동시대 미술에 바라는 사항은 현실참여적인 예술과 전근대적인 화제와 기법을 떠난 미술이었다. 물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논쟁으로 이어지지만 1925년 후반기까지는 개화라는 시각에서 미술에 눈뜬 동시에 사회적인 미술의 역할을 인식하는 단계였던 탓이다. 1925년의 카프의 결성으로 예술에서의 현실성 문제는 이들에게 더욱 고양된다. 그들은 미술에 있어서 현실성, 민족성, 계급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외래미술과 일본화풍의 모방, 그리고 현실에 대한 안이한 태도 및 고답적인 회화관 모두에 대하여 공격하였으며 이들에게 이론을 제공한 것은 김복진, 안석주, 홍득순, 윤희순 등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 특기해야 할 관점으로 안확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1915년 <학지광> 5호에서 조선미술에 대한 독자성을 주창하였는데 이는 일본 관학파에 의한 조선시대 미술 쇠퇴론에 반기를 드는 관점이었다. 이러서 동시대의 미술에 대해서는,


근래에 지(至)하여 미술의 쇠퇴한 원인을 언(言)할진대 정치상 압박이 미술의 진로를 방알(防遏)하며 탐관오리의 박탈이 공예를 말살하였다 할지라. 연(然)이나 갱사(更思)하면 유교가 차를 박멸함이 더 크니라.


하여 조선미술의 쇠퇴 이유가 유교에 있음을 말하였다. 식민지하에서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국혼을 되살리고자 이와 관련된 미술을 들춰내어 그 근거로 삼으려는 기류는 이 시기 민족국학자들의 한 연구법으로 보인다. 최남선이나 박종홍 등 모두 조선미술의 독자성이나 특수성을 힘주어 주장했지만 체계적인 접근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오히려 국혼을 강조하며 과거에 힘을 싣다 보니 자기 시대의 미술을 쇠퇴로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때 비록 잡지나 신문 등 저널을 통한 짤막한 미술비평은 당시 미술에 대해 솔직히 드러내는 점이 있다. 관람의 소감이나 사실을 전하는 데 그친 감상류를 제외하고는 나름대로의 잣대로 그림의 맛이라든가, 중미, 표현 등을 세계의 미술사조에 견주어 가며 그 조류안에서 미술을 들여다보려 하였다.

 

part - 2


Ⅰ. 근대 작가와 작품

1. 동경 미술학교 출신 서양화가

① 고희동 [ 高羲東 , 1886.3.11 - 1965.10.22 ]

1886년 3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관 제주(濟州), 호 춘곡(春谷)이다. 1903년 한성법어(法語)학교를 졸업, 이듬해 궁내부주사로 들어가 예식관(禮式官) 등을 역임하고, 이 무렵부터 취미로 서화를 시작하여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에게 배웠다. 1909년 한국 최초의 미술유학생으로 일본에 가서 동경미술학교(1910년 입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휘문·보성·중동 등의 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1918년 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새로운 미술운동을 전개하고 그 일환으로 협전(協展)을 18회나 개최하였다. 8.15광복 후 대한미술협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1948년 한민당(韓民黨) 상임위원,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심사위원장,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55년 대한민국예술원장으로 선출되는 한편 민주당 고문, 민권수호연맹위원장 등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1년 이후는 은퇴하였다.
당초 조선 후기의 화풍을 잇고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워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으며 1920년대 중반부터 다시 동양화로 전환하여 전통적인 남화(南畵) 산수화법에 서양화의 색채·명암법을 써서 감각적인 새로운 회화를 시도했다. 1949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으며, 그가 죽자 예총장(藝總葬)으로 치러졌다. 작품으로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 등이 있다.


② 김관호 [ 金觀鎬 , 1890 - 1959.10.20 ]

한국의 서양화가.

호 : 동우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평양
주요수상 : 일본 문부성 주최 제10회 전람회 문전(文展)특선입선
주요작품 : 《해질녘》


호 동우(東愚), 평양 출생이다. 1909년 일본에 건너가 1916년 동경[東京]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듬해 일본 문부성(文部省) 주최 제10회 전람회 ‘문전(文展)’에 작품 《해질녘》을 처음 출품하여 특선으로 입선하였다.
이광수(李光洙)는 ‘문전 관람기’를 통하여 김관호의 천재성을 상찬하였다. 귀국 후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호수(湖水)》를 출품하였고, 이듬해 평양에 소성회(塑星會)라는 미술단체 및 연구소를 개설하여 김찬영(金讚永) 등과 함께 서양화 보급에 힘썼다.
그리하여 고희동(高羲東)과 함께 한국 서양화 개척에서 쌍벽을 이루었는데, 고희동은 서울에서, 김관호는 평양에서 각각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곧 작품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여 1927년경 화단에서 은퇴하였으나, 1954년 조선미술가동맹에 들어가 다시 붓을 들어 《모란봉》 《해방탑의 여름》 등의 유화를 남겼다.
그의 화풍은 샤반풍의 밝고 세련된 인상주의적 색채가 짙다. 대표작 《해질녘》은 동경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③ 김찬영

1912년 일본동경미술학교 유학. 별다른 제작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채 도중에 붓을 꺽었다.
김찬영은 고희동,김관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서양화를 전공한 유화가 1세대이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던 1910년대 말의 조선 화단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창립을 위한 막후 작업이 한창 고조에 달했던 때이다. 그러나 전국 규모의 근대적 미술단체의 설립이라는 역사적 작업에 당시로서는 몇 되지 않은 조선인 양화가 중 한 명인 김찬영은 이에 참석하지 않았다. 미술보다는 문학 동인지 활동에 더 열정을 보인 때문인지 생존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미술가로서의 김찬영에 대한 검토 및 연구가 시도된 적이 없다.


④ 나혜석 [ 羅蕙錫 , 1896.4.18~1949 ]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본관 : 나주
호 : 정월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경기 수원
주요수상 :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주요저서 : 《경희》 《정순》
주요작품 : 《누드》

 

본관 나주. 호 정월(晶月). 경기 수원 출생. 1918년 일본 동경[東京]여자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하고, 1920년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26년부터 3년간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귀국 도중 파리에서 그린 정원화(庭園畵)가 도쿄의 이과전(二科展)에 입선되었다.
한편,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1929년 이혼하고 충청남도 공주의 마곡사(麻谷寺)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였다. 대표작으로 《누드》가 있다.

 


⑤ 이병규 [ 李昞圭 , 1901~1974 ]

서양화가.

호 : 오하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경기 안성
주요수상 : 대한민국 문화포장(1962), 대한민국예술원상(1967)
주요작품 : 《온실 속의 여인》(1963), 《온실 일우》(1971)


호 오하(梧下). 경기도 안성 출생. 서울 양정고보를 거쳐 1925년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는 외면하고, 민족사회의 서화협회전람회와 1934년 선전 출품을 거부한 일부 젊은 화가들이 조직한 목일회(牧日會)의 동인작품전 등을 통해서만 작품을 발표하였다. 8·15광복 후는 제1회 국전 때부터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사실적 기법의 창작활동을 지속하였다.
소재는 주로 온실의 꽃과 설악산, 가야산 등지의 풍경, 사찰 주변의 풍정을 다루었다. 1962년 대한민국 문화포장, 196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에 《온실 속의 여인》(1963), 《온실 일우(一隅)》(1971) 등이 있다.


⑥ 공진형 [ 孔鎭衡 , 1900~1988 ]

서양화가.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미술
출생지 : 개성
주요작품 : 《자화상》 《정물》 《바이올린이 있는 악보》


개성에서 태어나 1925년 일본 동경[東京]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한 뒤 한국 최초의 근대미술 단체인 서화협회의 미술전에 출품하였다. 1929년에는 개성의 송도미술관 건립에 참여하였고, 1934년에는 장발 등과 함께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한 작가들의 모임인 목일회(牧日會) 창립전에 출품하였다.
8.15광복 뒤 1955년 대한미협전에 출품하였으며, 이어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를 지냈다. 작품에 《자화상》 《정물》 《바이올린이 있는 악보》 등이 있다.

 

⑦ 도상봉 [ 都相鳳 , 1902.1.6~1977.10.19 ]


한국의 서양화가.

호 : 도천(陶泉)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함남 홍원(洪原)
주요수상 : 예술원상, 국민훈장모란장, 문화예술상
주요작품 : 《백자 항아리가 있는 정물》


호 도천(陶泉). 함경남도 홍원(洪原)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고, 숙명여대 교수로 있으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심사위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미술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선 미술행정가로서도 활약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서양화가로서 전통적인 예술세계를 지키는 데 충실하였으며, 백자(白瓷)나 라일락을 소재로 한 많은 정물화와 풍경화를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하였다. 정적인 소재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에서 온화하고 여성적인 독특한 미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예술원상·국민훈장모란장·문화예술상 등을 받았으며, 《백자 항아리가 있는 정물》 등이 대표작이다.

 

2. 서구로 유학한 작가

① 이종우 [ 李鍾禹 , 1899.12.22~1981.2.7 ]

서양화가.

호 : 설초(雪蕉)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황해도 봉산(鳳山)
주요수상 : 선전 수상, 문화훈장 대통령장, 예술원 공로상
주요작품 : 《인형이 있는 정물》 《추억》


호 설초(雪蕉). 황해도 봉산(鳳山)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 후 17년 도일, 1923년 동경[東京]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고보(中央高普)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자화상》과 《추억》을 출품하면서 화단에 데뷰하였다. 1925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파리에 유학하여 슈하이에프연구소에서 수학, 1927년 살롱 도톤전에 《모부인(某婦人)의 초상》 《인형이 있는 정물》 등을 출품하고, 1928년 귀국하여 제l회 개인전을 가졌다. 그 후 한동안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는 한편 경신학교(儆新學校), 평양의 삭성회(朔星會)회화연구소, 다시 중앙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3년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으며, 1934년 선전(鮮展)에서는 《추억》으로 3등상을 받았다. 1945년 조선미술협회 회장, 1951년부터는 홍익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1960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화훈장 대통령장, 예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초기의 고전적 사실화풍과 후기의 정감적이고 자연관조적인 동양적 취향으로 대별된다.


② 백남순 [ 白南舜 , 1904 - 1994 ]


한국의 화가.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미술
출생지 : 서울
주요작품 : 《낙원》(1937)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백남순(白南順)이다. 1923년 동경[東京]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서 그만두고 귀국하여 1925∼192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28년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파리에 유학하여 프랑스미술가전람회에 입선하고, 살롱 데 튈르리에 초대받아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30년 파리에서 만난 예일대학교 출신의 화가 임용련(任用璉)과 결혼한 뒤 서울로 돌아와 동아일보 사옥에서 부부 작품전을 가졌다. 1931년 임용련이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에 부임함에 따라 그곳에서 생활하였으며 서화협회전에 출품하고 목일회(牧日會) 창립회원으로 부부가 함께 참가하였다.
8·15광복 뒤 월남하였으나 6·25전쟁 때 임용련이 납북되자 혼자 성심공민학교(聖心公民學校)를 창설하였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활동하였다.
나혜석과 함께 국내 여류화단의 문을 연 신여성으로서 자유분방한 필치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대표작인 《낙원》(1937)은 오산에서 생활할 때 그린 작품으로 8폭 병풍에 동양 전통의 산수화와 서양식 풍경화를 접목시킨 대작이다.


③ 임용련 [ 任用璉 , 1901.3.18 - ? ]


한국의 서양화가.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평남 진남포
주요작품 : 《에르블레 풍경》 《금강산》(1940)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이다. 배재고보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쫓겨 중국으로 피신, 그후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 하이드파크고등학교에서 어학과정을 마친 다음 시카고미술대학과 예일대학을 졸업하였다. 윈체스터 펠로우십을 받아 유럽을 여행하던 중 백남순(白南舜)을 만나 결혼(1930), 함께 살롱 도톤 등에 출품하고 귀국 후 동아일보 사옥에서 부부전을 개최하였으며, 제10회 협전(協展)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1년부터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미술,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이중섭 등을 배출하였다. 8·15광복 후 이북에 모든 작품을 남겨두고 남하했기 때문에 그의 작가적 역량을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서구회화를 직접 체험하고 소화해낸 지적(知的) 배경을 가지고 있어 근대 한국회화의 층을 두텁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에르블레 풍경》과 개인소장의 《금강산》(1940) 등을 통해서 그의 뛰어난 색채감각과 우수한 조형능력을 찾아볼 수 있으나 그의 작품이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미군정기간 동안 군정장관의 고문을 역임하였고 서울세관장으로 재직하던 중 납북되어 그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④ 장발 [ 張勃 , 1901~2001.4.8 ]

한국의 서양화가.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미술
출생지 : 인천
주요수상 : 대한민국예술원상, 서울시문화상
주요작품 : 《12사도상》 《성 김대건 신부상》 《작품 A》 《작품 3》


1901년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제2공화국 때 총리를 지낸 운석(雲石) 장면(張勉:1899~1966)의 친동생이다. 1922년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거쳐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1925년에 귀국하였다.
초기에는 한국 천주교회를 위한 성화 작업을 많이 하였고,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를 거부한 작가들의 모임인 목일회(牧日會) 창립전과 1937년 목시회(牧時會) 회원전에 참여하였다. 또한 김복진·안석주 등과 속칭 선전(鮮展)이라 불리는 조선미술전람회를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과 이간책으로 실패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한국사실작가회원전·한국현대서양화대전 등에 출품하였다. 이어 대한민국 예술원상·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작품 활동보다는 교육에 힘써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과 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미국으로 가서 생활했으며 동양적 비구상화 계열의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12사도상》 《성 김대건 신부상》 《작품 A》 《작품 3》 등이 있다. 1996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행사 때 '자랑스런 서울대인'으로 선정되었으며, 동상이 세워졌다.

 

3. 한국화가

(1) 남도 문인화파

① 허백련 [ 許百鍊 , 1891~1977 ]

동양화가.

호 : 의재(毅齋)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전남 진도(珍島)
주요수상 : 예술원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주요작품 : 《계산청하(溪山靑夏)》(1924) 《설경(雪景)》(1965)

 

1896년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 1910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 3년을 수료하고 그림공부에 전념, 1935∼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수석입선하여 화단에 등장하였다.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그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2회부터 13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시·서·화를 겸전한 남종화의 대가로 1973년 회고전을 가졌다. 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으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다. 대표작으로 《계산청하(溪山靑夏)》(1924), 《설경(雪景)》(1965), 《추경산수(秋景山水)》 (1971) 등이 있다.


② 허건 [ 許楗 , 1907~1987 ]

동양화가.

호 : 남농(南農)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전남 진도
주요수상 : 대한민국 문예예술상(1976),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1982)


호 남농(南農). 전라남도 진도 출생. 1927년 목포상업전수학원을 수료하였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출품하여 입선하고, 1944년 동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되고 1960년 동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76년 남농상(南農賞)을 제정하고, 동년 대한민국 문예예술상을 수상하였다.
또 1982년에는 대한민국 은관(銀冠) 문화훈장을 수상하고,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에 피선되었다. 그는 조선 후기의 저명한 화가 소치(小癡) 허유(許維)를 할아버지, 미산(米山) 허형(許瀅)을 아버지로 하는 3대째의 화맥을 이어온 조선 후기에서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남화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 세계의 의미도 이 같은 회화사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채색화파

① 김은호 [ 金殷鎬 , 1892.6.24 - 1979.2.7 ]


한국의 화가.

본관 : 상산
호 : 이당(以堂)
별칭 : 양은(良殷)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예술(미술)
출생지 : 인천
주요수상 : 서울시문화상(1962), 대한민국예술원상(1968)
주요작품 : 《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간성(看星)》《향로》

 

본관은 상산(商山), 호는 이당(以堂), 다른 이름은 양은(良殷)이다. 1892년(고종 29)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晋)을 사사하고, 한말 최후의 어진화가(御眞畵家)를 지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제미전(帝美展) 등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다.
1937년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이 되어 같은 해 11월 일본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는 한편, 1942년부터 2년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 심사위원을 맡아 화필보국(畵筆報國)·회화봉공(繪畵奉公)에 입각한 친일 활동을 하였다. 그 밖에 조선남화연맹전(1940),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1), 조선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한 일만화(日滿華)연합 남종화전람회(1943.7) 등 성전(聖戰) 승리를 위한 국방기금 마련전에도 참여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추천작가, 1955년 국전 심사위원을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1920년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여 백윤문(白潤文)·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이유태(李惟台)·한유동(韓維東) 등 후진을 길러냄으로써 한국 회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림은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으나 중심 영역은 무엇보다 인물에 있었다. 선전 1회에 출품한 《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 이래 주로 인물 소재를 다루면서, 종전 스타일과는 다르게 선묘(線描)를 억제하고 서양화법의 명암과 원근을 적용하였다. 단순한 전통 화법의 계승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화를 통해 사생주의(寫生主義)를 흡수하고, 또 양화풍의 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물화 외에 수묵담채(水墨淡彩)의 산수풍경, 문인화(文人畵)에서도 독특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65년 3·1문화상,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승무(僧舞)》《간성(看星)》《향로》《군리도(群鯉圖)》《춘향초상》《충무공 이순신 초상》 등이 있다.

 

② 이용우 [ 李用雨 , 1904~1952 ]

화가.

호 : 춘전(春田) ·묵로(墨鷺)
별칭 : 자 창윤(蒼潤)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서울
주요작품 : 《시골풍경》 《백두산 천지》


자 창윤(蒼潤). 호 춘전(春田) ·묵로(墨鷺). 서울 출생. 1911년 9세의 나이로 서화미술회 1기생으로 입학하여 조석진(趙錫晉)과 안중식(安中植)으로부터 전통화법을 배우고 1918년 16세의 나이로 서화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20년 서화미술회 동기인 오일영(吳一英)과 함께 창덕궁 대조전의 《봉황도》를 그리고, 1921년부터 열린 서화협회 전람회 등에 출품하면서 화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30년대부터는 한적한 산경(山景)을 환상적인 형태로 그렸으나 1940년대 들어서는 향토적인 정경에 눈을 돌려 경쾌한 필치를 구사하였다. 이 밖에 현대적 감각이 풍기는 화조화도 많이 그렸으며 1949년 제1회 국전에서는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대표작에 《시골풍경》 《백두산 천지》 등이 있다.

 

③ 이상범 [ 李象範 , 1897.9.21~1972.5.14 ]

동양화가.

호 : 청전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충남 공주
주요수상 : 3·l문화상 본상(1963), 서울특별시 문화상(1966)
주요작품 : 《창덕궁 경훈각 벽화》 《원각사 벽화》 《설로도》

 


1897년 9월 21일 충청남도 공주(公州)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청전(靑田)이다. 1918년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를 졸업하고 1925년부터 선전(鮮展) 특선 10회에 이르렀으며, 1927년부터 동아일보의 미술책임 기자로 근무하다가 1938년 손기정(孫基禎)선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피검되었다. 1938년부터 선전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47년 종합미전(綜合美展) 심사위원이 되었다. 1949년 홍익대학교 교수, 1949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를 겸하고 1953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4년 예술원회원, 1956년 미술가협회 고문에 추대되고, 1961년 홍익대학교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63년 3·l문화상 본상, 1966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작품세계는 초기에는 스승이었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영향을 받아 남북종(南北宗) 절충화풍을 보였으나 점차 독자적 세계를 개척,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그려냈다. 대표작품으로 《창덕궁 경훈각 벽화》 《원각사 벽화》 《설로도(雪路圖)》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 등이 있다.

 

④ 노수현 [ 盧壽鉉 , 1899 - 1978.9.6 ]

한국의 동양화가.

호 : 심산(心汕)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경기 개성
주요수상 : 조선미술상, 은관문화훈장(銀冠文化勳章)
주요작품 : 《고금영서(古今迎書)》


1899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심산(心汕)이다. 1913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이듬해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동양학과를 나와 그림공부를 하다 1917년 다시 안중식 화숙(安仲植畵塾)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가 1923년 조선일보로 옮기고,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1929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에 입선하여 금패를 받았다.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으며 1974년 회고전을 열었다. 조선미술상·은관문화훈장(銀冠文化勳章) 등을 수상하고, 《고금영서(古今迎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⑤ 변관식 [ 卞寬植 , 1899.3.19~1976.2.17 ]

동양화가.

호 : 소정(小亭)
활동분야 : 미술
출생지 : 황해 옹진(甕津)
주요작품 : 《외금강 삼선암(外金剛三仙岩)》,《이어(鯉魚)》

 

1899년 3월 19일 황해도 옹진(甕津)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소정(小亭)이다. 관립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에서 도화(陶畵)수업을 받은 후 외조부인 소림 조석진(趙錫晋)이 관여하던 서화미술원에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등과 함께 공부하고, 1925년 일본에 가서 동경미술학교(청강생)를 수료하였다. 8·15광복 후 초기 국전에 참여하였으나 심사부조리를 개탄, 국전을 포기 외면하고 이후 작품제작에만 몰두했다.
화법의 특징은 첫째, 화면상의 시점이 부감시(瞰視)에 따른 일종의 심원(深遠)의 형식이면서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시점을 구사하여 박진감과 입체파풍의 구조적 해석을 보였다. 둘째, 청전(靑田)과 달리 적묵법(積墨法)에 의해 변화를 주었으며 관념적인 산수가 아니라 엄격한 사경(寫景)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풍치가 배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산세에 접경되는 인물들은 비탈진 산길을 뒤뚱거리며 올라가는 흰 두루마기의 촌로들이 보여주는 해학적인 풍정에서 진정한 한국적인 야취(野趣)를 맛볼 수 있다. 작품으로는 일련의 금강산 시리즈인 《외금강 삼선암(外金剛三仙岩)》 《내금강 진주담(內金剛眞珠潭)》 《옥류청풍(玉流淸風)》 등과 《이어(鯉魚)》 등의 어해도(魚蟹圖)가 있다.

 

⑥ 이용우 [ 李用雨 , 1904~1952 ]

화가.

호 : 춘전(春田) ·묵로(墨鷺)
별칭 : 자 창윤(蒼潤)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서울
주요작품 : 《시골풍경》 《백두산 천지》


자 창윤(蒼潤). 호 춘전(春田) ·묵로(墨鷺). 서울 출생. 1911년 9세의 나이로 서화미술회 1기생으로 입학하여 조석진(趙錫晉)과 안중식(安中植)으로부터 전통화법을 배우고 1918년 16세의 나이로 서화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20년 서화미술회 동기인 오일영(吳一英)과 함께 창덕궁 대조전의 《봉황도》를 그리고, 1921년부터 열린 서화협회 전람회 등에 출품하면서 화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30년대부터는 한적한 산경(山景)을 환상적인 형태로 그렸으나 1940년대 들어서는 향토적인 정경에 눈을 돌려 경쾌한 필치를 구사하였다. 이 밖에 현대적 감각이 풍기는 화조화도 많이 그렸으며 1949년 제1회 국전에서는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대표작에 《시골풍경》 《백두산 천지》 등이 있다.

 

 

Ⅱ.협회의 전개

① 서화협회 [ 書畵協會 ]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단체.

구분 : 미술단체
설립연도 : 1918년
소재지 : 서울
설립목적 : 신구서화계의 발전과 동서미술 연구, 후진 교육
주요활동 : 서화협회전 개최, 서화학원 개설, 《서화협회보》 발간


신구서화계(新舊書畵界)의 발전과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向學後進)의 교육 및 공중(公衆)의 고취아상(高趣雅想)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1년 윤영기가 경성서화미술원을,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이 서화미술회를, 1915년 김규진(金圭鎭)이 서화연구회를 설립하고 평양이나 대구에서도 학원이 생겨 미술인이 증가함에 따라 고희동(高羲東)은 윤영기·김규진 등과 단체설립을 모색하였다. 1918년 6월 16일 서화애호가 김진옥(金鎭玉)의 집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협회취지서와 규칙을 채택하는 한편 회장 안중식, 총무 고희동, 간사 김균정(金均楨)을 선출하였다. 회원으로는 오세창(吳世昌)·조석진·김규진·정대유(鄭大有)·현채(玄采)·강진희(姜璡熙)·정학수(鄭學秀)·강필주(姜弼周)·이도영(李道榮) 등이 등록하였다. 회원은 정회원·특별회원·명예회원으로 구분하고 일본인 회원은 배격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후원금을 생각해 김윤식을 명예부총재, 이완용·민병석·김가진·박기양 등을 고문으로 선출하는 등 친일 고관을 전면에 내세웠다.

 


② 고려미술회 [ 高麗美術會 ]

1923년 9월에 발족한 신미술운동 단체.

구분 : 미술단체
설립연도 : 1923년
소재지 : 서울
설립목적 : 신미술운동
주요활동 : 청소년미술학에 대한 실기지도


한국 근·현대미술에 있어서 미술계 형성의 준비기인 1920년대에 설립된 이 미술단체는 강진구(姜振九)·김석영(金奭永)·김명화(金明嬅)·정규익(丁奎益)·나혜석(羅蕙錫)·이병직(李秉直)·이재순(李載淳)·박영래(朴榮來)·백남순(白南舜) 등을 회원으로 설립하였다.
1920년대는 신인공모전의 출현으로 미술인의 연례행사인 서화협회의 협전과 조선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를 매년 개최하였다. 이 조선미술전람회는 식민지미술이란 독특한 미술풍을 조장하면서 일본화단의 아류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 많은 미술 소집단들이 출현했는데 그 중 하나인 고려미술회는 1924년에 미술연구소인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으로 개설되어 1925년에 문을 닫을 때까지 청소년 미술학도를 대상으로 실기를 지도하였다. 동양화는 김은호(金殷鎬)·허백련(許百鍊), 서양화는 강진구·이종우(李鍾禹) 등이 지도하였으며, 이곳에서 수학하고 나간 화가로는 이마동(李馬銅)·구본웅(具本雄)·길진섭(吉鎭燮) 등이다.


③ 동연사 [ 同硏社 ]


1923년 3월 9일에 결성된 한국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

설립연도 : 1923년 3월 9일
구분 : 한국화 동인
설립목적 : 1920년대 조선화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결성함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1899∼1976),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1899∼1978),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1902∼1952) 등 4명이 결성했다. 다른 화가들이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을 때 '중국화·일본화에 견줄 만한 우리 그림으로서의 조선화의 방향을 함께 연구하자'는 뜻을 내걸고 모인 동인회이다.
이들은 한말의 대가였던 안중식·조석진 등으로부터 배운 전통 회화를, 근대적 사조와 감각에 맞게 새로운 한국적 화풍을 이루고자 하였다. 특히 인습적·타성적 중국화풍과 당시 새롭게 부각되었던 일본화풍에서 벗어난 한국적 그림에 대해 연구하였다. 대상에서 받은 감동 그대로 화면에 옮기기 위해 전통적인 화법을 바탕에 두고, 서양화의 원근법·명암법 그리고 일본화의 감각적 표현법 등을 적절히 수용하면서 독자적인 필묵법(筆墨法)을 창조했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에 골몰하였는데, 한국화를 이끌어갈 신진 주자들의 실체를 드러낸 모임이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전시회 한 번 열지 못하고 1924년 해체되고 말았다. 이 단체는 근대 이후 영향력 있는 거장들이 뜻을 같이 했던 단체였다는 점에서 결성 자체만으로도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변관식은 금강산 등 실경산수의 이상을 발견했고, 이상범은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지막한 야산, 적막한 들판에서 그 전형을 찾았다. 노수현은 서구적인 투시법과 원근법을 시도해 현실감 있는 실경을 이룩했다. 동연사 회원 중 제일 나이가 어렸던 이용우는 가장 일찍 주목받은 화가로, 활달하고 빠른 필치와 감각적인 화풍이 특징이었다.
작품으로는 변관식의 《수유정(水幽亭)》 《계산춘제(溪山春霽)》 《조춘(早春)》, 이상범의 《산수》 《초동》 《모운》, 노수현의 《산수도》, 이용우의 《점우청소》 《시골풍경》 등이 있다.


④ 목일회 [ 牧日會 ]


일제강점기에 결성되어 활동했던 서양화가들의 단체.

설립연도 : 1934년
구분 : 미술단체
소재지 : 서울
설립목적 : 서양화가들의 동인활동
주요활동 : 전람회 개최

 

1934년 서양화가들이 결성한 미술단체로서 화신백화점에서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가졌다. 그러나 단체의 이름이 일본 배격의 뜻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사용금지 당함에 따라 모임이 해체된 상태였다가 1937년에 이름을 목시회(牧時會)로 개칭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회원은 이종우(李鍾禹), 구본웅(具本雄), 김용준(金瑢俊), 임용련(任用璉), 백남순(白南舜), 이병규(李昞圭), 황술조(黃述祚), 길진섭(吉鎭燮), 장발(張勃), 송병돈(宋秉敦), 이마동(李馬銅), 신홍휴(申鴻休) 등 주로 동경[東京]미술학교 출신이었다.
그림의 성향은 대개 일본 양화의 수법을 따르는 보편적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범주였으나, 파리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양의 순수주의 사조를 따르는 야수파적인 표현이나 과감한 반전통적 방법을 시도하는 성향도 주목받았다.
그러나 개인의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사회적 배경과 양화에 대한 인식의 저하를 극복하지 못하고, 2회의 회원전을 개최하는 업적을 남기고 1938년 해체되었다.


⑤ 그 외 삭성회 , 토월미술연구회 , 창광회 , 녹향회 , 동미회 , 향토회 , 창용사 , 구신회 , 단광회 등이 있다.


Ⅲ. 조선미술전람회 [ 朝鮮美術展覽會 ]

일제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해마다 개최하였던 전국 규모의 미술 공모전

수상분야 : 동양화,서양화,조각,서예,사군자
주최 : 조선총독부
개최원년 : 1922년
개최장소 : 조선


‘선전(鮮展)’으로 약칭되었다. 이보다 앞서 오세창(吳世昌) ·고희동(高羲東) ·안중식(安中植) 등이 조직한 서화협회(書畵協會)와 서화협회전이 심상치 않은 민족의식과 주체성 있는 단합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데 주목한 조선총독부는 1922년 조선에서의 문화정책을 표방하고 최대 규모의 종합미술전으로서 조선미술전람회를 설정하고 작품을 공모하여 그해 6월 1일 제1회 전람회를 열었다.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서예 ·사군자의 5개 부문으로 나누어 공모 시상하였으며 1944년 제23회를 끝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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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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