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8장 안개 짙은 서울
종철은 아침에 아현동 하숙집을 나와 전차를 타고 명동으로 나왔다.
10월에 접어들면서 거리의 플라타너스가로수 잎들은 벌써 단풍을 서두르며 붉은 색을 띠기 시작했다. 노변에는 음식점, 구멍가게, 문방구점, 전당포, 약방, 사진관, 빵집, 주점, 다방, 극장, 책방 간판들이 지저분하게 난립해 있었다.
행인들의 옷차림도 각양각색이다. 두루마기를 걸치고 갓을 쓰고 버선을 신은 노인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보이는가 하면 사각모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양복차림의 신사,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인부들의 모습도 보인다.
땡땡, 땡땡,
제법 구성진 종소리를 울리며 궤도 위를 달리는 전차들이며 듬성듬성한 자전거 행렬이며 인력거들은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와 어울려 혼잡을 빗고 있었다.
어느 극장에 들어가 『자유만세』라는 영화 한 편을 관람하고 나오자 명동성당에서 낮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뗑뗑 울렸다. 한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그린 영화였는데 주연 배우인 전창조의 훌륭한 연기 때문에 퍽 인상적이었다.
과연 우리나라는 독립을 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고르며 잠시 극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갈 곳이 없었다. 찾아갈 사람도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는 삭막한 도시! 서울은 그에게 생소함 이외의 아무 의미도 없었다.
우선 구멍가게에 들러 권연 한 갑을 샀다. 한 갑에 10원씩 하는 「공작」이나 8원씩 하는 「무궁화」는 너무 비싸서 손에 집었다가 도로 놓고 3원짜리 「승리」담배 한 갑을 샀다.
그가 교사로 근무하는 ㅎ고등학교는 이틀 전부터 동맹휴학에 들어갔으므로 종철은 갑자기 할일이 없어져 거리에서 빈둥거리게 된 것이다. 물가는 폭등하고 사상초유의 식량위기가 도래했는데도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반포해 농민들의 불만과 반발을 야기했고 게다가 화폐를 남발하여 악성 인플레를 초래하고 미곡을 일본으로 밀반출함으로써 물가상승과 양곡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게다가 악덕자본가들은 경찰, 관료들과 결탁하여 미곡을 매점매석하여 민중의 불만을 조장했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5월부터는 좌익탄압에까지 나서 대중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이다. 이에 일부 학교들에서는 전평과 전농의 저항운동에 합세하여 동맹휴학에 돌입했던 것이다.
종철은 일제 때의 미스코시백화점 옥상카페에 올라가 차를 마시며 왜놈들이 〈거지들의 거리〉라고 깔보던 해방된 서울의 시가를 부감했다. 종로와 명동, 충무로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가난의 때를 벗지 못한 서울 시가지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인구 160만에 97%나 안정된 직업이 없는 실업자의 도시, 가난뱅이의 도시였다.
요즘 들어 만주에 두고 온 향란의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가 월남할 때만 해도 38선 경계는 그리 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경계가 심해지는 걸 보자 다시는 향란을 만나게 되지 못할까봐 불안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함께 동행 했을 걸 하는 후회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그때 종철은 38선을 넘어 이남 땅에 발을 디디자 곧바로 고향인 남원으로 하행했었다. 그러나 고향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세상을 떠난 뒤였고 큰할아버지가족과 고모네만 계실 뿐이었다. 종수형님은 면자위대에 다니다가 경찰에 자원입대하여 좌익세력 탄압에 앞장서고 있었다. 군이나 면에는 종수형과 같은 일제 시대의 관료들과 친일파들이 고스란히 남아서 제 세상처럼 활개 치는 꼬락서니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하고 말았다. 어느 대학선배의 소개로 ㅎ고등학교 교사로 임직할 때 아예 이름까지 김혁민이라고 바꿔버리고 깊숙이 은둔해버렸다.
요즘은 교사직을 사퇴하고 서울대에 복학하여 공부나 더 할까 생각 중이다. 그런데 학비조달이 어려울 것 같아 망설이고 있었다.
옥상카페에서 지루함을 느낀 종철은 다시 거리로 내려왔다.
마침 땡땡, 땡땡, 종소리를 울리며 전차가 달려왔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전차에 올랐다.
어디 가야겠다는 행선지도 없었다. 다만 위치의 이동을 통해 마음을 괴롭히는 권태와 허탈감에서 해탈하고 싶었다. 조국으로 귀국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려던 포부가 지주라는 성분 하나 때문에 북조선당국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던 그때부터 종철은 뜨겁던 가슴이 식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타오르던 가슴속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와서도 그는 적극적이거나 선두적이지는 않았지만 간혹 좌익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많이 증발되었고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다만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고 독립했다는 나라가 친일파들의 수중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그더러 친일파와 결탁하는 우파에 대해 반감과 불만을 가지게 했기에 좌파를 지지하게 되었을 뿐이다. 물론 그 외에도 찬탁반탁문제, 친일파청산문제, 토지개혁문제, 정권의 성질문제 등에서도 우파보다는 좌파의 주장에 동감이 갔던 이유도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멀리 보이는 남산 언덕 위에 게딱지같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전차는 어느새 서울역에 진입했다. 전차에서 내려 인력거를 불러 탔다. 그가 당도한 곳은 뜻밖에도 해방촌이었다.
내가 왜 여길 왔지?
스스로도 어리둥절했다. 남산 기슭의 산등성이에 올망졸망 들어앉은 빈민촌! 해방이 되자 해외와 이북에서 밀려들어온 실향민들의 임시거처가 되어버린 가난뱅이 동네를 바라보는 순간 종철의 녹 쓸어버린 기억 속에는 저도 모르게 한 여자의 모습이 오롯이 떠올랐다.
설미령! 그렇다, 미령이가 이 판자촌에 살고 있다. 오늘이 10월 2일이니까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정확히 두 달하고 3일 전이었다.
그날 종철은 어느 좌익단체의 소규모 실내 군중집회에 친구의 초청을 받고 참가했다. 친구의 말로는 조선공산당 당수인 박헌영이 친히 연설을 한다고 해서 갔지만 이름도 모를 당 간부가 대신 연사가 되어 당전시국과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서 연설했다. 그런데 연설도중 느닷없이 달려든 우파폭력조직의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집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도 곤봉의 난타에 정신을 잃고 거리바닥에 뻗어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좁고 퀴퀴하고 어둑어둑한 어느 판잣집 안에 누워 있었다. 눈을 떠보니 미모는 아니었으나 복스럽게 생긴 20대의 아가씨가 그의 머리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아가씬……. 여기가 어디죠?”
“해방촌이에요.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져 있기에 인력거꾼을 불러 우리 집에 모셔왔어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는지라……”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그런데 선생님은 좌익인가 보죠?”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옳다고 할 수도 없었다.
“대접할거라곤 이것밖에 없어요.”
밥상 위에는 보리밥과 김치 한 포기 뿐이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술 한 병을 들고 나타났다.
술을 마시는 동안 그곳이 판자촌이며 그녀의 이름이 설미령임을 알게 되었다. 종철은 그날 이상한 허탈감을 달래느라 무진장하게 술을 마셨다. 영문 없이 자꾸만 억울하고 원통했다. 사회주의 운동 한 번 못해보고 곤봉에 맞아 머리만 터졌으니 말이다.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먹은 걸 구들에 죄다 토하고 엉엉 통곡을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의 일은 필름이 끊어져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의 몸에는 실 한 오리 걸쳐 있지 않았다. 옆에는 역시 알몸뚱이인 미령이가 탄력 있는 젖가슴을 활짝 드러낸 채 자고 있었다. 깜짝 놀란 종철은 다급히 일어나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 판잣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내가 어쩌다가 미령이와 잠자리를 같이 했을까? 아무리 희미한 기억을 의식적으로 닦아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내막도 모르는 여자와 몸을 섞다니! 혹시 창녀인지도 모르잖아.
여기까지 우려가 미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인젠 향란 씨를 무슨 염치에 대한단 말인가. 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갚을 수 없는 양심의 빚을 졌어. 난 사랑의 배신자야!
그 일이 발생한 뒤로는 다시는 미령이네 집을 찾지 않았다. 그날 자신의 거처와 이름과 직업을 발설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으리라. 그건 현실이 아니라 한 차례의 악몽에 불과할 뿐이야, 이렇게 스스로를 단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이곳으로, 미령이가 사는 빈민촌으로 발걸음을 하다니! 인력거를 불러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살고 있을 언덕 위의 게딱지같이 허름한 판잣집들을 쳐다보는 순간 종철은 알 수 없는 유혹과 욕망의 충동에 떠밀려 저도 모르게 가파른 언덕길을 터벅터벅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사나 한 번만 슬쩍 살펴보고 내려오는 거야.
자신의 이상한 행동에 억지로 구실을 달면서 걸음을 옮겼다.
버린 널판자 조각이나 벽돌장, 레이션 박스나 깡통, 과일상자, 마분지, 거적…… 손에 잡히는 대로 쓰레기를 주워 모아 쌓고 박고 붙이고 이은 각양각색의 궁색하고 허름한 판잣집들이 흙을 깎아내린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촘촘히 붙어 있었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언덕길에는 집집마다에서 내던진 구정물과 음식물쓰레기, 각종 오물찌꺼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미끄러웠고 고약한 악취가 진동했다. 도처에 쓰고 버린 구멍탄재가 널려 발 디딜 자리조차 없다. 노인네들이 판잣집 문 밖에 나앉아 시들어버린 나물을 다듬거나 옷을 벗어 이 잡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한가하고 권태롭다. 한결같이 얼굴이 굶주림으로 누렇게 뜨고 부은 데다 병색까지 깊어 보인다. 어떤 이는 수척하다 못해 해골만 앙상하다.
올 때는 혼미상태였고 갈 때에는 도망하기에만 바빴는데도 종철은 신기하게도 그 복잡한 골목들을 헷갈리지 않고 어렵잖게 미령이네 집을 찾아냈다. 오늘 보니 미령이네 집은 깡통을 편 양철들과 널빤지 조박들로 무어진 판잣집이었다. 그 옆에 찌그러든, 마분지나 거적조박으로 지은 판잣집에 비하면 이 빈민촌에서는 궁궐인 셈이다.
종철은 인젠 집을 보았으니 그만 돌아서 내려갈까 하다가 일종의 호기심에 끌려 다시 몸을 돌이켰다. 한 번만이라도 집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룻밤일망정 자신과 살을 섞었던 여자의 방 안이 어떤 모양이며 미령은 뭘 하고 있는지 하는 것들이 적이 궁금해졌다. 앞을 막아서는 향란의 옆으로 슬쩍 비켜서며 허리를 굽히고 방 안을 기웃거렸다.
방 안은 어둠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방바닥엔 이부자리가 펴진 대로이다. 맞은편에 구리 장식을 한 키 낮은 장롱이 있고 그 위에 화장대가 있고 벽의 옷걸이에는 까만 투피스와 양복치마저고리가 걸려 있었다. 이런 빈민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화스러워 보이는 이불과 의복과 화장대가 그녀의 신분을 더욱 신비하게 했다. 바로 저 이불 속에서 그녀가 그날 입고 있던 투피스를 벗고 알몸뚱이로 나와 살을……
“누구세요?”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종철은 흠칫 놀라 문 앞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뜻밖에도 미령이었다. 금방 잠자리에서 일어난 모양 아직 화장하지도 않은 맨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니, 선생님께서 어쩌다가 저의 집에?!”
미령은 그를 금방 알아본다. 그러나 말로만 놀랄 뿐 표정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다. 자주 만나는 이웃집 총각을 대하듯 지어 심드렁하기까지 했다. 공연한 발걸음을 하여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자존심을 상하게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돌아내려갈 수도 없었다.
지난밤 술을 과음한 듯 그녀의 눈 등은 퉁퉁 부어 있었다. 두툼한 입술과 둥실둥실한 코와 커다란 입은 예쁘지는 않았지만 후더분한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었다. 풍만한 가슴과 둔부는 사내의 눈길을 끌 만큼 섹시했다.
종철은 갑작스런 만남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졌다.
“지나가던 길에……”
“오셨으면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우리 술이나 한 잔 해요.”
미령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동굴 속 같은,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종철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의 권유는 예의가 아니라 명령처럼 느껴졌다. 이미 살까지 섞은 사이에 예의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종철은 그녀의 뒤를 따라 허리를 굽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이 어찌나 낮은지 허리를 굽히는 정도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기어들어가야 했다.
방 안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시큼하기도 하고 들척지근하기도 하고 퀴퀴하기도 한 냄새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역겹지는 않았다. 문득 등 뒤의 골목길에서 향란이가 우두커니 서서 실망과 원망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종철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나 골목길은 구멍탄 잿더미와 생활쓰레기만 가득 널려 있을 뿐 향란은 보이지 않았다.
난 지금 향란 씨에게 두 번 죄짓고 있는 거야. 더구나 맑은 정신에. 이래선 안 돼. 어서 이 집에서 돌아나가야 돼. 어서! 그러나 그의 발길은 어찌나 깊숙이 바닥에 심어졌는지 뽑아낼 수가 없었다.
미령은 자그마한 나주반에 북어조각과 볶은 땅콩을 올려놓고 늘 준비해 두고 있는 듯싶은 소주 한 병을 꺼내놓았다. 이제 저 술을 마시면 그는 또 구들바닥에 배설물을 토해 낼 것이고 엉엉 통곡할 것이다. 그 다음엔 벌거벗고 미령이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또 한 번의 죄악이 악순환을 거듭할 것이고……
도망쳐야 돼! 도망치라고!
마음의 호소와는 달리 그의 육신은 이미 신을 벗고 구들로 올라가 술상을 가운데 하고 그녀와 마주앉는다.
“드세요.”
미령은 한마디 권하고는 술잔을 들고 마셨다. 그리고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북어 한 조박을 찢어 입 안에 넣고 질근질근 씹어댔다. 종철이도 잔을 들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하는 대로 씽긋 웃으며 북어조박을 입 안에 넣고 질근질근 씹어댔다.
그녀는 왜 내 이름이며 나이며 내력이며 출신이며 직업을 묻지 않을까? 개인적인 그런 신상내용들이 과연 좌파나 우파를 가르는 데만 필요한 것일까? 그런 것들 때문에 종철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것들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은 변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종철의 그런 신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그와의 하룻밤의 정사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돈을 원하는 창녀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녀도 나처럼 권태와 허탈에서 해탈하고 싶은 걸까? 남녀의 성관계를 해탈의 돌파구로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여기 이 〈거지의 거리〉 서울바닥에서 이 종철이가 얻을 수 있는 건 사상도 신념도 아닌 한낱 여자의 풍성한 몸뚱어리 하나뿐이란 말인가!
향란은 이젠 방 안에까지 들어와 문어귀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지금 양심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양심이 안주할 곳이라고는 없으니까요.
향란을 향해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종철 씬 지금 양심을 현실에 팔아먹고 있어요!
향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종철은 분명 들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침묵만 무겁게 거느린 채 술을 마셨다.
한 병을 비우고도 내색이 없다. 또 한 병을 땄다. 그 병마저 비웠다. 알코올을 빌리지 않고는 그들 두 사람은 마주앉아 있다는 것조차 거북했다.
미령은 흐리멍덩한 눈길로 종철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종철은 자신도 인젠 토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건졌다.
그래 토해야지. 토하고 울고……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알코올은 목구멍까지 들어찼는데도 토해지지 않는다. 만주 땅에 두고 온 향란이가 기억의 언덕에 서서 떠나지 않고 서성거렸고 이북 땅에 묻어 버리고 온 포부가 가슴속에서 부활하며 꿈틀거렸다.
“술 한 병 더 없습니까?”
인제는 술병 채로 거꾸로 들고 꿀떡꿀떡 삼켰다.
아직도 토하지 않고 울지 않을 것인가. 미령이가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그는 자신을 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아무리 강요해도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해지기만 하니 이상한 일이다.
어느 순간 미령은 말없이 술상을 한쪽으로 밀어놓더니 구석에 둘둘 말아놓았던 이불을 풀어서 방구들에 편다. 그녀의 손에서 데굴데굴 풀려나가며 구들 위에 깔리는 이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이제 자신의 나신과 미령의 나신이 저 위에 눕혀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건지며 정신이 어렴풋해지기 시작했다. 냇물처럼, 가을하늘처럼 투명하고 맑던 의식이 꺼져가는 촛불처럼 가물거렸다. 향란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미령의 옆에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서서히 사라져 버렸다. 부서지는 은색 달빛 아래 반짝거리며 흘러가던 은파강 물결처럼, 그 기슭의 푸른 잔디 위에는 아직도 향란이와 그가 남긴 사랑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목이 마르고 두통이 발작하고 가슴이 쓰려서 일어났다.
미령은 오늘은 커다란 엉덩이를 드러낸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하얀 요가 저 골목길에 버려졌던 구정물 같은 분비물로 더렵혀진 걸 보고 종철은 그제야 갑자기 구토가 발작했다. 부랴부랴 옷가지를 주워 입고 판잣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말 한마디 없이 오불꼬불한 골목길을 빠져 언덕 아래 큰 거리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가 이따위 추접스러운 짓을 하고 향란 씰 무슨 얼굴로 대한다는 거지.
후회와 자책을 거듭하며 더러운 오물이 지저분한 골목길을 투덕투덕 달려갔다.
향란 씨, 우린 언제야 다시 만날 수 있습니까?
두 눈에서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모든 것은, 모든 전도와 이상과 희망은 지주라는 신분 하나 때문에 망했다. 게다가 향란이까지 그의 곁에 없다. 세상은 너무나 암담하다. 숨 막히다.
전차를 타고 아현동 하숙방으로 돌아온 그는 이튿날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편벽한 아현동 하숙집골목에까지 뒤숭숭한 소문들이 돌았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던 차에 마침 제자 한 사람이 종철을 찾아왔다.
“선생님, 오늘 미 군정청 앞에서 데모한답니다.”
“뭐라고, 군정청 앞에서?”
그러잖아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오늘까지 미령이네 집을 찾아 갈 수도 없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향란 씨를 배반하는,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그만 두어야 한다. 다시는 미령이네 집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두 번씩이나 비겁하게 도망친, 술기운이 아니고는 남자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나를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다. 찾고 싶어도 찾을 길이 없을 터이고.
“그래 데모는 어느 단체에서 조직한 거라던?”
미 군정청 앞에서 벌어지는 데모라면 묻지 않아도 좌익의 소행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전평과 전농에서 대중조직을 발동한 거랍니다.”
“그럴 테지.”
“선생님도 데모에 참가하실 건가요? 학생들도 참가한다던 데요.”
“참가하구 말구. 대중운동인데, 식량위기를 초래한 게 누구 탓인데. 미 군정청의 실책 때문이 아니겠니.”
“그래도 좌익운동에 참가하면 탄압이 따를 건데요.”
“정의란 워낙 탄압 속에서 검증되는 거란다. 탄압을 무서워하면 정의를 실현할 수 없지.”
종철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부르쥐었다. 고요하게 잠자던 피가 가슴속에서 끓어 번지기 시작했다. 이 땅에 빈부의 격차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면 미군정당국의 탄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는 아침식사도 포기하고 하숙을 뛰쳐나갔다.
전차를 타고 곧장 종로로 향했다.
미 군정청 앞 광장은 벌써 데모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장쾌하고 비장한, 군중의 격앙된 표정을 보자 종철도 흥분되었다. 그는 자신은 타고난 사회 활동가, 혁명가의 기질을 소유한 체질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이런 기세라면 뭔가가 이루어질 듯도 싶었다. 노동자, 농민, 실업자, 학생…… 여러 계층의 군중들로 이루어진 데모대는 머리에 구호를 써 붙인 띠를 두르고 플래카드를 내걸고는 목이 터지라고 구호를 불러댔다.
종철이도 데모군중 속에 끼어들어 그들이 외치는 구호에 합세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쌀을 달라!
쌀 공출을 폐지하라!
북한에서와 같은 토지개혁을 실시하라!
모든 정권은 인민위원회에로 넘기라!
식민지교육을 반대한다!
수감 중인 애국자들을 석방하라!
테러를 배격한다!
친일파를 타도하라!
종철은 구호를 외치면서 속으로 어쩌면 자신의 이상이었던 사회주의 운동이 이남 땅에서 성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권이 인민위원회의 수중에 넘어오면 이 땅의 주인은 인민대중이 될 것이며 좌익사회주의 운동도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를 따라온 제자는 어느 틈엔가 시위대에서 빠져나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러나 대다수의 데모군중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데모는 미 군정청이 투입한 경찰병력과 국방경비대의 합동진압으로 해산되었다. 종철은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맨 나중에야 자리를 떴다. 그러나 추격하는 경찰의 곤봉에 뒤통수를 맞고 피를 흘리며 콘크리트바닥에 쓰러졌다. 두 명의 경찰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를 개처럼 질질 끌어다가 닭장차에 처넣었다. 감방 안은 잡혀 들어온 수감자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이튿날 아침 종철은 심문실로 불려 나갔다.
견고한 콘크리트구조물로 된 방인데 안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고 자그마한 쇠살창 하나와 낡은 테이블 그리고 천장의 희미한 백열등이 전부였다. 테이블 앞에는 이마에 흉터가 생긴 사팔뜨기 경찰관이 앉아 있고 그 옆에는 경관 한 명이 시립해 있었다. 어두컴컴한 취조실 안은 살벌한 분위기어서 저도 모르게 전신이 으스스 떨렸다.
심문관은 한식경이나 말없이 종철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개자식! 뭘 믿고 감히 미군정과 도전하겠다는 거냐! 죽여 버리기 전에 어서 주모자가 누군지 토설해!”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다니. 네놈은 끝까지 데모를 한 악질 빨갱이 놈이잖아!”
주먹으로 테이블을 꽝! 내리쳤다. 기록용 노트와 만년필이 한 뼘 정도 풀쩍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며 뿌연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먼지는 쇠살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에 반사되며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렇소. 내가 주모자요. 그러니 어쩔 테요? 어디 당신들 맘대로 해보시구려. 배고픈 사람이 쌀을 달라는 것도 죄요.”
“이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시비를 걸고 드는 거냐?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알게 뭐요. 다만 수법이 지독한 걸 보니 일제시대 고등계형사깨나 했음 직 하구만.”
“그래 잘 봤다. 내가 바로 이 형무소의 이름난 강 형사다. 내 손에 걸려들면 뼈도 추리지 못한다는 소문도 들었을 테지. 오늘 내 맛을 좀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구나. 이놈한테 맛을 좀 보여 주거라.”
“옛!”
옆에 섰던, 곰처럼 미련하게 생긴 경찰이 허리를 굽실하더니 손에 쥐고 있던 각목으로 주저 없이 종철의 어깨를 겨누고 내리쳤다.
종철은 헉!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푹 꼬꾸라졌다. 그러자 이어 몽둥이가 그의 등이며 엉덩이며 옆구리에 연거푸 떨어졌다.
“그만 해라. 어떠냐? 인젠 좀 정신이 드느냐? 뭐 모든 정권을 인민위원회에로 넘기라고. 북조선식의 토지개혁을 하라고. 미치고 창 빠진 놈? 넌 빨갱이 놈이 분명해. 자백하기 전에는 이 감방에서 살아서 나갈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 하루 동안 생각할 기회를 줄 테니 네놈 목숨을 스스로 결정해라. 끌어내가!”
삽시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종철은 걸음조차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그러자 꺽다리 경관이 군홧발로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내질렀다. 순간 숨이 꺽 막혔다. 종철은 콘크리트바닥에서 사색이 된 채 옆구리를 부둥켜안고 이리저리 뒹굴었다.
“걷지 못하겠으면 기어나가! 개새끼!”
종철은 벽을 짚고서야 간신히 취조실을 나왔다.
억울했다. 내가 빨갱이라니? 북에서는 나를 지주자식이라고 반동취급을 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는 건 친일파의 수중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것이다. 토지개혁은 농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난 그저 그들을 대신하여 구호 몇 마디를 부른 것뿐이 아닌가. 그리고 왜놈의 주구가 무슨 자격으로 죄 없는 나를 취조하고 구타한단 말인가. 정말 억울했다.
홧김에 자신을 주모자라고 대답했던 일도 후회되었다. 사실 그는 이번 데모의 주모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전평이나 전농이라는 이름쯤은 누구나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다. 아무튼 잘못 걸려들었다 싶었다. 그러나 다른 출로도 없었으므로 모든 걸 운명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종철은 다시 취조실로 호명 받았다. 그는 될 대로 되라고 체념했다. 그러나 그는 취조실이 아닌 사무실로 불려갔다.
“네놈은 운수가 좋은 줄을 알거라. 소장님 덕분에 특별사면 되어 풀려나게 되었으니……”
뜻밖에도 취조관은 그의 손목에서 쇠고랑까지 벗겨주며 석방되었으니 나가라고 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서 있는데 문어귀에 섰던 경찰이 그의 등을 복도로 떠밀었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지? 빨갱이라고 벼르더니! 소장이라는 작자는 또 누군데?
의혹을 풀지 못한 채 엉거주춤 형무소 밖으로 나서던 그는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낯익은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설미령이였다. 까만 투피스정장을 한 그녀는 대문 밖으로 나오는 그를 보자 먼저 알은 체 했다.
“나오셨어요.”
별로 반기는 기색도 아니다. 담담한 표정일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여기 갇힌 건 어떻게 알고?”
“나오셨으면 됐어요. 그런 것들은 알아서 뭐하려고요. 어서 집에 가요. 하룻밤 사이에 십년은 늙어 보여요.”
미령은 종철의 거처가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전차에 올라 곧장 해방촌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역시 아무 말도 없이 술상을 차렸다.
“선생님, 제 신분이 궁금하시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오늘로서 저의 이 판잣집생활도 마지막이에요.”
미령은 가벼운 한숨을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판잣집이 마지막이라니요?”
“아버지하고 그렇게 흥정을 했거든요.”
“도대체 무슨 소린지?”
“선생님을 구해주셨다는 그 사람이 바로 저의 아버지에요.”
“네? 그 소장이라는 분 말인가요!”
“네.”
“무슨 소장이기에 경찰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계신 거죠?”
“형무소 소장이에요. 일제 때 만주군 소위를 지내다가 해방이 되니 이남 땅으로 귀국하여 경찰로 탈바꿈한거죠.”
“그런데 흥정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전 한때는 왜놈을 섬기다가 한때는 되놈을 섬기고 또 한때는 오랑캐를 섬기다가 지금은 미군을 섬기는 아버지가 싫어서 가출하여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진 제가 아무 남자하고나 이불 속에 든다고 걱정인가 봐요. 당신은 신념도 없이 먹이만 주면 주인을 가리지 않고 꼬리질을 하면서 딸이 정조를 지키지 못하고 아무 남자하고나 놀아나는 걸 걱정해요. 우습지 않아요.”
미령은 헛웃음을 웃고는 또 술 한 잔을 마셨다.
“그래서요?”
종철은 자꾸만 하회가 궁금해 술 마시는 것조차 잊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제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선생님께서 경찰에 끌려가는 걸 목격했어요. 그래서 아버지 보고 대학선배이니 구해달라고 청을 넣었죠. 가출해서는 처음으로 아버질 만난 거예요. 그랬더니 아버진 그 조건으로 저더러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선생님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싫지만 수락했어요.”
“미령 씨!”
종철은 목이 메어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뚱이를 바치고도 종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조까지 희생시킨 것이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그녀의 진정에 보답해야 할 것인가. 그녀에게서 진 인정의 빚을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가. 향란에게 진 양심의 빚은 또 무엇으로 갚아야 하고.
종철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부지런히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기를 위해서 떠나야 하는, 판잣집에서의 그녀의 마지막 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알고 보니 이 판잣집은 비록 더럽고 악취 풍기고 허름하고 비좁았지만 미령이가 아버지의 오욕으로 얼룩진 수치스러운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깨끗한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겨우 두 번 만난 남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만의 가치 있는 공간을 버리고 종철을 구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당연한 대가인 돈 한 푼, 사랑 한 조각 구걸하지 않는다.
그러자 이 집에서 두 번이나 도망쳤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 집은 더럽고 비좁은 판잣집이기 전에 자유와 순결을 지향하는 미령의 유일한 인생통로였다. 이제 그 통로는 종철이로 하여 두절되었다. 미령은 또다시 구속의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내가 미령 씰 위해서 할 만한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나 때문에 미령 씨가 상실한 공간을 내가 무엇으로 보상해 드릴 수 있을까요?”
“보상이라고요?”
벌써 그녀의 두 눈은 흐리멍덩하다. 오늘 따라 두툼한 입술이며 둥실한 코며 커다란 눈이 도리어 천진난만해 보인다.
“보상을 원했다면…… 미령이가 선생님께 무엇을 팔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전 선생님께 양심을 판적도 정을 판적도 없어요. 그저 아버지처럼 살면서 아버질 증오하고 괴롭히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버지의 양심에 아버지의 영혼에 독약이 되고 싶었어요.”
종철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미령은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가 너무 무정했습니다. 미령 씬 자신의 모든 것을 사심 없이 나에게 열어주었는데…… 내 이름은 김민혁이고 본명은 한종철입니다. 아버진 대지주이고……”
“네? 선생님의 부친께서 대지주셨다고요?”
좀해서 놀라지 않던 미령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주라는 신분의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놀라게 했을까?
“지주의 자제분이신 선생님께서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우익이 아닌 좌익운동에 참가하시다니요?”
아, 결국은 그것이었다. 지주는 우익, 노동자, 농민은 좌익이라는 계급논리에 따른 이 시대의 습관적 인식!
“난 아버지가 싫습니다. 미령 씨가 아버지를 미워하듯이 말입니다.”
“선생님과 저는 불효자이고 이단자이고 반항아예요. 그런 비슷한 운명 때문에 우리가 무난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요. 전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이 판잣집에서 내 멋대로 살 거예요. 혼탁한 사회가 아버질 용서하더라도 나만은 자신의 타락으로 아버질 심판하고 양심을 고문할거예요. 하하하……”
미령은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자학이 다른 사람에 대한 학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우스운 모양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악용하여 아버지를 증오하려는 그녀의 몸부림이 잔인하다고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종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조실에서 얻어맞은 상처가 욱신욱신 쑤셔났다. 집에 가서 편안히 자고 싶었다. 오늘만은 술기운을 빌어 그녀와 도둑잠을 자고 뺑소니치는 비굴한 행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그녀를 인간으로 대하고 싶었다. 훔쳐 먹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들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저 때문에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부담?
그녀는 나에게 인정 빛 같은 것을 상기시키려는 건가? 그렇다면 당연히 향란 씨한테 진 빚부터 청산해야 될 것이다. 사랑과 우정은 좌파나 우파처럼 일종의 정신적 부담으로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는 해방촌언덕을 비틀비틀 내려왔다. 전차를 타고 하숙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신도 벗지 못한 채 구들 위에 쓰러졌다.
“.저 때문에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자꾸만 미령의 말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팔소매에 동동 매달리던 향란의 간청이 화음처럼 들렸다.
난 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을까!
종철은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38선아, 제발 나와 향란 씨의 길을 막지 말아다오!
신념을 잃었는데 향란이마저 잃으면 나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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