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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5.31 존재는 눈물 흘린다-공지영 by 아데라

존재는 눈물 흘린다-공지영

 

(1)

나는 해고되었다. 한달 전에 이미 그 통지를 받았고 책상은 지난주에 정리되었다. 모든 것

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깊어가는 가을보다 먼저 깊디깊이, 그래프로 떨어져내리는 경기 탓이 었다. 회사는 브랜드 네임을 좀더 이국적인 언어로 바꾸고 그에 걸맞은 이미지의 옷들을 생 산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금속 광택이 나는 꽃핀을 꽂은 신세대들이 짧은 치마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고 대거 회사 문으로 입장했고 파마를 자주 해서 머리가 푸석해진 우리들은 반대편 문으로 이제 나가야 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신선한 감각을 생명으로 하는 이 바닥에서 사실 서른이면 구세대였고, 우리는 이미 촉탁 디자이너라는 이상한 이름을 달고 있었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해고가 아니라 촉탁 해지였다. 경리과에 가서 한 달에서 조금 모자라는 날짜가 적힌 지불명세서를 냈다. 상고를 갓 졸업한 듯이 보이는 머리가 길다란 소녀가 내게 지불할 지폐를 봉투에 넣고 동전들을 세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입사했으니 나는 십년에서 조금 모자란 날들을 이 회사에서 보낸 셈이었고, 그런 지난날들이 소녀가 세는 동전 소리로 딸그랑딸그랑 마감을 알리고 있었다. 십년…… 그 시간 동안 가을을 알리는 바바리 직물들이 울 개버딘에서 씰크로, 씰크에서 금속 광택이 번쩍이는 천으로 달라졌고, 내가 처음 디자인한 옷에 붙어 있던 ‘신도’라는 이름은 이제 ‘끄뛰베’라는 외국말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동전을 세고 있는 소녀를 될 수 있는 한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거울도 보고 있지 않으면서 내가 내 표정을 의식했던 것은 아마 그때 내 가슴으로 어떤 통증이 지나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이 소녀를 질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그건 아직 파마약 한번 묻히지 않은 것 같은 그 소녀의 싱싱한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을 하는 그녀의 직업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입사하던 때의 설렘, 내 힘으로 돈을 번다는 일의 뿌듯함, 패션 디자이너라는 이름이 주는 약간의 오만함 같은 것들은 이제 거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소녀만한 나이 때 나는 열렬하게 생각하곤 했다. 창의적인 직업을 가지고 싶어요…… 그런데 이제 마지막 월급봉투를 기다리고 있는 나는 껍질 같았다. 내 속에서 나를 나답게 해주던 모든 촉촉함 같은 것들이 창의력이라는 이름으로 소진돼버린 느낌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해외출장을 다니고 세계의 유수한 패션잡지를 들여다보아도 유행은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었다. 조금 더 속도가 빠르도록 정해져 있는 공을 따라 달려가는 사람처럼 나는 언제나 숨이 찼다. 하 지만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만 뛰지. 공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버렸

어. 이제는 날개가 달린 사람이 필요해.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만 멍해져버린 기분이었다.

소녀가 동전까지 정확히 센 봉투를 내밀었다. 모든 끈이 떨어져나가고 이 세상에 혼자 남겨

진 것 같은 허탈감이 휘익 나의 내부를 핥고 지나갔다. 이혼을 하고 나서도 이토록이나 혼

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나였다. 나는 해고라는 이름으로 달려든 이 소속감 부재의 상태를

느끼면서 봉투를 받아 건성으로 돈을 세고 있었다. 소녀가 언뜻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안면이 익은 그녀가 가끔 오실 거죠, 라거나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묻는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잠시 했다. 그러나 그녀는 컴퓨터에서 뽑아져나온 영수증을 부욱 잘라서 내게 내밀고는 곧바로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던 다른 사람의 지불명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말을 꺼낼 뻔한 것은 나였다. 가끔 올게요, 하고. 하지만 아마 가끔이라도 이제 이곳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공은 하늘로 부웅 떠버렸으니까 말이다. 나는 날아가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등에 업힌 아이도 있고 슬그머니 다가와 내 옷자락에 말년을 의탁하는 친정어머니가 있고 그리고 빈 껍질만 딱딱하게 굳은 서른세살의 나이가 있다. ……고마와요. 나는 소녀에게 말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소녀가 나를 바라보며 언뜻 웃었다.

 

(2)

나는 경리과를 지나 로비로 나왔다. 점심을 먹을 시간은 지났고 저녁을 하기에는 아직 이

른 오후였다. 동전이 짤랑거리는 봉투가 바바리 주머니에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문득 나는

이 바바리가 이년 전 그와 처음 데이트를 시작하던 날 입은 옷이라는 걸 깨달았다. 만나기

로 한 화랑이 문을 닫은 바람에 나는 길거리에 서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온 그는

나를 한번 휘익 돌아보더니 가볍게 내 허리에 손을 얹고, 이 바바리 참 좋은데, 했던 것이

다. 내가 디자인한 거야, 이 옷을 사려고 매장마다 여자들이 줄을 섰다구, 나는 말했었다. 그무렵 내가 더이상 디자인을 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보았을까.

그가 떠나고 아주 연락이 끊어진 후에도 나는 가끔 그의 회사에 전화를 걸곤 했다. 아주

오래 연락을 끊었던 철없는 후배처럼 한껏 쾌활하게 목소리를 과장하면서…… 나는 묻곤 했다. 그러면 전화기 저쪽에서, 아마도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가 나와 통화하던 그 수화기를 들고 있을 남자는 잠시 곤혹스럽다는 듯 침묵을 지킨 후에, 모르시는군요, 그분은 지금 페루지사에 계신데요, 했다. 가끔 남자는 그쪽 전화번호를 가르쳐드릴까요 묻기도 했다. 나는 덤덤한 후배처럼 아니에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런 날 오후면 나는 내내 시큰거리는 사랑니와 싸워야 했다. 그래서 페루는 내 치통이었다. 진통제를 두 시간 간격으로 네 알씩 먹고도 나는 그 치통을 이겨내지 못했다.

꽉 찬 가을이 유리문 저쪽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굵다란 은행나무들이 이파리를 떨군 거

리는 노란 카펫이 깔린 것처럼 보였다. 이른 오후. 이제 아무 할 일도 없이 나는 서 있다.

보통 때 같으면 나는 이 자리에 이렇게 무의미하게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길거리

나 전철 안에서나 사람들의 옷을 관찰했고 그들의 취향이 미묘한 속도로 변해가는 것을 바

라보곤 했다. 때로 그들은 유행보다 앞서가기도 하고 우리가 판매전략을 위해 내세운 유행

을 힘겹게 따라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계절은 내게 짧아지는 스커트와 함께 왔다가 넓어지

는 바지통과 함께 갔다. 흐르는 강물처럼이 아니라 쏟아져내리는 폭포처럼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은행이파리들이 소복소복 떨어져 앉은 길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내 생애 처음 맞는 어떤 가을 같았다. 은행잎은 이제 계절의 변화를 선도하는 색채

로서가 아니라 그저 은행잎이었던 것이다. 나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 포스터를 구경하는 것

처럼 어쩌면 편안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아까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수억년 전쯤

에 깊은 사랑을 나누던 남자와 우연히 눈이 맞은 것처럼 나는 거역할 수 없는 그 힘에 이끌려 시선을 돌렸다. 거리에 줄지어선 비슷비슷한 은행나무 중 유독 한 그루가 눈길을 끌고

있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 은행나무에서 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십년 만이야, 이제

야 너는 나를 알아보기 시작하는구나, 여기 서서 십년 동안 너를 바라보고 있던 나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정말 이상하게도 바람도 없는 한길에서 그 은행나무가 갑자기 낙엽

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돌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 나무가 떨구는 노란빛의 축포를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포스터의 정물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그길가에 서 있던 나무들 중, 정말로 내게 선물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유독 그 나무만이 무수한 이파리를 떨구었다는 걸 안 것은 누군가 유리문 앞에서 툭, 하고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고 그가 아, 미안합, 이란 말도 다 삼키지 못하고 밭은걸음으로 유리문을 열었을 때였다. 유리창 밖에서 저 혼자 익어가고 있던 가을이 쌉쌀한 바람과 함께 밀려들었을 때 나는 해고를 당해 아무리 정신이 멍하다고 해도 은행나무와 눈이 맞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비로소 내 자신에게 말해주었다.

 

(3)

가을이었고, 가을이어서 잎을 떨어뜨려버리는 일은 인류가 탄생하기 전부터 은행나무가

한 일이었다. 은행나무는 공룡과 함께 산 적도 있는 수종(樹種)이었다. 그때 무리에서 떨

어져나와 해고당한 공룡과 눈이 마주친 은행나무가 그를 위로해주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맨

처음 이파리를 떨구기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어두운

통로로 들어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나에게는 삶이 언제나 강파른 비탈길 같았다. 단지 한 달을 살아갈 뿐인 돈을 받는 일의

무서움을 내가 알게 된 것은 정확히는 이혼 후의 일이었다. 아이는 자라고 있었고 이 자리

에서 쫓겨나게 되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계절은 일년에 네 번뿐이고 사람들은 그저 비슷한 종류의 옷들을 사 입을 뿐이었다.

발랄하고 깜찍한 창의력을 가진 새로운 디자이너들은 한 해에 몇만 명씩이나 쏟아지고 있었다. 서른이 넘은 이후, 언제나 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식당의 탁자에서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내가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나는 어디로 가나. 그 무서움이 너무 커서 나는 한번도 내가 해고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괜찮아 모든 건 잘될 거야 그저 잘될 거라구. 나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세 개피 남은 성냥에

하나씩 불을 밝히면서 내 손에 남은 개피 수를 절대로, 세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오래 이 회사에 남고 싶었다. 가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손

가락처럼 쑤욱 올라올 때도 있었지만 노후 연금과 붓고 있는 적금을 헤아려보면 그래도 이

회사의 그늘에 있는 게 낫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타협하면서 늙어갈 거야. 재능은 바닥나고 눈은 무디어가니 점점 눈치만 늘게 되겠지. 그래도 버티겠어. 젊은 소비자들의 구미를 맞추고 싶어서 안달이나 하면서…… 내 아이의 유치원 등록금과 어머니의 치과 비용을 네가잠시 대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몇 년 가지 않아 너도 결국 생각하게 될 거야. 사랑은 식고, 우리가 서로를 눈곱 낀 눈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무렵, 너는 말할지도 몰라.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어…… 훌훌 벗어버리고 혼자가 되고 싶어…… 나는 언제나 빠르게 그렇게 말했고 우리는 자주 그렇게 다투곤 했다. 나는 결코 그를 내 생애의 계획에 끼워주지 않았다. 이미 나는 세 식구의 가장이었다. 그 역시 삼 년이 넘도록 적금을 부어도 이년마다 돌아오는 전셋값 한번 올려주기 힘든 사람이었으니 내 말이 별로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도 고향에서 그의 월급날을 기다리는 노모와 남동생들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페루 이야기를 꺼냈을 때 페루가 뭐야? 나는 물었었다. 그리고는 그가 마치 마법의 나라로 도망이라도 치자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잠시의 여행도 아니고 삼년 동안의 지사 근무라니…… 그래, 백 번을 양보해서 너와 결혼하고 나의 아이까지 달고 마치 우리가 처음부터 세 식구였던 것처럼 시치미를 뗀 채로 그곳으로 떠난다고 하자. 너는 너의 일을 하지만 나는 거기서 무엇을 할까. 영어를 배우러 페루의 학원에 다니는 것도 우습고, 나중에 당이라도 차릴 요량으로 거기서 이딸리아 음식을 배우러 다닐 수도 없잖아. 너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가 교대로 편지를…… 띄우겠지, 잘들 있는지 자나깨나 걱정이구나,로 시작해서 결국은 돈을 보내달라는 이야기로 끝나는 그런 편지를. 삼 년을 쉬고 나면 디자이너로서의 내 생명은 끝이야. 감각이 완전히 뒤떨어져버린다구. 그렇게 남편을 따라갔다가 돌아와서 집에서 머리만 비벼대는 선배들을 한두 명 본 것도 아니고…… 앞서 실패한 이들을 바라보면서 그걸 반복한다는 건 눈을 뜨고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이지…… 페루라니, 페루는 너무나 먼 나라야. 그는 내가 담배 한대를 다 피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빨리 늙어버릴 거야. 첫 연금을 타면 제일 먼저 흔들의자를 사겠어. 그것을 베란다에

내다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을 거야.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흐르는지를 바라보면서 내내 거

기 앉아 있을 거야…… 아마 생각하겠지, 이렇게 허망해져버릴 것을 왜 그렇게 볼이 빨개지

도록 뛰어다녔을까, 나는 거기 앉아서 내 젊은 날의 욕망을 비웃을 거야. 하지만 내게 그런

시간이 남아 있을 거라는 꿈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욕망을 지금은 소중히 여기겠어. 적어

도 실장 자리에는 오를 거고, 적어도 내 이름으로 된 브랜드 하나쯤은 차리고 싶다구.

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고 그가 말했다. 젊음과 시간, 그리고 아마도

사랑까지도…… 기회는 결코 여러 번 오는 것이 아닌데, 그걸 놓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우리는 좀더 깊은 눈을 뜨고 그것들을 천천히 하나씩 곱게 땋아내려야 해. 그게 사는 거야.

아주 작은 행복 하나를 부여잡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는 줄 너는 니? 진짜 허망한 건 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휩쓸려가버리는 거라구. 너는 늙어서

흔들의자를 내다놓고 앉아 그걸 생각하며 울게 될 거야.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창 밖

을 보며 딴전을 피웠다. 나는 무능한 아버지의 둘째딸이었고 그것이 주는 삶의 강파름을 이

미 겪을 대로 겪은 뒤였으니까. 그가 총각이었고 나는 두 살배기 애가 딸린 이혼녀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로막을 우리의 사회적 결합 때문에 겁이 나서가 결코 아니라 그냥 그가

태평하게 먼 나라로 가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미웠다. 마치 내가 남편과 결혼할 때 그

랬던 것처럼, 열정 하나로, 다만 사랑의 이름으로,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젊고 그래서 노력

하면 안 될 것 없다는 그런 순진한 얼굴을 하고 달려드는 그가 어쩌면 나는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생애는 많은 상처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하여 스웨덴에서 자란 아이들이 모두

행복하지 않듯이 상처의 빛깔 같은 것은 돈의 액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지니고 있는

상처는 사람의 얼굴 모양새만큼 다른 것이라는 것을 이제 알고 있지만, 나는 언제나 그에게

그런 태도를 취했다. 니가 돈만 아는 그런 얼굴을 하는 게 나는 싫어, 그가 말했다. 돈만 아

는 것은 물론 싫은 일이었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러나 기가 막힐

일은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분명 있기는 했지만, 그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4)

나는 일찍이 그런 것들을 깨달으며 자랐고 생은 내가 혹시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할

까봐 여러 번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남편과 나의 결혼 생활도 결국 돈 계산으로 마감을

하고 말았으니까. 전셋집을 얻을 수 있는 위자료라는 이름의 돈과 양육비를 놓고 우리는 치

열하게 싸웠다. 그 싸움은 우리가 아이를 놓고 과연 이혼을 해야느냐 마느냐보다 더 노골적

이고 더 심각했다. 나는 남편이 그토록 돈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 줄을 처음 알았다. 이

혼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어쩌면 남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을 것이다. 우리 남편은 돈에

대해선 원래 무심한 사람이야. 그러므로 여행 같은 것, 산다는 것은 세월과 사랑과 희망들을 곱게 땋아내리는 거라는 마음뿐인 남자와 페루로 가는 일 같은 건 내게는 돈을 벌고 또 벌고 또 벌어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을 은백의 나이에나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었다. 감상으로, 혹은 연민으로 일을 저지르기에는 나는 이미 많은 나이를 먹어버렸다.

대학 졸업 무렵의 깊은 실연의 상처 때문에 오 년을 해외 지사에서 자신의 젊은 시간들을

곱씹으며 보냈다고, 그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 앉는 낡은 술집에서 오래오래 수줍고 서글프

게 고백했을 때, 나는 사실은 하품이 하고 싶었었다. 그 여자하고 결혼했더라면 너는 아마도 그 상처를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여자와 헤어진 자유로움 때문에 오 년을 떠돌았겠지, 춤이라도 추면서 뛰어다녔을지도 몰라. 사랑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 그건 그런 거야. 영원은, 맹세하는 찰나에만 완성될 뿐이지. 나는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바바리에 언뜻 술을 쏟을 뻔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그를 보내고 나서도 나는 기특하게도 한참 동안 담담했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슬픈 거야. 그 부피만큼의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 비로소 이 상을 다시 보는 거라구. 너만 슬픈 게 아니라…… 아무도 상대방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그것을 닦아내줄 수는 있어. 우리 생에서 필요한 것은 다만 그 눈물을 서로 닦아줄 사람일뿐이니까. 네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해.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나던 날 그는 내 차에 앉아 그렇게 말했다. 니 눈물을 닦아주기에 나는 너무 해야 할 일이 많아, 나는 말해버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겁이 났던 것일까, 때로는 나도 내가 한번 가졌던 그 헛된 유혹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와 함께라면, 아마 행복 같은 걸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

니었다. 약속한 까페 입구로 들어서다가 문득 신문을 꼼꼼히 보고 앉아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고는, 그 열중해 있는 자세의 신중함이 보기 좋다, 는 생각에 가슴이 얼얼해질 때면 나는

잠깐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망을…… 그런 때 나는 다시 그

까페를 나와 먼길을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고는 뺨이 찬바람에 얼얼해질 때쯤 약속된 시간

보다 아주 늦게 그의 앞에 나타나 말했었다. 아주 바쁜 일이 있었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다니까.

나는 계단을 내려서는 동안 이미 어둠에 익어버린 눈으로 차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문득

아이를 보고 있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아주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동대문이나 광장 시장에 나가서 부자재로 쓰일 단추나 특이한 모양의 지퍼나 레이스를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화점에 나가서 우리 브랜드의 어떤 옷들이 어떤 계층에게 어떤 선호도로 팔리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는 직장을 위해서도 아니고 아이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머니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나를 위해 쓰고 싶다, 고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나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 것이었다. 잠들기 전에 할머니에게 애초부터 없던 레고 기차 바퀴 하나가 없어졌다고 떼를 쓸 것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달래는 할머니에게 결국은 엉덩이를 한대 얻어맞을 것이고, 엄마가올 때까지 절대로 자지 않겠다고 골목이 보이는 싸늘한 베란다에 나와 고집스럽게 서 있을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내리덮이는 눈꺼풀을 비비며 내가 없는 빈 침대로 기어들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이도 점차로 알게 될 것이었다. 누군가가 떠난 빈자리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언제나 제시간에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고 싶은 어미의 마음과 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아무리 허공에서 만난다 해도 이 세상에는 기필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5)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해고 때문이었을까, 예정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나는

당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 지하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핸드폰은 붉은 빛을 반짝이며 “노 써비스 에어리어”라는 글씨를 반짝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지하, 이 땅 깊숙한 곳에서는 누구와도 통신할 수 없다. 지상의 전화선들과 끼리끼리 육체로 연결된 공중전화라면 몰라도 눈에 보이지 않아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이런 허황한 전파에 의지하는 통신 따위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기는 이 지구상 어디엘 간다 해도 이제 내 삶은 “노 써비스 에어리어”였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러자 뜻

밖에도 제일 먼저 나를 스쳐간 생각은 만일 빠른 시간 내에 다른 곳에 취직자리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남대문 시장에 점포라도 열어서 내 브랜드를 만들거나, 그도 아니면 돈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버리지 않는다면 이 핸드폰을 제일 먼저 팔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차가 보였고 그 다음은 저 차의 순서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면 화장대

서랍 깊숙이 넣어둔 아이의 돌팔찌와 돌반지의 차례가 올 것이었다. 방 두 칸인 집을 아마

도 방 한 칸인 집으로 옮기게 될 것이고, 그도 아니면 늙은 어머니의 눈처럼 침침한 반지하

깊숙이 처박히게 될 것이었다. 그가 아는 것은 나의 핸드폰 번호뿐이므로 아마도 핸드폰을

먼저 팔든 반지하로 가는 것이 먼저이든 그와 나와 이 지상에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통신

부호는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었다. 그와 나를 연결해주려고 한때 애썼던 인생은 그로부터

언제까지나 노 써비스라는 붉은 빛을 찬란하게 띠게 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리고도 희망이 없을 때는 아마도 나, 를 팔게, 되, 겠, 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제껏 나는 나를

팔아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것, 좀더 눈에 띄는 것, 좀더 소비자들의 기호를 만족시켜주는 것, 그런 옷들을 만

들어내기 위해 나는 세상에 태어나 알아낸 가지가지의 빛깔과 도형들을 생각해내야 했다.

처음에 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이제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나를 바쳤다. 좋은 영화를 볼 때도 의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 블라우스 씸플해서 좋던데, 가 어느덧 내 영화평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에서도 나는 가수들의 노래가 아니라 그들의 옷차림새를 듣고 있었다. 유행을 앞서 가는 그들의 모양을 놓치지 말고 감지해내야 했다. 나는 살아가기 위해 디자이너가 되었는데, 이제 디자이너의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살고 있었다. 새로운 것, 좀더 새로운 것, 이라는 말은 이제 하도 들어서 나에게는 그처럼 낡은 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노력했고 몇 년 동안은 제일 먼저 매진되어 결코 할인매장으로 나가지 않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회사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다가와서 이봐, 뛰는 것을 멈추지, 공은 이미 하늘로 날아가버렸어, 요즘 공들은 날개가 돋기도 하거든, 했을 때 모든 것은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때 어떤 반짝이는 빛이 나의 차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어서 퍽, 하는 파열음이 들렸다.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처음에

나는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빛이 다가왔고 이어 퍽, 하는 소

리가 들린 것만 같았으니까. 검은 중형차에서 어떤 남자가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나 는 남자의 차가 미끄러져 내 차와 충돌한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제 고물시장에 저 차를 내다놓아도 한 달 생활비도 제대로 쳐서 받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머리를 스쳤고, 이어 좋은 일은 한 가지씩 오지만 나쁜 일은 언제나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격언이 생각났다. 나는 천천히 차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차의 앞부분이 찌그러진 것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남자에게 얼굴을 돌렸을 때 내 얼굴은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남자가 마치 해고당한 공룡 때문에 처음으로 자신의 나뭇잎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은행나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조금 찌그러졌군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여인의 얼굴을 하고 남자가 상처 낸 내 차의 문을 열며 말

했다.

-괜찮다니까요. 문도 열리잖아요.

-바닥, 이, 미끄러웠어요.

남자는 나의 반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금 더듬으며 말했다.

-미끄러워요…… 이 놈의 바닥이 미끄러워서 저도 지금 미끄러졌거든요.

나는 하이힐을 신은 발로 바닥을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 알 수 없는 해방감이라고 할까,

지금 이 시간, 왠지 나는 한없이 너그럽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게 무슨 대수겠어

요, 그런다고 누가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괜찮다구요 괜찮아,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그렇게소리치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기도 했다.

-바쁘시다면 지금 처리를 할까요……다행히 요 앞에 제가 아는 카쎈터가 있습니다만……

남자는 어떻게 이 미안함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투로 말했다.

-바쁘지 않아요.

남자가 잠시 생각과 시간이 정지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나

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일이 언젠가 벌어졌던 것 같은…… 생각을 더듬기도 전에 남자가

말했다.

-잘됐군요. 절 따라오세요.

 

(6)

나이는 서른이 좀 넘었을까, 나는 남자의 차를 따라 지하주차장을 나왔다. 남자가 오른쪽

깜빡이를 켜면 나도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남자가 브레이크를 밟으면 나도 브레이크를 밟고

그가 다시 왼쪽 깜빡이를 켜면 나도 왼쪽 깜빡이를 켜면서 나는 남자를 따라갔다. 나의 차

는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었고 찌그러진 문짝을 단 채였다. 내가 운전을 시작한 이후 다

닌 길이 가지가지였듯이 이제 내 차에 박힌 상처 자국도 가지가지였다. 처음 매끈한 새 차

의 범퍼를 누군가 긁어놓은 것을 집 앞 골목길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밤잠을 자지 못할 정

도로 화가 났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지하주차장에서 내 차의 문짝 하나를 누군가 심하게

박아놓고 쪽지 하나 없이 사라져버린 것을 보았을 때는, 카쎈터에 차를 가져가서 돈이 많이

들어도 좋으니 새 차처럼 만들어달라고 울 듯한 얼굴로 말했었다. 그리고 연이어 다시 차가

찌그러졌다. 이번에는 카쎈터에 가지 않았다. 그저, 내 차를 박아놓고 사라진 인간이 누구인

지 모르지만 교통사고나 팍, 나서 차가 찌그러져 버려라, 혼자서 악담을 퍼붓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날이 지나고 상처는 깊어지고 많아져서 이제는 그것이 언제 어디서 긁힌 상처인 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이제는 화도 안 내고 악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날이 흐르는 동안 나도 아마 어딘가에서 남의 차를 슬며시 박아놓고 무심히 나와버렸는 지도 모른다. 그 차의 주인은 밤잠도 못 이루고 분해하면서 나를 향해 화를 내고 악담을 퍼

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실, 남자가 갑자기 속도를 높여 뒤따라오는 나를 따돌리거나

그도 아니면 노란 불에서 빨간 불로 바뀌는 아슬아슬한 사이, 붉은 신호등 앞에 어쩔 수 없

이 멈춰선 나를 두고 쌩 하니 혼자 도망쳐버린다고 해도 크게 억울할 일도 못되었다. 광화

문의 그 넓은 차도에서 차선 하나를 바꿀 때마다 행여라도 내가 따라가지 못할까봐, 열심히

깜빡이를 켜대는 것을 조금은 느긋한 기분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남자를 따라갔다.

흐린 가을날이었다. 하늘은 회색 빛으로 축축 내려앉고 있어서 노란 은행 빛들이 선명해

보였다. 아까 나와 눈이 마주친 나무를 찾아보았다. 그 나무 밑에만 은행잎이 유독 수북해서금방 찾아낼 수가 있었다. 다시 한번, 이제는 호기심으로 그 은행나무와 눈맞춰보고 싶었지만 나무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이 생에서 단 한번 주어진 기회였을 뿐이야, 라고 쌀쌀하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공연히 무안한 기분이 들어서 그 은행나무가 떨어뜨린 노란 잔해들을 바퀴로 뭉그러뜨리며 달려갔다. 가을은, 그리고 봄은 움직이는 계절이라고 그가 말했었다. 한번은 완전한 소멸을 향하여 그리고 또 한번은 충만한 푸르름을 위해서…… 그

래서 봄에는 처녀들이 가을이 되면 남자들이 흔들리는 거라고…… 이제 가을이니, 그의 마

음도 흔들리고 있을까. 엄숙한 불모의 계절이 곧 다가온다고 그는 페루에서도 생각할까. 덕

수궁 앞에는 신부들이 비슷비슷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그 곁에는 비슷비슷

한 턱시도를 입은 신랑들이 서 있었다. 어디선가 왈츠가 흘러나온다면 무도회를 열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곁에는 소풍을 나온 유치원 아이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초록과 노랑

이 섞인 풍뎅이 같은 배낭을 멘 채로, 어린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일렬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뒤에는 연한 갈색 돌담의 어깨 위로 아름답게 물든 고궁의 나무들이 갸웃 고

개를 내밀고 있었지만, 나는 또 보고 말았다. 그 뒤로 드리워진 무거운 회색 빛 하늘……

남자의 차는 덕수궁 옆 골목으로 들어서 옛 법원 자리를 지나 작은 카쎈터 앞에 멈추어

섰다. 나도 따라 멈추어 섰다.

-차가 수리되는 동안 차 한잔이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보통 이런 경우 사고를 낸 측은 돈을 지불하고 가는 것이 상례인 터라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글쎄요……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십시오, 저 때문에 지체하시게 되었는데…… 저 혼자

그냥 가버리기가 어쩐지 죄송해서요.

어차피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하고, 제 갈 길은 제가 간다는 기분으로 살고 있던 나는

의아한 표정을 거두고 남자를 따라 걸었다. 차가 고쳐지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다만

저런 식으로 산다면 저 남잔 곧 해고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그는

어쩌면 벌써 해고되었는지도 모른다. 저런 식으로 저렇게 날마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면,

자신이 한 아주 작은 실수에 더없이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사실은 내 탓이 아니었다

는 표정을 짓지 못한다면 말이다. 이번 일만 하더라도 탓할 것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미끄러

운 바닥과 하필이면 통로에 주차해놓은 내 차의 엉거주춤한 위치와 그리고 침침한 지하주차

장의 등불들. 광화문 쪽으로 조금 걸어가자 골목이 나왔고 거기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라는 긴 이름을 가진 까페가 보였다. 자리에 앉은 그는 눈이 나쁜 모양인지 조금 눈살을 찌

푸린 채로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나서는 마추픽추라는 이름을 댔다. 아마도 칵테일인 모양이

었다. 하지만 마추픽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깐 가슴 아래께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그저 같은 걸로, 라고 내가 말했다. 둘만이 마주앉게 되자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마 주대고 비볐다. 내가 담배를 꺼내 물자 그는 이제서야 어색함을 좀 벗어나겠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얼른 라이터를 꺼냈다. 펑 하는 고운 소리가 들렸다.

-뒤퐁인가요.

라이터를 보며 내가 물었다. 남자가 어깨를 조금 으쓱해 보이더니,

-아시는군요……이 소리 좋지요? 담배를 못하는데……이 소리가 좋아서 가지고 다닙니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서른 세 번째 생일날 나는 그 라이터를 선물한 적이 있다. 눈이 쏟아져서 서울 시내

의 교통이 거의 마비된 날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강변으로 나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우리

는 겨우 차를 몰고 그의 아파트로 갔었다. 그의 머리에도 내 머리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우

리가 긴 입맞춤을 끝냈을 무렵 나는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그의 머리칼 위의 흰눈이

작은 이슬방울로 변해버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내 머리칼의 흰눈도 그러하리라. 그 머리 위

에 다시 흰눈이 내려앉도록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희망이, 오래된 상처의 기억처럼 나를 스

치고 지나갔었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을까. 신데렐라

와 콩쥐팥쥐와 춘향전과 그리고……

 

(7)

나는 남자가 내미는 라이터 불에 담배를 붙였다. 라이터를 닫고 딱히 할 일도 없으므로,

하는 표정으로 남자는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담배를 피우지 못했

었다. 그는 내가 담배를 피울 때마다 그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는 것을 좋아했었다.

-마추픽추에 가본 일이 있으세요?

밀림의 여름 같은 진초록색과 자주색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붉은 빛이 켜켜이 쌓인 화

려한 칵테일이 날라져오자 남자가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며칠 전에 거기서 이리로 왔어요.

남자가 나를 따라 잔을 들며 말했다. 나는 차 수리가 끝나지 않는다 해도 이 잔을 비우면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고를 당한 이 가을날 오후에 핸드폰과 찌그러진 차와 아

이의 돌반지까지 팔 생각을 하면서 이 낯선 남자와 마주앉아 마추픽추가 있는 페루 이야기

를 한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왜 페루이고 하필이면 왜 마추픽추인가 말

이다. 단 한번 부쳐져온 그의 엽서에는 시루떡처럼 생긴 마추픽추의 그림이 들어 있었다. 잠

시 시간이 나서 마추픽추에 들렀다. 수도 리마에서 한 시간 남동쪽으로 날아왔지. 거기서 북서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우루밤바의 험준한 산악지대 속에‘늙은 봉우리’마추 픽추와‘젊은 봉우리’와이나픽추가 있다. 이 두 산이 이어진 곳에는 하늘로 날아올라 보아 야만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잃어버린 도시' 가 있지. 인구 일 만쯤을 수용할 수 있는 잉카의 도시였으나 언제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언제 사람들이 떠났는지 알 길이 없다. 모든 것은 이제 전설 속에 묻혔을 뿐…… 나는 그가 보낸 엽서를 세 번쯤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다. 그가 왜 마추픽추에 갔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젊은 봉우리와 늙은 봉우리, 그리고 새

처럼 날아오르지 않으면 그 모습이 파악되지 않는, 이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잃어버린

도시……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왜 그 도시를 그토록 힘들여 지었을까. 그는 아

마도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곳에서 그는, 소꿉처럼 작은 토산품

을 외국인 관광객에게 들고 다니며 파는 어린 소녀의 그 작고 조잡한 물건을 모두 사서 제

가방에 넣고는 그 소녀를 무릎에 앉힌 채 소녀의 검은 머리를 땋아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젠가 월남 지사에서 근무할 때도 그는 통킹만(灣)에서 만난 소

녀의 물건을 모두 사주었다고 했었다. 그의 집 진열장에는 쓸모없는 그런 물건들이 주르르

서 있었다. 다 합쳐봐야 몇 푼도 되지 않는 물건을 팔기 위해 작은 아이가 애쓰고 있는 게

안쓰러웠다고. 나는 쓰레기통에서 다시 엽서를 꺼내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잘게

찢어버렸던 것 같다. 마주칠 힘이 없으면 돌아가라,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라…… 그것이 서른 몇 살을 사는 동안 살아가기 위해 내가 얻은 유일한 진실이었다.

-저, 결혼하셨습니까?

남자가 딱히 할 말도 없다는 듯 말했다.

-네…… 그리고 이젠 혼자예요.

아마도 곧 이 자리를 떠나리라는 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인

것은. 남자는 잠시 머릿속이 혼란한 듯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머리가 한참 모자라는 사람처

럼 아아, 하고 웃었다.

-괜한 질문을 드렸군요.

남자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골목길에는 가을 바람만

휑하니 불어가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은행나무 몇 그루가 천천히 이파리를 떨구고 있었

다. 나는 그 은행나무를 바라보았으나 나무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대체 은행나무와 눈맞추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글러먹은 생각이었다. 곁을 주지 않는 쌀쌀한 사람에게 말을 붙이려고 했다가 무안만 당한 것처럼 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고 그저 까페를 둘러보았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주인은 우리에게 칵테일을 날라놓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통유리 창만 큰 까페는 어항 속처럼 적막했다.

 

(8)

-그런데 왜 이혼하셨어요?…… 아 죄송합니다. 이런 질문…… 그렇지만 전 아직 결혼 전이

거든요……

나는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 이런 질문이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다.

-글쎄요. 내가 곁에 없으면 그 사람, 죽을 것만 같아서 결혼했는데…… 살다보니까 그 사

람이 더 곁에 있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치면서 나는 아주 조금 웃었다. 남자는 웃지 않았다. 대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

고 나서 아주 굳은 표정을 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언젠가 어떤 여자가 제게 그런 말을 했었어요. 일년 전쯤 제가 페

루로 떠나면서 헤어진 사람인데……

남자는 말을 마치며 피식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그도 이렇게 지금 지구의 반대편, 페

루의 까페 한구석에서 어떤 여자와 이런 말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다. 그러자 문득 가슴 한구석에 다시 통증이 느껴졌고 이어 페루에서 온 이 남자가, 그가

거기서 어떤 여자와 다정하게 마주앉아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봤다고 우기기라도 한

것처럼 화가 치밀었다. 나는 갑자기, 이 남자와 어서 친밀해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힘들었습니다.

그 남자는 칵테일의 둥근 잔을 손으로 빙빙 돌리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힘드셨겠군요……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친밀하게 남자의 말을 받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내가 정말로 힘들었던 건 그 여자는 혹시 조금도 힘

들지 않은 건 아닐까, 그 여자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마음이 드는 때였어요……

말을 마치는 남자의 입술이 참았던 슬픔으로 인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글쎄요, 실연을 당한 친구가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비가 내리는 날이었

지요…… 내가 위로를 건네자 그 친구는 내리는 비를 한참 바라보더니 말했어요. 그래도 같

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어, 내가 보는 이 비를 그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위로가 돼……

알겠냐는 듯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알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내게 찾아와 실연을 하소연하던 친구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상투적인 말

로라도 나를 위로해주겠니? 하는 얼굴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페루로 떠났다면 그건 막막하잖아요, 막막한 거 말이에요…… 내리는 이 비를 그가 보는

지 어떤지 그 여자는 모를 테니까요. 여기에 비가 내리는 날 페루의 한 도시에선 건조한 모

래바람이 불지도 모르고, 여기에 눈이 내리는 어느 날 페루에선 사람들이 해수욕을 떠나고,

여기는 화창한 날인데 페루에서는 폭풍우에 시달린 새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

니까요. 일본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뭐 프랑스, 독일도 아니고 신문에 나오는 세계 주요

도시의 일기예보에도 나오지 않는 페룬데…… 아시겠어요? 내가 먹는 우동을 그도 지금쯤

저기서 먹고 있겠지, 하는 생각도 못하고…… 내가 듣는 이 노래를 어디선가 그도 듣고 있

겠지, 그런 생각도 못하고…… 우리가 자주 걷던 길을 걸으면서 한 번쯤 내 생각을 할까, 내가 그런 것처럼, 하는 생각도 못하고 힘들었겠지요. 언제나 보내는 사람이 힘겨운 거니까요. 가는 사람은 몸만 가져가고 보내는 사람은 그가 빠져나간 모든 사물에서 날마다 그의 머리칼 한 올을 찾아내는 기분으로 살 테니까요. 그가 앉아 있던 차 의자와 그가 옷을 걸던 빈옷걸이와…… 그가 스쳐간 모든 사물들이, 제발 그만해, 하고 외친다 해도 끈질기게 그 사람의 부재를 증언할 테니까요. 같은 풍경, 같은 장소 거기서 그만 빠져버리니 그 사람에 대한 기억만 텅 비어서 꽉 차버리겠죠. 그 여자가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별로 위로 받지 못한 얼굴이었다. 문득 괜히 혼자

열을 냈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담배 피우는 여자를 보면 그 여자 생각이 났어요. 담배 피우는 여자는 이 세상에 그렇게

도 많은데.

남자의 고개가 내 담배연기 속에서 숙여졌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바바리 자락을 만지작

거리더니 그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런 거예요, 산다는 게…… 담배를 보고 생각하고 남산을 보고 생각하고, 하지만 그건

담배 탓도 남산 탓도 아닌 걸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나는 피식, 하고 웃었다. 남

자는 모를 것이다. 그의 작은 아파트가 남산 아래에 있었고 그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커튼을

열자 불쑥 다가오던 남산의 탑. 밤이 되면 페르시아 왕자의 보석모자처럼 어둠 속에서 황홀

히 빛나던 그 탑. 그가 나의 잠옷으로 정해준 그의 낡은 면 티셔츠, 휴일이나 토요일 오후

나는 그의 커다란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 엎드려서 앙상한 다리를 함부로 덜렁거리며 그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또 커피를 마셨다. 그는 그 티셔츠를 페루로 가져갔을까. 내게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많이 빨아서 씰크처럼 후들거리는, 소매끝이 약간 바랜 그 면 티셔츠의

초록색은, 아이를 재우고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마다 내 팔이 먼저 기억해냈다. …… 그 빛바랜 티셔츠가 있던 그의 집은 아직도 남산 아래에 있지만,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이 거기서 라면도 끓여 먹고살고 있겠지만, 그 사람들도 가끔 창을 열고 남산 탑을 바라보겠지만, 그래도 퇴근길에 그를 만나기 위해 내가 찾아가던 그 비탈길과 택시에서 내린 우리가 서둘

러 입맞추던 어두운 골목길과 우리가 자주 가던 홍합탕을 끓이는 집은 아직 거기 있다. 담

배 피우는 여자를 어디서나 볼 수 있듯이 남산도 서울 어디서나 보인다. 심지어 고속도로를

달려 아직 서울로 진입하기 전에도 언덕을 넘으면 한강 너머 멀리 거기 남산 탑이 보인다.

서울 토박이지만, 나는 남산 탑이 그렇게 서울 어디서나 잘 보이는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

었다. 기억은 머리로 하는 것이지만 추억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어서 내 가슴의 탑은 날마다

불을 환히 밝혔다. 나는 남산 탑에 버림받은 여자 같았다.

 

(9)

-페루로 가서도 그 여자의 회사에 가끔 전화 걸곤 했어요.

남자는 대체 페루하고 남산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제 생

각에 취해 말을 이었다.

-내 전화를 받으면 냉랭해져버리기 때문에 그 여자가 퇴근하고 회사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시간에 전화를 걸었지요. 그 여자가 없는 그 여자의 공간에 전화 거는 기분 같은

거 이해할 수 있으세요?

쭈뼛쭈뼛거리던 남자가 말갛게 눈을 뜨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마주쳐

버린 눈 때문에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빈 사무실에 울리는 전화벨소리, 빈 사무실인 줄

알면서 전화 거는 마음…… 나는 빈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떨어져내린 은행이파리

때문에 노란빛만 환했다.

-그 여자는 누군가 자기와 함께 슬퍼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걸 이제 믿지

않으려고 했어요. 어떤 때 그 여자는 결국 모든 것을 끝장내려고 사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나는 표를 두 장 준비하고 기다렸어요. 페루는 비자가 없어도 갈 수 있는 나라니까. 공항에

그 여잔 나오지 않았어요. 핸드폰은 죄송합니다,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고 말하더군

요. 그리고 오늘 그 여자 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그만두었다고 하대요. 사실은 아까 그 주차

장에 전화를 하러 들어간 거였어요. 그 여자 회사가 그 근처거든요. 내가 페루로 떠난 후에

여자는 이사를 했나봐요. 바뀐 전화번호도 알 길이 없고 해서……

그가 떠난 후 일년, 그동안 회사로 그의 전화가 한 번 걸려오기도 했었다. 목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려서 나는 그가 페루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접선을 시도하는

비운의 첩자처럼 그는 적어, 하는 말로 통화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거처를 알리는 암호 같은

긴 전화번호를 불렀다. 스타일화를 그리고 있던 나는 그의 전화번호가 허공에서 헛되이, 내

가 그린 스커트의 날카로운 선을 따라 스러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

이라고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을까. 나는 그때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다만 스타

일화 속에서만 표준으로 존재하는 십등신 몸매를 가진 여자의 스커트 자락 위에 그의 전화

번호 대신 완성이라는 낱말을 무수히 쓰고 또 갈겨쓰고 있었다.

-회사 동료가 귀띔을 해주더군요. 어떤 여자가 같은 목소리로 가끔 전화를 걸어서 내 이

름을 찾는다고 말이지요. 그리고는 페루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려고 하면 황급히 전화를 끊

었다구. 나는 왠지 그게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 속이 불편하신가요? 아니면 제 이

야기가 너무 부담스러우셨나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괜찮지는 않았다. 나는 명치보다 조금 더 아래께에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마취제로

서의 알콜의 성분을 생각하며 칵테일을 마셨다. 낮에 마시는 술이기 때문인지 기분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모금 더 마셨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서

날개가 돋도록. 마추픽추 신전의 모양을 모방해서 만들었을 칵테일의 초록과 자주의 층이

작은 유리잔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내려 이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다지요?

몸이 가벼워지자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는 조급한 마음도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면도 자국이 남아 있는 턱을 한번 쓸었다.

-로맹 가리가 쓴 소설 말이군요. 어디서나 새들은 죽어요. 그리고 어린 새들이 또 태어나

겠지요. 페루에 대해 궁금하신가요?

-아니요, 전 페루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알고 싶지 않으신 거로군요. 죽을까봐.

남자가 웃었다. 나는 웃지 않고 그저 담배를 물었다. 남자가 은빛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남자의 유리잔 속의 마추픽추도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허물어져버

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신 마추픽추는 위 속으로 들어가 다시금 진초록과 진자주로, 선

명하게 다시 쌓이고 있는 듯했다. 까페엔 손님이 없었다. 낮은 소리의 음악도 끝나버렸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아서 까페는 무덤 속처럼 고요했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카쎈터

주인이 말한 시간이 얼추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때 저를 매혹시켰던 책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맞아요, 처음에 나는 그 진실이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았는데 이제 그것을 간직하면 여기서

내가 죽을 것만 같더군요. 그 책은 진리를 말하고 있었던 거예요. 모든 것은 변한다. 저는

그 구절만 빼놓고 그 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믿었지요. 그 책이 나에게 주었던 진실이 진실

인 것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어리석게도 생각했던 거예요. 세상에,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언제나 거기 있어주는 것이 한 가지쯤 있었으면 했지요. 그게 사랑이든, 사람이든, 진실이든

혹은 나 자신이든…… 나는 기대어 서 있고 싶었나봐요. 존재란 건 원래 머무르고 싶어하니

까요. 그래서 저는 페루로 갔습니다.

-차가, 차가 다 고쳐졌을 것 같군요.

내가 남자의 말을 막았다. 그가 잠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는 제 말이 부담스러우신가 보군요, 곧 가겠습니다. 저도 가야 하는 시간이니까요.

머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한마디만 괜찮다면,

남자가 애타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이군,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면 지체없이 일어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댁을 보는 순간 하지만 왠지 이 말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사랑은 완성되어

야 할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이지요. 혁명이 그렇고 삶이 그렇듯이. 하지만 우리는 끝을 보

고 싶어했어요.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처음

부터 없었던 것과 같아지는 거라고. 그 중간은 존재하고 그 과정도 존재하며 사실은 삶이란

게 바로 그런 과정들일 뿐인데 말이지요. 삶조차 완성될 수는 없는 건데요. 나는 조급히 끝

을 만지고 싶어하는 그 여자를 사랑한 만큼 증오했나봐요. 끝이 보이지 않았던 내 희망을

사랑하고 증오했듯이…… 아마 그래서 그 여자 없이도 페루로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0)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나를 존중한다는 듯 따라 일어나 돈을

지불했다. 남자가 돈을 내는 것을 보고 있기도 뭐해서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남보랏빛 물

체가 눈을 가로막았다. 벽 위에 형체가 무너져가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도 없는 한 존재, 지금 여기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등을 돌려 떠나가

는 참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존재. 존재는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왜냐하면

남보랏빛과 검은빛이 섞인 땅은 소용돌이에 휩싸인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왜였을까, 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죽음, 이라는 단어를 느꼈다. 하지만 그 그림 밑에 씌어진 제목은 이

랬다.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순간 아랫배가 출렁, 하는 느낌이 들었다. 켜켜이 줄을 지어선

마음의 서랍이, 아까 그를 만난 순간부터 위쪽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열리기 시작하면서 내가

살아오는 동안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그 맨 아랫서랍이 삐그덕, 삐그덕 열리고 거기 담겨

있던 나의 내장이, 내 존재를 육체이게 해주는 나의 내장들이 소금에 절여진 듯이 꿈틀꿈틀

거리고 있었다. 둔중한 쓰라림이 나의 등을 뻣뻣하게 스쳐지나갔다.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까페 앞 골목으로 나서자 남자가 말했다. 나는 그가 밟고 선 노란 은행잎들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반짝였으나 이제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는 그의 낡은 구두와 한때는 서슬 푸르게 꼿

꼿했을 그의 낡은 바짓단, 단정한 감색 바바리가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위에 목을 얹

은 그의 얼굴은 뜻밖에도 영원한 고요 속으로 침잠하려는 것처럼 아주 슬퍼보였다. 그렇게

살지 말아요. 그렇게 살면, 힘들어요. 나는 마치 가까운 후배에게라도 하듯 말하고 싶었다.

그가 다가와 바바리를 입은 내 허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처

럼 당황한 채로 한 발짝 물러나 얼른 가벼운 목례를 보내고 돌아섰다. 그러자 손가락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마음의 맨 아랫서랍이 열리는 것을 느꼈을 때부터 아우성친 내

손가락들의 유혹을 한번쯤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차에 상처를 낸 그에게 관대

했듯이 그렇게, 손가락에게도 관대해보자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나 때문에 힘겨웠던 내 입술에게도 한번쯤 기회를 주고 싶었다. 입술은 나의 허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작게 몸을 떨었다.

-그의 페루 전화번호를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저, 그분 실종되었어요. 일주일째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잠시 여행을 갖

다 오겠다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는데, 아파트도 비어 있고 완벽하게 사라졌어요.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닌데 말이지요. 거긴 폭풍이 굉장했대요. 폭풍이 지나간 후, 산에서 바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들 빠져나왔는데 그분은 오시지 않았어요. 현지 경찰과 대사관이 조사

를 시작했지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사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마치 그가 사라진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도 된다는 듯했다. 전

화를 끊지도 못하고 나는 문득 그가 사라진 골목 저쪽을 바라보았다. 외줄기로 길게 뻗은

골목길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갑자기 다급한 마음이 들어 그가 간 쪽의 골목길을 따라 뛰

어가다가 큰길로 나왔다.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진 것이다. 차들이 와왕거리며 지나가

고 소풍을 마친 유치원 아이들이 삐약삐약 떠들어대며 차에 타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끝낸

신랑이, 긴 드레스가 버거운 신부를 데리고 싱글거리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한때는 희망

으로 빛나던 이 길을 당신들도 언젠가 절망으로 걸어갈 날이 있을 것이다. 희망으로 한번

빛나보지 않은 길은 결코 절망으로도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길의 탓은 아니지만, 경계

하라! 그 변덕스러운 삶의 갈피를…… 언젠가 음악이 멈추고 무도회가 끝난 것처럼, 귓속으

로 먹먹한 정적이 스며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금 경계하라! 불행조차도 고여 있지 않다

는 진실을…… 나는 완벽한 침묵의 공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처음 만났던 것도 우리 회사의 지하주차장이었다. 그때 그는, 아직은 멀쩡하던 내 차

의 옆구리를 박으며 내 삶에 끼여들었다. 내 차에 흠집을 냈던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냥 도

망쳐버려도 되는데, 그는 차 곁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상등을 켜두셨길래 금방 오실 줄

알았어요. 그때도 나는 생각했었다. 나한테는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이 사람 오

래 버티지 못하겠군. 이년 전 가을의 일이었다. 그때도 나는 이 바바리를 입고 있었다. 그때

이후 얼마동안 지하 주차장의 어두운 등불들 별처럼 빛나고 내가 걸친 이 바바리의 섶들은

유월의 들풀처럼 꼿꼿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길거리에는 후줄근한 낡은 바바리를 입은 여

자가 서서 고막을 터뜨릴 듯 내리누르는 침묵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는 사라져버린 것이

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아까 까페에서 나와 단정한 그의 감색 바바리 자락이 문득 나

의 옷깃을 스쳤을 때, 내 허리에 얹힌 그의 손에 대한 기억이 뒤늦게, 그러나 정수리를 쪼개

듯 선명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당황하며 한 발짝 물러선 것은 그의 친근한 표

현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손길의 낯익음 때문이었다. 몸은 그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드디어 가벼워져서 여기까지 날아온 것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아니야, 하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정말 입밖에 낸 것일까. 아니 이 모든 일이 정말 실제로 일어

나기나 한 것일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고막을 찢을 듯한 무거운 침묵

뿐이었다. 그러자 바로 그때 푸딩처럼 엉긴 무거운 침묵을 바수어뜨리며 내 귓가에 무수한

새들이 푸드득 푸드득 날갯짓을 하고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히 열려버린 내 서랍

속에 오래 갇혀 있던 새들은 날아올라 대열을 정비하고 오래 전부터 꿈꾸어왔던 일이라는

듯이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새들이 막막한 대양을 건너서, 하늘에

서만 볼 수 있는, 잃어버린 도시를 지나, 늙은 봉우리 마추픽추에 머리를 부딪혀 죽는 환상

을 이어서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무수히 죽어 나자빠진 새떼의 육체들을.

 

(11)

죽기 전에 새들은 날개가 처음 돋았던 시절을 기억했을까. 처음 비상을 할 때, 하늘을 우

러르는 빛으로 솟아오르던 그 푸른 눈동자들을. 그리고 시간이 지나간 후, 날개가 꺾여 파르

르 떨리던 그 순간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있는 한, 죽음 역시 삶의 과정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 이라고 그의 말대로 나는 생각해도 되나. 태어난 새들은 어디서나 죽고

그러고 나면 다시 어린 새들이 태어나겠지. 흐린 이 가을날, 먼 곳 들판 한켠에서 엎드린 곤

충들이 바싹바싹 말라가며 죽어가고 있고, 그 곁에 말갛게 씻은 참깨 같은 알들이 소복이

쌓여 있듯이, 먼 곳 페루에서 한 남자가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 그럴 수도 있으니까. 표창을

받은 경력을 가지고도 해고당하고, 서른 세 살에 갑자기 구세대가 되어버리고, 천년을 맹세

한 도시를 지어놓고 살던 일만 명의 사람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듯이…… 하지만 대체 어디로, 대체 어떻게, 차마, 사라질 수가 있을까마는……

나는 그와 처음 보았던 연극의 제목을 생각해냈다.‘어떤 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연극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사라지기 위해서 내게 그 연극을 보자고 했던 것일까. 이렇게 사

라져버리고는 겨우, 어떤 사람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는 그 말을 흣날의 내게 남기고 싶

어서? 이제는 내가 그리워하지 않을 테니 제발 있어달라고, 지구 한 모퉁이, 세계 주요 도시

의 일기예보에도 나오지 않는 페루든, 어디든, 제발이지 그저 살아 있어달라고, 이제 나는

다시는 기도도 하지 못한다는 말일까? 나는 흐린 가을의 오후 속에 혼자 서 있었다. 아직도

핸드폰을 들고 있는 나의 손은 축축해져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백 속에 넣고 바바리 자락

에 젖은 손을 문질렀다. 새떼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은행나무의 기억 속에서 공룡이 걸어온

다고 해도 나는 이제 다시는 페루로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서 날마다 페루를 향

해 은밀한 비상을 꿈꾸던 새들은 모두 떠나버렸으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다시 어린 새들이

태어나면 어떻게 하나, 서랍 안에 갇혀서, 먼 곳만을 보도록 운명지어진 눈을 말갛게 뜬 채

로.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의자를 베란다에 내다놓고 아이를 무릎

에 앉힌 채, 천천히 아이의 머리라도 땋아주며 나는 생각을 좀 해보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한 가지의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라고 내가 희망을 걸었던 책

의 첫구절에 써 있었지요. 나는 그 구절만 빼고 그 책에 씌어진 모든 것들을 다 믿었어요.

그 진실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요. 세상에, 이 세상에 단 한 가지쯤은 변하지 않고

늘 거기 있어주는 게 한 가지쯤 있었으면 했어요. 그게 사랑이든 사람이든 진실이든 혹은

내 자신이든…… 나는 기대어 서 있고 싶었고 존재는 머무르고 싶어하니까요…… 그러자 늙

은 봉우리, 마추픽추 한 언덕빼기, 이제 영원히 그곳에 머물게 될 새들의 주검들 속에서 마

지막까지 버티며 날개를 퍼덕이던 새 한 마리가 움직임을 멈추었고, 생을 맹세하고 막막한

대양 위를 날아가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낸 그의 푸른 눈빛이 멍해지면서 눈물이 한 방울 떨

어져 내렸다. 이미 늦은 거야, 하는 생각 때문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미안해, 정말, 미, 안, 해. 나는 적어도 시간만은 우리 앞에 오래 지속될 거라고 믿었어……

천천히, 떨리는 손을 내밀어,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노란 은행잎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무덤 속처럼 적막한 긴 길이었

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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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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