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예술/미술 2009. 8. 15. 22:45

 

서양음악사

 

고대음악( ∼A.D.400년 경)

음악의 기원설

메소포타미아의 음악

이집트의 음악

그리스의 음악

유대의 음악

로마의 음악

초기 기독교의 음악

 

 

1. 음악의 기원설

 

음악의 기원에 대해 역사적인 확증은 없지만, 근래에 와서 자연 민족의 음악에 관한 연구 등 다각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문헌적인 자료가 없는 선사의 석기 시대에 있어서 동굴의 그림과 그 밖의 유물이 발견된 이래 음악에 대해서는 신빙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알게 된 것은 말이 있고 문자가 생긴 이 후의 일이다. 그러나, 음악은 말보다 먼저 생겼다는 설이 있다. 음악을 인간 본능의 하나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개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음악이 있고 악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 무릇 인간은 무언가 공통된 본능적인 기초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음악은 인간의 본능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음악의 기원에 대해 많은 민족들은 신수설(神授說)과 자연발생설을 믿고 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음악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언어기원설

프랑스의 루소가 주장한 것으로 언어의 억양과 악센트, 감정의 표현 과정에서 음악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문화가 낮은 민족 사이에 언어의 멜로디가 그렇게까지 인정되지는 않는다.

 

노동요설

독일의 뷔허가 주장한 것으로 인간이 집단적으로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보조를 맞추기 위해 불러댄 소리가 음악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적인 종족 사이에는 리듬적인 공동 작업이 별로 없었다.

 

진화론적 입장

영국의 다윈이 주장한 것으로 새와 동물들의 이성을 끌기 위해서 내는 소리를 인간이 본받아 음악으로 발전시켰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의 최초의 노래 중에서 애정을 구가한 비중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기악설

오스트리아의 발라세크가 주장한 것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리듬적 충동으로 인해 음악이 발생했다는 설이다. 춤, 몸짓 또는 반주적인 타악기가 음악의 근본이라고 했다. 여기서 리듬과 가락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음악의 기원에 대한 설은 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 아직 뚜렷한 정설은 없고 우리들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원시 음악의 특징은 단조로움과 짧은 하나의 가락이 한없이 되풀이되는 점이다. 따라서 음악은 여러 민족의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각 지방의 음악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반도의 북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의 2개의 큰 강이 합류하여 페르시아만에 이른다. 이 강의 혜택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도 음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B.C 4,000∼3,000년 경에 이미 타악기, 피리 등이 있었음을 출토품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앗시리아는 미개한 단계이지만 그들의 독자적인 음악 이론을 가지고 있었고, 페르시아는 음악이 종교적, 사회적 생활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

나일강의 혜택을 받아 번영한 이집트는 이미 기원전 4000년경부터 오랜 음악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는 기원전 4777년에 최초의 왕 메네스가 남북을 통일하여 제1왕조를 이루었다. 그리고 제18왕조인 기원전 1570년경에 가장 화려한 음악 문화를 이룩했다.

피라미드 등 돌벽에 조각된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과 음악의 행렬도 볼 수 있다. 하프와 같은 여러 모양의 현악기가 있었는데, 부니(buni)는 대표적인 악기이다. 한편 비파의 종류에 목이 달린 네페르(nefer)도 몇 가지가 있다. 관악기로는 여러 형태의 피리가 있었는데, 길이가 1미터나 되는 세비(sebi)라는 세로피리와 2개의 관에 리드가 있는 맘(mam)이 있었다. 이집트의 음악은 리듬은 단순하지만 5음음계와 옥타브 8도의 조직이 행해졌다. 이것이 후에 피타고라스에 의해 그리스에 전해져 그리스 음악 발전의 바탕이 되었다. 이집트의 음악은 대체로 장중하면서도 차분하고 은근했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이집트가 시리아와 기타 동양 여러 나라를 정복한 이래 동양 음악이 들어와 반음계풍도 있었으며 음악은 현저하게 관능적으로 되었다.

그리스

그리스는 유럽 문화의 원천이라 하거니와 음악 또한 빛나는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유럽 음악의 이론 기준이 되는 원전은 고대 그리스 음악에 기원한다. 고대 그리스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유대보다 뒤늦게 기원전 1천년 경부터 발달하였다. 이 민족이 유사 이전에는 러시아의 초원과 뎃사리아 평원 사이의 산간 지방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도리아(도리스:Doris)인이었다. 훌륭한 체격에 용감한 성격으로 훈련된 그들은 점차 남하하여 발칸 반도와 그 부근 섬들에 정착하였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말하자면 따뜻한 기후 풍토, 맑은 하늘에 빛나는 산, 평온한 바다에 육성되어 마침내 훌륭한 그리스 문화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리스 음악은 제전과 오락에 그치지 않고 철학성과 윤리성, 그리고 이론적인 면에서 음조직, 음향학, 악보법 등 과학적인 연구를 겸하였다. 수학자이자 음악가인 피타고라스(B.C. 582? ∼ 500?)를 비롯하여 여러 음악가들이 음악 이론을 발달시켰음은 물론, 문자를 사용한 악보도 만들어 사용하였다.또한 야외에 원형 극장을 건설하여 음악극을 상연하는 등 음악이 매우 발달하였다.

관악기에 아울로스(Aulos)라는 V자 모양을 한 2개의 관으로 된 오보에계통인 더블리드의 악기가 있었다. 또 팬파이프 종류에 시링크스(Syrinx)와 나팔 종류에 살핑크스(Salpinx)라는 트럼펫, 호른 모양의 케라스(Keras), 그리고 북과 심벌즈, 시스트룸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그리스 음악은 오늘날 서양 음악의 바탕이 되고 있다.

유 대

유대의 음악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나라들보다 약 1천년 늦게 발달하였다. 이 민족들은 바빌론에 사로잡혀가 약 70년 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풀려 귀국하여 예루살렘 신전을 재건하였고, 마침내 유대교가 성립되었다. 바빌론이 망한 후 본국으로 귀국했는데,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을 받아 그 후 로마의 영토가 된 채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맞이하였다.

유대의 음악 중 성악, 특히 대창(Antiphona)과 답창과 응창 등은 후세 서양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 교회에 들어가 그대로 카톨릭 교회 음악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17세기 초기에는 베네치아의 2중 합창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그들의 음악 중에는 성가 외에 민중의 노래인 노동가, 음주가, 애도가, 사랑 노래, 개선 축가 등이 있다. 시편(詩篇)은 솔로몬 시대 이후 종교시를 모은 것으로 결혼식에 부르는 가사로 된 아가(雅歌)는 유명하다.

기악에는 하프족인 킨노르(kinnor)와 피리에 우가브(ugab), 뿔피리에 쇼파르(schofar), 북의 종류인토프(toph), 오보에 종류인 할릴(halil), 파아프풍인 네벨(nebel), 그리고 심벌즈(cymbals), 자베카(sabbeka)등이 있다.

당시 악보가 없었으므로 음악의 실정을 알 수 없으나 성악은 후에 기독교 음악의 발판이 되었다. 더구나 그레고리 성가와 극히 유사한 점이 많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아무튼 헤브라이의 성악은 비잔티움 및 로마의 교회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로 마

그리스를 대신하여 당시의 세계를 지배한 것은 로마였다. 그러나 고대 로마인은 그리스인에 비해 낮은 예술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주변 국가를 지배할 정도의 강력한 국가였으나,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발달하지 못하고 그리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군대의 음악으로 인한 금관악기의 발달, 알파벳의 기보법의 사용, 파이프 오르간의 모체가 생기게 된 것이 이 때이다.

기원 후 처음 2세기 동안 로마가 전성할 동안에 예술, 건축, 음악, 철학, 그리고 새 종교 의식, 기타 여러 문화적인 산물들은 헬레니즘의 세계로부터 로마에 유입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 음악이 도덕적, 이상주의적 원리를 넓은 형태로서 이탈리아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는 실리와 무역의 나라였기 때문에 실제 문제와 관련시켜 향락적이 음악을 구했었다. 기악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오르간을 개발했으며 현악기인 키타라, 관악기, 타악기 등을 창안하기도 했다.

오르간은 이미 기원전 4세기경에 있었다. 하지만 파이프 오르간의 원형이 알렉산드리아의 공학자 크테시비오스가 물의 힘으로 공기를 보내 파이프를 울리게 하는 오르간을 만들었다. 오르간은 후에 아라비아에 전해져 제작법이 크게 발전하였데, 이것이 그리스 지방에 전파되어 많이 개량되었다.

로마의 악기 중 현악기에 여러 모양의 리라, 입금, 삼각금 등이 있었다. 피리에 그리스에서 온 티비아(Tibia), 티비에(Tibie)가 있었고, 관악기에 동으로 만든 호른 부치나(Buccina)와 코르누(Cornu), 리투우스(Lituus), 튜바(Tuba) 등이 있었다.

 

초기 기독교 음악

기독교가 음악을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처음에는 많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노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래 음악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 교회에서의 음악은 유대의 음악과 시리아, 팔레스티나, 소아시아, 그리스 음악 등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였다. 그 중에서도 유대는 예부터 찬미가가 있었다. 초기 기독교의 예배 의식이 유대의 시나고그(Synagogue)의 예식과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응답식으로 노래하는 방법도 그곳에서 전해 왔다. 악기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노래도 향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배는 유대교의 의식에 준하였다. 성서, 시편, 찬미가, 기도등 읽는 순서가 유사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미사의 의전에 남아 있다. 따라서 음악은 거룩한 의식 속에서 인정된 유일한 예술이라 볼 수 있다.

교회 음악은 주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과 로마에서 발전했다. 로마의 교회는 카톨릭의 교리를 확립하여 그 수반을 교황이라 불렀는데 그 세력은 점차 강해졌다. 한편 유럽의 대부분은 원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4-6세기에 걸쳐 모든 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각지에 새 국가 건설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쇠망한 후 로마의 교회는 이탈리아 전 지역에 걸쳐 정치적 권력을 떨쳤다. 뿐만 아니라 북유럽 신흥의 모든 민족에까지 국가 이상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교회 의식에 음악을 중요시하게 되자 교회를 중심으로 작곡가들이 육성되어 음악은 크게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교회 음악에 많은 영향을 준 곳은 이탈리아의 밀라노였다. 그곳에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339-397)사교가 교회를 개혁하고 동방 여러 곳의 성가를 수집 연구하여 그 음악을 일신시켰다. 교창가의 노래 방법을 시리아나 팔레스티나에서 받아들여 시편이나 찬송가를 2개로 나누어 합창하도록 하였다. 시편의 노래 방법에는 응답가와 교창가가 있다. 응답가는 음악에 능한 독창자와 성가대의 응답이고 교창가는 2개의 성가대가 서로 교대로 하는 것이다. 그는 4선법을 사용하여 찬미가 규칙을 정했다. 이러한 4선법은 피타고라스가 정한 7개의 음계 중에서 Phrigia, Doria, Hipo-Lidia, Hipo-Phrigia선법을 선정하여 4선법으로 하였다. 그리고 고전적인 장단의 음률에 의한 찬송가를 만들었다. 이는 간단한 노래인데 이른바 간소한 노래(Plain)이다. 이것이 찬가(Hymondy)와 시편(Psalmody)으로 되어 있다. 가사는 라틴 말로 고쳤으며 시의 율동을 중심으로 가요적이라 할 만한 음률적인 합창 등을 만들었다. 이 찬송가는 1천년 뒤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코랄의 본보기가 되었다.

 

중세음악( A.D.400년 ∼ 1400년 경 )

 

중세음악의 시대구분

단성음악의 시대 (중세초기 - 13세기)

그레고리성가, 트로푸스와 세퀜티아, 세속가곡.

다성음악의 발달 (13세기, Ars antiqua)

오르가눔, 폴리포닉 콘독투스, 모테트, 호케투스, 로타와 론델루스.

14세기의 음악 (Ars nova)

프랑스의 음악양식, 이탈리아의 음악양식.

 

중세음악의 시대구분

 

 

음악사에 있어서 중세라고 함은 일반 문화사와 마찬가지로 400년 내지 500년경부터 1400년경까지를 말하며 특히 전형적인 중세음악으로 900년부터 1300년경까지의 음악을 가리킨다 그 이전의 시대는 고대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말하기 곤란하고 또 그 이후의 시대는 근대의 여러 가지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먼저 중세 음악사를 6개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400∼600년

이 시대는 고대 로마제국 말기이며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그리스도교의 포교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그 초기의 시대부터 유태의 전설을 받아들인 독자적인 음악을 지어 쓰고 있었지만 이 시대에도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지방마다 고유의 방언성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또 고대 전설에 의한 세속음악도 행해져 북유럽에도 독특한 민족음악이 발달하였다.

 

600년∼900년

민족의 대 이동이 끝나서 각 지에 국가가 성립되고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게르만 문화가 태어나고 있던 시기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장과 함께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성가 통일이 있었다.

 

900년∼1150년

그레고리오 성가가 완성되고 집대성되었으며 트로푸스, 세퀜티아 등도 행했다. 또 다성음악도 이 시기에 나타났는데 후크발트의 저서로 믿어지고 있는 음악요강(Musica Enchiriadis)에서 단순한 병행 오르가눔이 제창되었다.

 

1150년∼1300년

다성음악은 더욱 발전하여 오르가눔, 클라우줄라, 콘둑투스, 모텟토 등의 악곡이 나오고 성부의 수도 2성부에서 4성부까지 있으며 모우들 기보법에 이어 정량기보법도 행해지게 되었다 또 민속적 세속음악도 일종의 고답화를 보여 남프랑스의 투르바두르, 북프랑스의 트루베르, 독일의 미네젱거 들의 요 가곡과 그리고 종교적 가곡도 출현하여 악기를 위한 무곡도 행해졌다.

 

1300년∼1500년

중세 봉건제도도 종말에 가까운 이 시대에는 음악에도 새로운 인간적 감각이 요구되어 참신하고 생기 있는 세속음악이 일어난 시기이다. 프랑스의 롱도, 비글레, 발라드, 이탈리아의 캇치아, 마드리갈, 발라타 등의 형식이 정립되고 아이소리듬, 호켓, 모방, 카논 등의 기법도 추구되었다 한편 미사나 모텟토와 같은 종교음악도 종교성보다는 음악성을 중시한 것이 많아지고 세속음악 스타일로 작곡된 미사곡 또는 미사 통상문 각 연을 통작한 미사곡 등도 나타났다.

 

1400년∼1450년

영국의 음악이 발전하고 3화음을 중혁으로 하는 새로운 기법은 대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5세기 중엽에는 영국의 기법과 아르스 노바 기법을 융합시킨 음악이 추구되었으며 정량기보법도 확정되어 중세의 종결점에 이르렀다.

 

중세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그리스도교는 중세의 모든 문화와 사고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지도자들은 예술분야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예술이라는 것이 이교도적 전통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으로 세속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미술분야에서 조각이나 회화는 교회 건축물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점차적으로 허용되었는데 교회를 지을 때도 감각에 의존하는 아름다움보다는 수적 비율의 원칙을 적용하였다 속세를 버리고 은둔자로서 금욕의 길을 택한자들이 늘어나면서 수도원과 수도 회칙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베테딕토회의 회칙은 성부일도에 관한 규정을 확립하였는데 성무일도는 음악과 관련이 깊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사회와 관여되면서 세속화되었고 그 시대 사람들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중세인들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세 음악의 일반적 특징

중세부터 전해 내려오는 대다수의 음악은 교회음악이다, 교회가 권장하는 음악은 성악음악 이었으며, 그 선율은 보통 좁은 음역에서 음정의 큰 도약 없이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고 보통 하나의 음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수세기에 걸쳐서 변천해온 음 체계는 여덟 개의 교회선법이라고 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중세의 선법은 고대 그리스의 선법에서 어느 정도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며 17세기 중엽부터 널리 사용된 장 단선법으로 이어지게 된다. 초기 교회음악은 단성음악이었지만 몇 세기 후에 가서 나타나는 다성음악은 바로 이 교회음악에서 발전되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특징은 중세의 세속음악에도 대체적으로 적용된다.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은 가사의 언어에서는 크게 다르지만, 음악 양식적인 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만 중요한 차이점은 세속음악에서는 노래반주를 위해 악기를 사용했다는 점일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는 가사를 담을 수 없는 기악음악은 아무런 종교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고 보아서 금지되었으며 따라서 악기는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가끔 연주된 악기였던 오르간을 제외한 다른 악기의 사용을 교회가 허용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단성음악의 시대 (중세초기 - 13세기 이전)

 

그레고리오 성가와 교회선법, 가사 배치 양식

1. 그레고리오 성가

음악사적으로 볼 때 중세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격식을 갖춘 형성기였다 그러므로 음악의 영역에 있어서 창조적인 능력이 싹튼 시기는 그레고리오 성가 시대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음악은 그 속에서 싹 터 나왔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란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단선율의 예배성가이다. 명칭은 전래 성가의 정비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성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에 관련되어 중세 후기 이후에는 cantus planus 라 불리웠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가사는 거의 모두가 라틴어 산문이며 시편이 중심이 되어있다. 그러나 시편에 의하지 않고 신약, 구약의 다른 부분에 의지하는 것도 있고 전혀 성서에 의하지 않고 새로 만들어진 것도 있으며 운문으로 된 것도 있다.

기보법은 4선보 위에 로마 4각 악보 즉 네무마라고 기보법을 사용하며 음자리표는 C와 F의 2종이 있어 절대 음고가 아닌 상대적인 것을 표시한다. 시가는 원칙적으로 등시가이며 이것은 현재의 8분음표에 해당하고 리듬의 기본은 아르시스(비약)와 테시스(휴식)이다. 조성에 대해서는 여덟 가지 교회선법이 인정되었으며 이것은 정격선법과 변격선법으로 구분된다.

모든 성가들은 성서적 가사를 갖는 것과 비성서적 가사를 갖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또 각각 산문 가사를 갖는 것과 운문 가사를 갖는 것으로 세분될 수 있는데 성서적 산문 가사의 예로는 성부일과의 과제들, 미사의 서간서와 복음서들이고, 성서적 운문 가사들은 시편과 칸티클 들이며 비성서적 산문 가사에는 테테움과 다수의 안티폰들 4개의 마리안 안티폰류들이 포함되고 비 성서적 운문 가사의 성가에는 찬미가와 세퀜티다 등이다.

성가의 기본이 되어있는 것은 시편창으로 시편만을 아무 부가 없이 노래하는 단순 시편창과 독창자가 부르는 앞뒤에 합창이 삽입되는 응창적 시편창과 두 패의 합창을 교대로 나누어 부르는 교창적시편창의 형태가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에 있어서는 가사의 반복이란 거의 없었으며 말 묘사 따위의 어떤 단어의 특정한 인상의 반영은 극히 적다. 선율은 가사의 리듬, 그 전체적인 분위기, 그 성가가 속해있는 의식 안에서의 분위기에 따라 적응하고 선율을 특별한 감정 또는 서술의 효과에 적응시키는 노력은 전혀 없었다.

 

2. 교회선법

그레고리오 성가는 일반적으로 8개의 교회선법을 기초로 하여 만들었는데 각 선법의 명칭은 모두 고대 그리이스의 선법이론에서 계승되었지만 이론적인 면에서의 명칭은 일치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도리아 선법의 경우 고대 그리이스에 있어서는 e-e의 옥타브종을 가르키나 중세에 있어서는 d-d의 옥타브종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8개의 선법은 고대 그리이스 종족의 이름인 도리아, 프리지아, 리디아, 믹소리디아의 4개 정격선법과 이 명칭에 각각 히포(Hypo)라는 접두어를 붙여 부르는 4개의 변격선법으로 되어있다. 정격선법과 변격선법은 각기 다른 하나의 중요한 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음을종지음이라 하며 이 음은 선법의 특색을 결정한다 또한 선법의 음역범위는 정격선법의 경우 종지음으로부터 옥타브 위까지 이며 변격선법은 종지음 4도 아래부터 5도 위까지 펼쳐진다. 종지음 외에 특별히 강조되는 음으로서 중심 음이 있다. 이 중심 음은 정격선법의 경우 종지 음으로부터 완전5도 위의 음이며 변격선법의 경우 정격선법의 중심 음으로부터 3도 아래의 음이 중심 음이 된다.

교회선법의 중심 음은 낭송음 이라고도 하며 예를 들면 성부일도의 핵심이 되는 성경의 시편을 낭송하는 음으로 중심 음을 사용한다. 어느 중심 음을 택하느냐의 문제는 낭송할 가사와 연결된 성가의 선법에 따라 결정된다.

단선율 성가에는 다시 네 개의 선법이 그때그때 추가로 사용되었다. 즉 A음을 종지음으로 하는 에이올리아 선법과 히포에이올리아 선법 그리고 C음을 종지음으로 하는 이오니아 선법과 히포이오니아 선법이다. 이들 네 개의 선법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musica ficta(변화음)가 사용되자 그 결과 자연히 발생하였다. 예컨데 제1선법과 제2선법에 있어서 B 음의 사용은 d단조라는 자연단음계를 낳았고, 제5선법과 제6선법에 있어서는 B 음의 사용은 F장조를 낳기에 이른 것이다.

교회선법의 이론은 실제 그레고리오 성가에 적용되기는 하였으나 옥타브를 넘거나 선율과 종지음이 불일치 하는 등 예외의 경우도 있었다. 

3.가사 배치의 양식

가사배치, 즉 단선율 성가에 있어서 말과 선율의 결합방식은 크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syllabic style 가사의 1음절에 대해 선율중의 1음표만 붙일수 있는 방법으로서 단선율 성가의 찬가나 sequentia 에 아주 흔히 사용된 작곡법이다.

neumatic style 가사의 1음절에 대해 선율중의 몇 음표를 붙이는 방법으로서 성가 작곡상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방법이다.

melismatic style 가사의 1음절에 대해 선율 중의 많은 음표를 붙이는 방법으로서 알렐루야 창의 작곡법 등에 사용되었다.

psalmodic style 많은 음절을 같은 음 반복에 노래하는 방법이며 시편의 작곡법으로 사용되었다.

 

트로푸스와 세쿠엔티아 (9세기-12세기 성가의 발전)

5세기와 9세기 사이에 서부의 북부 유럽의 주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의 교리와 의식의 지배 하에 들어왔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프랑스 제국과 브리탄 제도에 9세기 중엽 이전에 확립되었다. 그 이래 중세가 거의 끝날 때까지 유럽 음악의 거의 모든 중요한 발전이 알프스 이북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북방의 음악적 기운은 그레고리안 성가에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무엇보다 표현의 영역이 확대되었다는 것과 선율의 선이 음정의 도약, 특히 3도 음정의 도입으로 수식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북방 작곡가들은 새로운 선율뿐 아니라 새로운 형식도 창조하였는데 이러한 모든 발전들은 세속 단성노래의 발생, 그리고 최초의 다성음악의 실험들과 병행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9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단선율 성가의 새로운 두 가지 형식으로서 트로푸스와 세퀜티아가 있다.

 

1. 트로푸스

tropus란 단선율 성가의 흐름 가운데 음질적인 형태로 삽입된 프레이즈를 말한다. 이 말들은 멜리스나 풍의 프레이즈에 붙여지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삽입할 말에 대해 선율을 새로이 작곡하는 일도 있었다. 이 단선율 성가의 특성으로는 교회선법에 의하고 있는 점 , 아 카펠라인 점, 논 메트릭인 점, 또 자유로운 리듬이 사용되어 있는 점, 좁은 음역인 점, 주로 순차 진행인 점, 라틴어가 사용된점등이다.

 

2. 세퀜티아

sequentia는 알렐루야 창의 Jubilus(긴 멜리스마 프레이즈)에 대해 음절적인 형태로 가사를 붙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세퀜티아는 먼저 단독의 시에 선율이 붙는 형태로 된 몇 개의 부분으로 시작하고 다음에는 한 쌍을 이루는 시행으로 된 일련의 가사에 동일 선율이 되풀이되는 형태가 이어지며 그 후에는 단독의 시행에 선율이 붙는 형태가 이어져서 끝맺었다. 따라서 세퀜티아의 형식은 a bb cc..... n 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세퀜티아는 나중에 알렐루야 창으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단선율 성가로 사용하게 되었다.

 

세속 가곡 (secular song)

세속가곡은 중세사회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재 잔존해 있는 악곡들은 아주 적다. 세속 가곡과 시의 창작 활동은 모두 중세를 통해 주로 프랑스와 독일에서 번영했다. 세속 가곡은 양식상 단선율 성가보다 다양성이 풍부하며 많은 뛰어난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단선율 성가와 마찬가지로 monophony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단선율 성가와는 달리 세속 가곡은 명료한 박자를 가지고 대부분 3박자이다.

단선율 성가보다 더욱 명료하고 더욱 정형리듬에 의하고 있으며 짧은 리듬 패턴을 여러 번 되풀이 하면서 사용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세속 가곡은 반복 부분이나 반복부를 수반하는 명료한 프레이즈와 부분으로성립되어 있다.

세속 가곡은 대개 교회선법을 토대로 하고 있었지만 이오니아 선법과 에이올리아 선법도 즐겨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음절적인 형태(syllabic style)가 사용되었다.

단선율 성가가 라틴어로 불려졌음에 대해 세속 가곡은 대부분 각국어로 불러졌다.

세속 가곡은 단선율 성가에 비해 더 넓은 범위의 제재를 도입해서 노래했다.

 

기보법의 발달

중세 이전의 음악, 특히 성가는 구전의 방법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점차 복잡한 음악이 생기고 이를 보급시키기 위해서 음을 정확히 기록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9세기 중엽이전에 가사 위에 올라가는 선율(/), 내려가는 선율(\), 이들의 결합 (∧) 등을 표시하는 기호(neumes)들이 사용되었다. 10세기에 이르러서는 필기사들은 선율의 흐름을 좀더 정확하게 지시하기 위하여 가사위의 여러 위치에 neumes를 써 넣게 되었는데 이것을 『 높이가 있는 뉴음』이라 부른다. 어떤 대는 뉴움 사이에 점을 붙여서 그 뉴움안 에서의 각 음의 관계를 지시하였던 것이며 그리하여 그 뉴움이 어떤 음정을 대표하는가를 명확히 하여 주었다. 필기사들이 f음을 대표하는 붉은 선을 긋고 이 선의 아래 위에 뉴움들을 위치 시킴으로써 결정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얼마 지나서 보통 노란색의 두 번째 줄이 C 음을 표시하기 위해 그려졌다. 11세기에 이르러 Guido d'Arezzo는 4선 보표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 선 위에 f, c, 어떤 떄는 g음을 표시하는 글자를 써넣었다. 이 글자들은 결국 근대의 음자리표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표가 개발되자 선율을 구성하는 음들의 관계를 정확하게 기보하는 것이 가능하여졌으며, 그때까지 구선에만 의존해 오던 것에서 음악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아직은 음의 높이는 전달할 수 있었으나 그 음의 상대적 길이는 지시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neumes의 모양에 따라 음가를 표시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13세기경 쾰른 성 요한 수도원의 Franco de Colonia가 창안한 정량 기보법이다. 이 음악은 리듬의 변화가 있고 단선가와 비교가 안되므로 합창음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16세기 경에는 곡을 마디로 구분하게 되었다. 즉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점차 긴 음표를 표시하였다.

박자에 있어서 3박자는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를 상징한 것으로 표시하고 2박자는 ¢로 표시하였으며 4/4박자를 C자로 대용하였다. 15세기경에 과 으로 반음계적 변화를 표시하게 되었고, 지금 쓰고있는 5선 보표도 15세기에, 그리고 5선의 위,아래에 덧줄을 쓰는 방법은 16세기에 확립되었다.

 

다성음악의 발달 (13세기, Ars antiqua)

11세기는 서양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전 서부 유럽에 걸쳐서 경제 생활이 부흥되었고, 인구가 증가하였고 근대 도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또 제 1차 십자군 원정이 있었고 로마네스크 건축의 발생 등에 의한 분화의 부흥과 대학과 스콜라 철학의 발단이 있었다. 음악사에서도 11세기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서양음악의 기본적인 성격들을 부여하여 세계의 다른 음악과 구분시켜주게 되는 많은 변화들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음악 창작의 방법으로써 작곡이 서서히 즉흥연주에 대치되어 있다.

앞장에서 다루었던 기보법의 발명은 비로 이 시기의 일로 이로 인해 음악을 형식으로 기록하고 악보를 통해서 배울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음악은 보다 의식적으로 구축되었으며 특정한 질서의 원리 - 예를 들면 8선법의 이론, 또는 리듬과 협화 음정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에 따르기 시작하였다.

다성음악이 단성음악에 대치되기 시작하였다.

안티폰, 찬미가, 세퀜티아 등을 포함하는 단성성가의 최선의 종류들은 12세기와 13세기에 제작되었다. 11세기 이후에도 즉흥연주는 계속되었으며 새로 이 작곡된 곡들의 많은 세세한 부분의 양식들은 즉흥연주의 관습에서 채택되었다.

 

오르가눔

1. 오르가눔 (Organum)

오르가눔은 9 - 13세기에 걸쳐 행해진 다성악으로, 즉 그레고리오 성가 선율에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대성부를 부가한 다성악곡이다.

 

병행 오르가눔 (Parallel organum) - 초기

가장 오랜 폴리포니 형식인 병행 오르가눔은 두 개의 성부가 병진행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병진행이 허용된 음정으로는 완전4도, 완전5도, 옥타브이고 이 중에서 완전4도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엄격하게는 곡 첫머리부터 끝까지 병행하는 것이지만 처음 두 성부가 동음으로 시작해서 완전 4도에 이르면 이때부터 병진행을 하다가 끝에 가서 다시 동음으로 만나는 다소 복잡한 방식도 사용되었다. 초기 오르가눔에서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이 항상 윗 성부에 위치하며 주성부라고 불렀고 병진행 하는 성부를 오르가눔 성부라고 부르며 아랫 성부에 놓였다. 이러한 성부 배치는 원래 성가의 선율이 항상 분명하게 들리게끔 배려한 것으로 보여진다. 초기 오르가눔은 오르가눔 성부가 주성부의 선율을 거의 따라 다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보면 독립된 두 선율로 되어있다고 할 수는 없다. 즉 병행 오르가눔으로 생기는 다성음악은 연주 방식의 결과이지 작곡 방식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병행 오르가눔은 즉흥적으로 불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자유 오르가눔(Free organum)

11세기 경부터 오르가눔의 예는 음악 이론서뿐만 아니라 실제 악보에서도 발견되기 시작하며 이 때부터 오르가눔 성부는 단순히 주성부를 병행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율 진행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로와 진다. 이것이 자유 오르가눔으로서 2성부 사이에 병진행 외의 사진행이나 반진행도 추가되어 각 성부에 선율상의 독립성이 주어져 있는 형태를 말한다.자유 오르가눔에서는 가끔씩 오르가눔 성부와 주성부가 교차되는 경우도 있고 때때로 주성부의 한 음에 두 음 이상이 오르가눔 성부에 붙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리고 여기서의 단선율 성가는 대부분의 경우 트로푸스였다. 1음표 대 1음표의 형태로 진행하는 이들 2성부에는 리듬상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아직 결여되어 있었다.

멜리스마풍 오르가눔(Melismatic organum)

12세기가 되면 정선율은 테너 성부에서 오르겔풍크트와 같이 길게 뻗쳐지고 대성부에는 멜리스마풍으로 잘게 움직이는 풍부한 선율이 요구되게끔 된다. 또한 곡 중에서 실러빅한 약식과 멜리스마틱한 약식을 서로 倂置(병치)시키기도 한다. 음정관계로서는 3도가 보다 많이 사용됨과 함께 상봉 불협화음으로서 2도가 종종 사용되게끔 된다. 한편 6도,7도의 사용은 드문 편으로서 각 성부가 밀집하려고 하는 경향이 보인다.

장식 오르가눔이 발전하면서 작곡가들에게는 새로운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주성부와 오르가눔 성부간의 음의 수가 1:1이었던 11세기까지는 두 성부를 기보하는 데에 있어서 단성음악에 사용되었던 네우마 기보법으로 충분하였다. 그러나 멜리스마풍 오르가눔에는 두 성부간의 음의 수가 1:1 또는 한 음에 여러 음이 꾸며져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네우마 기보법으로는 충분히 음악을 기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음의 높이 뿐만 아니라 길이까지도 표기할 수 있는 기보법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런 문제의 해결로 12세기의 음악가들이 생각해 낸 것이 6개의 리듬형이다. 이 방법은 12세기 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해서 13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완전히 정착되었는데 우리에게 현재 통용되고 있는 리듬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재의 기보법은 일정한 음길이를 표시할 수 있는음표들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리듬형을 사용한 기보법은 어느 한 리듬형을 기초로 해서 표기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리듬형은 아래의 6종류가 있는데 모두 3박을 기본단위로 하고 있다.

 

노트르담 오르가눔(Notre Dame organum)

12세기에서 14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성음악 작품의 예술은 북부 프랑스에서 주로 발전하며 이곳으로부터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파리의 노트르담 악파는 멜리스마풍의 오르가눔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노트르담 오르가눔이다.

이 오르가눔은 독창으로 부르는 멜리스마 양식의 양 부분과 성가대가 부르는 단선율 성가 부분이 교대로 나타나는 구성으로 되어 있었다. 노트르담 오르가눔의 새로운 양상은 이 디스칸투스 양식에서는 테너 성부가 한층 짧은 정량 음표로 성립한 것이었다. 이러한 부분은 클라우술라 라고 했다. 13세기 초엽부터 점차 오르가눔의 멜리스마 양식 부분 대신에 디스칸투스 양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오르가눔은 2성, 4성의 구성으로 각각 작곡되었다.

 

폴리포닉 콘독투스

라틴어의 노래로서 정선율에 의하지 않고 그 주선율을 저음에 두며 각 성부가 동시에 동일가사를 노래하는 다성악곡인 콘둑투스는 지금까지 보아온 다성음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르가눔의 테너 성부를 이루던 성가 선율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새로이 작곡된 테너를 사용한다. 양식적인 면에서도 오르가눔과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2성부이든 3성부이든 각 성부간의 리듬 진행이 대체적으로 비슷한 음가들로 되어있어서 오르가눔에 비하면 전 성부가 거의 같은 리듬으로 전개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콘둑투스는 또한 다음적인 양식보다는 단음적인 양식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여러 절을 갖는 유절형식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대부분 1음절 대 1음표의 형태로 작곡되었으며발라드나 롱도와 같은 세속음악의 형식에도 도입되었다. 

모테트

중세 모테트는 정선율(테너)의 지배와 다가사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성적 성악곡이다. 그 시초는 12세기의 2성 오르가눔에 보이지만 초기 모테트가 정형화된 것은 13세기 초엽의 노트르담악파에 이르러서였다. 13세기의 모테트가 구성되기까지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하나의 단선율 성가가 테너 성부로 선택되었다.

이 성가는 리듬 정형 중 하나에 따라 변형되었다.

이 선율 위에 보다 움직임이 빠른 음표로 이루어진 제 2성부의 모테투스와 제3성부인 triplum이 부가 되었다. 이들 두 성부에는 각각 라틴어 또는 그 지역의 말에 의해 종교적, 세속적 또는 양식의 다른 가사가 붙여졌다. 테너성부에는 단선율 성가 선율의 첫 번째 말만 가사로 적용되므로 아마도 악기로 연주되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중세의 다른 다성음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게 3박자가 사용되었고 때때로 불협화음정의 충돌음도 나타났다.

호케투스

호케투스는 13 - 14세기의 다성 음악에서 쓰여진 기법의 하나로 그 어원은 '딸꾹질'에서 유래한 것이라 짐작되는데 선율을 쉼표로 짧게 단절하며 2성 또는 그 이상의 성부 사이에서 서로 엇바뀌어 나타난다. 실제로는 중세의 많은 음악형식에 이 기법이 보였지만 이 기법을 광범하게 사용한 작품을 가리켜 호케투스라 했다.

로타와 론델루스

1300년을 전후하여 쓰여진 또 다른 형식의 작품들은 로타와 론델루스였다. 로타는 단순한 돌림노래, 또는 카논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여름은 오도다>로서 이것은 1240년경의 연대를 갖는것으로추정된다. 이 곡은 영국 기원의 것으로써 영국 중세 음악의 특징, 특히 완전한 수직 화음 조직, 협화음정으로써 3도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 그리고 명확한 장조 조성들의 자취를 많이 보여준다. 이 카논 안에서 두 개의 테너 성부는 페스, 즉 반복되는 베이스 동기를 끊임없이 주고받으면서 노래한다.

론델루스는 노래의 모든 부분들을 각 성부들이 교대 교대로 조직적으로 바꿔 부르는 노래였다. 그래서그 실제 효과에 있어서는 모든 부분들이 돌림노래와 같지만 성부들이 차례 차례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부가 같이 시작한다는 것만이 돌림노래와 다른 것이다.

 
14세기의 음악 (Ars nova시대)

 

Ars nova는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으로 14세기 전반의 음악을 가리키며 아르스 안티콰와 대조된다.원래는 비트리의 이론서의 표제였으나 뒤에 14세기 음악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을 일컫는 통칭이 된 것이다. 이 시대에는 롱도, 비를레, 발라드, 카치아 등의 세속 음악이 중심이 되어 음악에 근대적, 인간적 감각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르네상스로 향하는 징후인 것이다.

 

14세기의 역사적 배경과 음악적 특성

14세기는 봉건적 귀족사회가 붕괴하고 도시 증산계급이 대두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고 종교와 과학이 분리되었으며 교회 내부의 정치적 의견 대립은 교황권을 로마와 아세뇽의 두 곳으로 분리시키기에 이르렀다. 또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의 시작도 이 시기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음악사에 있어서도 이 시기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이게 되는데 북방 유럽에서 발전했던 음악은 이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주도되어 종교 음악보다는 세속음악에 있어서 형식적 발달을 가져왔고 완전 템푸스 보다는 불완전 템푸스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장식 오르가눔, 모테트 등 여러 음악 양식에 사용되었던 리듬 정형은 도외시되고 반면 좀 더 복잡하고 변화가 많은 리듬을 즐겨 사용하였다. 정선율은 사용하는 것이나 음 소재를 차용하는 것보다 작곡가들은 음악 전체를 새로이 작곡하려 하였고 선율상과 리듬상의 관심점이 최고성부에 집중하는 분명한 특성도 지니게 되었다.

란디니 마침꼴(Landini cadence)로 알려진 7-6-1의 선율진행에 의한 마침 방식이 사용되었는데 이 방식은 14세기 15세기 초기의 음악에 여러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었다.

프랑스의 음악양식

프랑스에 있어서 이 시기의 음악은 이탈리아보다 더욱 아르스 안티콰로부터 발전, 확대된 성격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리듬의 복잡성은 이탈리아보다 더 한 층 뚜렷하며 아이소리들에 의한 모테트와 발라드, 롱도, 비를레와 같은 새로운 폴리포니 세속가곡의 양식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 아이소리드믹 모테트

14세기에 들어와 모테트는 다시 중요한 악곡 형식으로 발전했다. 역시 그 중 모테트가 전형적이었으나 가사의 내용은 세속적인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각 성부간의 가사는 서로 내용적으로 관련하는 것이 많게 되었다. 또한 형식의 확대, 화성의 충실, 최상성부의 우위가 현저해졌다.

아이소리듬의 사용은 14세기 모테트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것은 테너, 또는 테너와 그 밖의 성부가 동일 리듬형을 반복함으로 악곡 구조의 통일성이 현저하게 강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반복된 리듬악구를 talea라하고 같은 선율악구의 반복이 일어나는 경우 그것을 color라 하는데 반복되는 부분이 반복할 때마다 color와 talea가 반드시 일치해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2. 발라드

발라드는 몇 개의 연으로 이루어지고 각 연에 AAB의 부분 방식에 따른 동일한 음악이 붙은 샹송의 한 형식이다. 시 형식은 보통 3절로, 각 절은 7 - 8행으로 이루어지며 그 중 1 - 2 행은 리프레인이다. 1절의 형식은 AAB 또는 AABC 로 리프레인만 없다면 독일의 바르형식과 똑같은 것이 된다. 발라드는 대부분의 경우 최상성부에 선율 및 리듬상의 중요성이 놓인 3성의 작품이었으며, 매우 공들여 섬세한 기분을 짜 넣을 수 있는 세속적 다성 성악곡이다.

 

3. 롱 도

롱도는 나중에 <론도형식>의 바탕이 되었고 13세기의 트루베르의 단성가곡에 발생하여 15세기 초기 플랑드르 악파에까지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A-B-a-A-a-b-A-B 의 형식을 취했는데 대문자 A,B는 합창에 의한 리프레인, 소문자 a, b 는 독창으로서 이 때 합창부분을 <롱도>, 독창부분을 쿠플레라 한다. 또한 기악의 롱도에서는 주요 주제와 에피소드와의 관계가 된다. 가장 일반적인 형식으로는 독창 성부와 보다 느린 리듬에 의한 악기를 위한 두 개의 저성부를 가진 악곡이었으며 롱도는 세속 음악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4. 비를레

샹송 발라데라고도 하며 독창과 합창이 서로 엇갈리면서 부르는 무곡풍의 노래로 트루베르에 의한 단성형식에서 발생했다. 시의 각 연에 의거한 AbbaA의 부분 구성에 의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모노포니였다.

 

이탈리아의 음악양식

14세기의 이탈리아 음악은 같은 시기의 프랑스 음악과는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사회적, 정치적 상황의 차이에 기인한다. 이탈리아의 교회음악에서의 다성음악은 대개가 즉흥연주에 의한 것이었다. 작곡가들은 복잡한 작곡양식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정선율 기법을 사용치 않았으며 모테트의 구조적 복잡성에도 거의 흥미를 갖지않았다. 그들의 정신은 시원스럽고 흐르는 듯한 선율과 비교적 단순한 짜임새에 나타난다. 또한 성악양식은 화려하였다. 14세기 이탈리아 음악 양식으로 대표적인 것은 마드리갈, 카치아,발라타이다.

 

1. 마드리갈

마드리갈은 이탈리아에서 개발된 다성 음악 쟝르로서는 처음이며 13세기 다성 콘둑투스와의 역사적인 연관을 보여주는 많은 자취를 갖는다. 보통 2성부를 위해 쓰여졌으며 그 가사는 세 줄의 연을 둘 또는 셋 갖는 전원적, 목가적 혹은 해학적인 시였다. 각 연에는 모두 같은 음악이 붙여졌으며 각 연의 끝줄에는 두 줄이 덧부쳐졌는데 이것은 리토르넬로라 하는 것으로서 다른 박자를 갖는 다른 음각이었다. 두 성부는 같은 가사를 가진 노래를 위한 것이었고 여기에 기악이 중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선율은비슷하게 부드러운 성악 양식으로 흐르지만 위 성부에는 멜르스마 악구로 장식되었다.

 

2. 카치아

카치아는 주로 1345년부터 1370년 사이에 유행한 것으로 보이며 역시 두 개의 동등한 성부에 의한 동음 카논이었다. 즉 두 개의 상성부는 유니즌으로 엄격한 모방을 하면서 불려지는데 그때 그 모방은 제1과 제2성부에서 상당한 간격을 두고 행해졌다. 제3성부에 해당하는 최저성부는 리듬이 자유롭고 느린데 악기로 연주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카치아는 대개 카논을 이용한 리토르빌로가 붙여져서 끝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3. 발라타

발라타는 춤을 위한 노래에서 발생했다. 구조는 시의 구조에 따르고 있는데 보통 3개의 연과 그 전후에 따르는 리프레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3개의 연은 6행, 리프레인은 2행으로 이루어지고 리프레인을 4회 되풀이하는 사이에 연을 3회 되풀이한다. 즉 RS RS RS 로서 음악은 최초의 4행에 작곡되고 다음과 같이 되풀이해서 사용한다.

 

이 경우 A는 represa라 하고 b는 piedi, a는 volta라 불린다. 원래 발라타는 춤을 추면서 불려진 것인데 ripresa가 합창으로 piedi와 volta가 독창으로 불리어진다

 

반음계주의와 Musica Ficta

많은 14세기 음악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인들에 의하여 특별한 풍미가 더해졌는데 그것은 반음계적으로 변형된 음의 사용이었다. 반음계적인 변형은 선법 음계의 7음과 종지 음으로의 상행 해결 사이에 온음이 오게 될 때흔히 사용된 것으로 3도 음정이 동음으로 가까워 질 때에는 단음정이 되어야 하고 6도가 옥타브로확장될 때에는장음정이 되어야 한다는 규칙이 생겨났다. 종지형 이 외의 곳에서의 반음계적인 변형은 화음의 첫 음으로부터 계산하여 감5도나 증4도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특히 선율에서 F-B의 3전음을 피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는데이 음정은 중세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음악 안의 악마'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교회선법에 있어서의 충실한 화성감을 주기 위한 고유음의 임시변화나 선법의 조옮김에 의해서 생기는 반음계적 변화음을 Musica ficta, 즉 '위장된 음악'이라 하였다.

르네상스( 1400년∼1600년 경 )

 

르네상스 음악의 구조적 특징

르네상스 전기의 음악 양식(15세기)

영국과 부르고뉴 음악 양식, 플랑드르의 음악 양식

르네상스 후기의 음악 양식(16세기)

로마 카톨릭, 민족 양식의 등장, 종교개혁과 음악 양식

르네상스 시대의 기악음악 양식

칸쪼나, 리체르카레, 춤곡, 토카타, 변주곡, 즉흥곡

 

이 시대의 음악가

마쇼, 라숫스, 이자크, 팔레스트리나

 

1. 르네상스 음악의 구조적 특징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는 고대 문화의 부흥을 뜻하는 말이다. 음악에 있어서 고대예술의 부흥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나 르네상스를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인문주의적인 예술 창작태도, 조화 및 비례의 중시, 합리적인 기법의 탐구, 명확한 표현과 그러한 음악의 배후에 있는 인간상 등에 착안한다면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친 음악을 르네상스 음악으로 구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음악작품은 중세음악보다 음역이 현저하게 넓어지고 새로운 음공간이 개척되었으며 악보 인쇄술의 발명과 정량기보법의 보급 등의 특징을 보인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와 음악

르네상스 음악의 사회적 상황은 영국, 프랑스, 부르고뉴의 궁정에서 잘 나타난다. 당시 유럽의 정치적 판도나왕실 사이의 결혼관계는 음악양식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지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었고 정치적으로 우세한 국가의 음악 약식이 유럽을 지배했음은 물론이다. 영국의 부르고뉴는 당시 막강한 경제력과 젊은 영토를 소유했다. 이러한 경제적 능력 때문에 유럽의 대부분 음악가들은 부르고뉴 궁정에서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부르고뉴 공화국은 남북의 여러 봉건 영지를 포함하고 있어 이들을 결합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음악을장려하였다.

음악은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계급의 필수적 교양으로서 수공업의 발달로 가능해진 부의 축적으로 나타난 여가 생활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사교 생활이나 교양의 표현으로서 음악은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지적 토론과 모임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이 <아카데미>의 시작인 것이다.

르네상스 후기에 이르러 악보 인쇄술의 발명으로 가정용의 소규모 앙상블 음악이나 류트, 건반악기를 위한 음악이 많이 작곡되어 일반 가정에서도 연주되었다. 또한 근세 시민 사회의 시작과 함께 아마추어 음악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음악은 서서히 사회의 모든 계급에 영향을 주는 예술이 되어갔다.

르네상스는 괄목할 만한 음악문화의 증가를 보았다. 게다가 이 시대의 음악은 자주성을 지녔는데 다시말하면 작곡가들이 작곡을 하면서 특정한 사회적 필요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자유스러워졌다는 의미이다. 처음으로 가능한 모든 음악적 자원들이 사용되게 되었다. 모든 반음계, 성악과 기악의 모든 가능한 음역이 동원되었다. 고정된 시 형식에 더 이상 구애되지 않고 성악 음악은 가사와의 새롭고 친밀한 통일을 달성하였다. 가사 자체의 선택의 폭도 넓어졌으며 일반적으로 그전보다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었다.

이 시대의 특징적인 '이상적'인 음향은 중세의 대조되는 음색으로 된 셋 정도의 다른 성부들 대신 같은 종류의 음색의 비슷한 성격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넷 이상의 성부로 되는 것이었다. 각 성부들은 모방 대위법의 짜임새 안에서 동등하게 음악적 동기들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동등한 중요성을 가졌다. 그러나 조성의 중심을 윤곽 짓는 데에서 두 외성부가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리듬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뚜렷한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어떤 음악은 유려한 리듬으로 움직이는데 그것은 모든 성부의 체계적으로 자유로운 모방을 갖는 대위법적인 짜임으로 될 수도 있고 류트나 건반악기 곡의 어떤 형에서 나타나는 것과 자유로운 즉흥양식을 수도 있다.

움직임은 수직화음의 짜임새가 주도하는 강하게 구분되는 리듬일 수도 있는데 이것은 기악 춤곡이나 세속 성악곡에 나타난다. 이 두 경향들은 두 개의 상반된 전통을 대표한다. 이 둘은 16세기에 있어서 어느 정도 상호작용 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구별된 채 남게 된다.

음악은 가사에 더욱 밀착되거나 가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특히 가사에 제시 된 감정과 영상을 강하고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음악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16세기를 통하여 계속 있었다. 한 편으로는 기악 음악의 대두로 말미암아 가사의 뒷받침 없이 순수히 음악적인 실체로서 완전하고 만족될 수 있는 음악 형식을 창조하려는 욕구를 보였다. 그래서 중세의 은밀한 의미의 형식에서 벗어나 필수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을 갖는 음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각 성부간의 짜임새에 있어서 기악 반주에 의한 성악독창의 구식 칸틸레나 짜임새가 르네상스 기간 중에 전적으로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오랜 동안 경시되었다. 대부분의 르네상스 음악의 기본적인 성격은 여러 성부에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양식으로 된 많은 곡들도 실제로는 한 사람의 독창자와 나머지 성부를 연주하는 기악으로 연주되었던 것이다. 또한 상당수의 곡들은 처음부터 반주가 있는 독창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바로 이런 형의 작품이 특별히 두드러지는 것은 16세기 말의 일이었다.

중세의 다성음악은 2성부 또는 3성부로 되어 있으며 독창자들이 각 성부를 노래하였는데 이 성부들은 비교적 좁은 음역 안에 함께 있으므로 서로 교차하는 경우가 많아서 성부들을 가능한 한 대조시킬 필요가 있었다. 즉 청중이 구별할 수 있도록 각 성부는 서로 대조되는 선율과 리듬으로 되어 있었고 때로는 성부마다 다른 가사를 주어 구별시켰으며 악기나 목소리도 음색의 대비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15세기에 와서는 다성음악의 각 성부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부르게 되었으므로 음향이 더 풍부하고 각 성부가 비슷한 음색을 갖게 된다.

르네상스 중기에 와서는 중세 다성음악의 세 성부인 트리플룸, 두플룸, 그리고 테너 아래에 베이스 성부가 추가된 4성부가 표준화되어서 좀 더 충실한 변화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성악음악의 음역이 확장되어 성부간의 교차를 피할 수 있게 됨으로 중세처럼 서로 다른 음색으로 각 성부를 구별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주제가 모든 성부에 사용되었으므로 이 시대의 음악은 서로 비슷하고 동등한 성부들의 대화와 같아서 주제가 한 성부에서 도입되면 다른 성부들에서 이 주제가 같은 형태로 반복되기도 하고 모방되며 나타나기도 하여 주제는 이 곡을 통일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불협화음에 대한 개념도 변화하였다. 즉 중세음악에서의 불협화음은 작곡과정에서 작곡가가 보통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따온 정선율을 테너에 놓고 여기에 맞추어 윗성부인 두플룸과 트리플룸을 테너 성부기준으로 작곡함으로 인해 두플룸과 트리플룸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의 작곡가들은 모든 성부들을 동시에 작곡하여 각 성부들을 통제할 수 있었으므로 더 조직적으로 불협화음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협화음을 표준으로 사용하였고 불협화음은 종지 직전이나 극적인 순간에 특별한 효과를 위하여 대부분 약 박에서 사용하였다. 이들이 강박에 놓일 때에는 미리 준비한 후 사용하고 해결해 주어야 했으므로 불협화음은 이전보다 더욱 신중하게 취급되었다.

 

 

2. 르네상스 전기의 음악 양식(15세기)

 

15세기는 미술, 문학, 철학에 있어서 특히 현저하게 나타난 중세기에서 르네상스기로 옮겨가는 최종적인 변천을 뚜렷이 보인 시대였다. 이 시기의 음악활동 중심지는 프랑스 및 이탈리아로부터 영국 및 네델란드 지방으로 옮겨갔다.

 

영국과 부르고뉴의 음악형식

앞에서 르네상스 음악의 특징을 고찰하였으므로 영국과 부르고뉴 악파의 음악상 특징을 살펴보기에는중복성을 피할 수 없다. 르네상스 음악의 전반적 흐름에서 영국과 브르고뉴 악파의 음악상 독특한 특징을 몇 가지만 부인하면 다음과 같다.

 

선율 진행은 많은 3도 진행을 사용해서 특징을 부여했다.

3박자는 14세기보다 더 한층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화성적 진행양식을 형성하는 경향이 강했다.

병행6도 진행의 프레이즈가 영국에서는 디스칸트, 유럽 대륙에서는 포부르동으로 불리며 널리 사용되었다.

모방법은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란디니 마침꼴은 종전대로 널리 사용되었다.

 

1. 미 사

미사의 통상문을 폴리포니 형태로 작곡하는 것이 표준적인 전례형식이 되었다. 작곡가들은 종종 단선율 성가를 테너 성부에 사용했으나 또 때로는 세속가의 선율을 정선율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2. 모테트

15세기 이후 모테트는 종교적인 내용으로 다시 변모하게 되었다.15세기 전반의 부르고뉴 악파에서는 4성부가 표준화되고 각 성부는 공통의 가사를 지니고 상성부의 자유로운 표현력이 증대했다. 여기에 이르러 중세 모테트의 2대 특징이었던 多가사성과 정선율 지배가 모두 표기된 것이다.

 

3. 캐 롤

영국에 있어서 15세기의 사람들에게 친숙해진 즐거운 성격을 띤 종교적 계절노래이다. 이것을 동일한 음악과 버든이라고 하는 반복부를 다수의 연으로 이루어진 종교시에 붙이는 형태를 취하는 가곡이었다.

 

4. 폴리포닉 샹송

15세기를 통해 불려진 세속가곡의 주된 형식으로서 프랑스어의 세속적 가사에 음악이 붙은 것이었다.대부분 샹송은 상성부에 주요한 선율을 가지는 독창 가곡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플랑드르의 음악 양식

 

15세기 후반에는 플랑드르 악파의 활동이 활발해 졌는데 이들의 음악 기법은 곧 유럽에 보급되고 16세기 음악을 지배할 만큼 뛰어난 양식을 확립했다. 역시 중복되지 않은 몇 가지 특징을 첨가하면 다음과 같다.

 

모방법은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논의 몇 가지 새로운 수법이 창출되었다.

포부르등과 란디니 마침꼴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정격마침( Ⅴ-Ⅰ)과 변격 마침 ( Ⅳ-Ⅰ)은 교회선법의 마침꼴보다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패시지를 교체시켜 성부를 맞대어 진행시키는 2중창 양식이 널리 사용되었다.

무지카 레제르바타(예비된 음악)라는 한층 더 표정이 풍부한 양식을 창시했다.

 

1. 카 논

카논이라는 형식은 14세기에 카치아로서 처음 개발되어 15세기초기에는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다가 15세기 후기에 이르러 중요한 형식이 되었다. 여러 가지 음높이와 시간적 간격으로 모방하는 기법 외에 확대볍과 축소법, 정량카논, 자리바꿈법, 역행법, 더블카논 등의 모방기법이 나타났고 이러한 카논 형식은 미사나 모테트에 사용되었다.

 

2. 미 사

카논 기법에 의한 확대된 미사 외에 정선율 미사, 또는 순환미사라고 하는 다른 작곡법에 의한 미사도 있었다. 이 미사에 있어서는 통상문 각각의 계속적 부분에 동일 선율이 일관해서 사용되었다. 이 정선율에는 대개 단선율 성가가 사용되었으나 때로는 세속 가곡의 선율이 사용되었다. 정선율에는 대개 표제가 붙었는데 정선율의 기초를 두지 않은 유형의 미사는 Missa sine nomine(명칭 없는 미사)라 했다. 또 soggetto cavato (도출된 주제)라고 하는 작곡법은 명칭이나 프레이즈의 모음에서 발생한 주제로 선율을 구성하는 방법이었다.

 

3. 모테트

플랑드르 악파에 있어 가장 전형적인 모테트는 라틴어의 전형적인 가사에 의거하는 4 ∼ 6 성부의 합창곡으로서 미사와 함께 중요한 악곡 형식이었다. 15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발전은 각 성부가 평등하게 모방에 참가하는 통모방법의 성립으로 오케켐이나 오브레히트 이 후 이 양식은 모테트의 중심을 이루었다. 모테트 작곡에 있어서 정선율은 폴리포니의 통상문 작곡에서만큼 빈번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3. 르네상스 후기의 음악 양식(16세기)

 

16세기는 르네상스의 절정기이다. 이미 15세기 후반부터 활발한 활동을 보인 폴랑드르 악파의 음악 기법이 종교 음악과 세속음악의 양 분야에서 아직도 지배적이었으며 성악 영역의 음악양식은 최고의 지경에 다다름과 한 편 기악의 독립이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16세기 발생한 종교개혁 후 프로테스탄트 교회음악은 독일, 프랑스, 영국에서 점차 발달하니 얼마 후 바로크 시대 말에는 그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세속음악은 귀족의 보호아래 꾸준히 새로운 중요한 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교회선법은 아직 종교음악과 세속음악 양 분야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장조나 단조의 조성으로 향하는 경향이 많은 악곡에서 나타났다.

 

로마 카톨릭

16세기 초기에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들에 의해 구축된 전통적 기독교인 카톨릭의 예배용 음악 양식은 16세기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다. 좀 더 복잡해진 기법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구조상의 특징은 성부의 동등성이다.

성부수는 3성에서 8성 또는 그 이상이었으나 5성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생략 없는 3화음 구성은 악곡에 풍부한 화성적 음향을 부여했다.

15세기와 마찬가지로 화성적 진행양식이 푸가풍 양식에 의한 부분이 종종 섞여져 나타났다.

불협화음정은 도움음, 선행음, 걸림음, 캄비아타의 경우에 한정하여 사용되었고 해결은 엄격한 것이었다.

주로 온음계적 이었으나 16세기 말에는 반음계법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 미 사

단선율 성가나 세속 가곡에 의한 정선율 미사와 시네 노미네 미사가 주된 종류였고 그밖에 15세기 후기에 파로디 미사가 태어났다. 이 파로디 미사에 있어서는 완전한 모테트 또는 세속적 샹송이 음악면에서 미사의 통상문 가사에 어울리도록 변화를 가했다. 완전히 표준적인 미사는 16세기 초기 이후에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

 

2. 모테트

모테트의 구조에는 16세기 초 플랑드르 악파 작곡가들의 기법이 계속 사용되었고 현저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푸가풍의 모테트에 있어서 잇달아 나타나는 가사의 프레이즈는 각각 새로운 주제 또는 동기를 소개하고 이들 주제나 동기는 그 후 다른 성부에서 모방되었다. 하나의 행과 다음의 행을 가르는 가사의 구분점은 모방점이라 했으며 성부가 서로 겹쳐 그 결과 앞 가사의 행이 다른 성부에서 끝나지 않은가운데 가사의 새로운 형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성부에서 그에 적합한 새로운 주제나 동기를 수반해서 소개되었다.

 

민족 양식의 등장

1. 이탈리아

프로톨라

프로톨라는 15세기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쳐 북이탈리아에 있었던 시와 음악의 형식이다. 시의 프로톨라는 앞뒤에 반복부인 리프레인이 3개 또는 4개의 스탠져로 이루어지며 14세기의 발라티나 현대 스페인의 빌랸시코와 비슷하다. 음악은 각각 짧은 악구로써 이루어지며 여러 가지 음형으로 편성된다.

 

시 r r s s s r r
음악 a b a a b a b

1실러블 1음절이 보통이며 음역은 좁고 되풀이가 많고 악구가 각각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어 각 성부는동일한 리듬으로 통일되고 대위법적인 모방은 적다. 프로톨라는 류트의 반주를 곁들인 화성적 처리를 한 다성악 또는 독창곡으로 가벼운 것은 빌라네스카가 되어 네델란드 악파에 영향을 주고 마드리갈의 바탕을 이루었다.

 

라우다

프로톨라와 대응되는 종교적인 노래는 다성 라우다로서 대중적이며 비의전적인 봉헌 노래였다. 가사는 이탈리아어 또는 라틴어였다. 이것은 4성부 음악에 맞춰졌으며 선율은 세속 노래에서 가져올 때가 많았다. 라우다는 보통 비정규적인 모임에서 노래되었으며 연주는 아 카펠라나 또는 아래 세 성부를 기악으로 연주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톨라와 마찬가지로 단음절적, 화성음악적이 그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며 선율은 언제나 최고 성부에 있었다. 라우다는 그레고리안 주제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네델란드 교회 양식의 자취도 보여주지 않았다.

 

마드리갈

마드리갈은 16세기 이탈리아의 세속 노래 중 가장 중요한 장르로서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가 처음으로 유럽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음악은 시가 의도하는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시가 내포하는 내용과 분위기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16세기의 마드리갈이 탄생하였다. 16세기의 마드리갈은 14세기의 마드리갈과 무관하다. 즉 14세기의 마드리갈은 리토르넬로라는 반복이 있는 유절 형식의 노래이나 16세기의 마드리갈은 리토르넬로가 없을 뿐 아니라 통절 형식이므로 15세기까지 사용되던 정형시 형식에서와 같은 선율이나 가사의 반복이 전혀 없다.

 

* 초기(1525 - 1545)

초기 마드리갈은 3성 내지 4성의 것이 많고 플랑드르 악파의 모테트를 상기시킬만한 모방 수법과 프로톨콰 풍의 호모포니 기법이 절충되어 있다. 또한 4박자 리듬이며 명확한 종지로 형식을 구분 지어주는 점이 프로톨라 및 프랑스 샹송과 비슷하나 리듬과 화성이 더 다양하며 선율도 더욱 세련되고 개성적이다. 특히 4도 또는 5도 도약을 자주 보이는 베이스 선율은 교회선법과 장, 단조 조성의 혼합을 보인다.

* 중기(1545 - 1580)

5성부의 기법이 중심이 되고 음악은 더욱 더 폴리포닉하게 되었다. 가사의 내용을 표현하기 위하여 특정한 음형과 화성진행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마드리갈리즘도 행하여지고 반음계법을 사용하여 화성 효과도 더욱 풍부해졌다.

* 후기(1580 - 1620)

성악 폴리포니의 틀에서 벗어나 상성부와 통주저음부를 무시한 새로운 표현양식이 채택되어 콘체르타트 양식, 표출양식이 시도되었다.

 

2. 프랑스

샹 송

15세기 중엽 프랑스의 샹송들은 궁정에서 쓰이는 정형시에 윗성부가 지배적인 부르고뉴 양식으로 작곡되었으나 15세기 후반에 와서는 죠스 갱과 뷔느와 등에 의하여 서로 동등하고 모방적인 다성성부를 갖는 네델란드 양식으로 작곡되었다. 이와 동시에 정형시 형식도 덜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 당시의 샹송은 모방적인 모테트와 비슷하였지만 그 용도와 가사가 모테트와는 달랐으며 흔히 리듬으로 시작하는 샹송이 더 리듬감이 있고 경쾌하였다.

 

정률음악

16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몇몇 시인들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된 시에서와 같이 음악과 시는 일치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하여 시에 선율 부치는 방법을 고안한다. 그 방법을 요약하면 가사의 긴 음절에는 긴 음가를 사용하고 짧은 음절에는 긴 음절의 1/2음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곡된 정률음악은 가사를 명확하게 들을 수 있도록 수직화성적이고 거의 항상 모든 성부가 같은 리듬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 기법은 너무 인위적이어서 예술적인 표현에 제약이 많으므로 곧 쇠퇴하게 되었다.

 

3. 독 일

다성 리트

독일에서도 부유한 상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그들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다성리트가 생기게 되었다. 독일 선율과 네델란드 다성음악 기법을 잘 조화시켜 작곡된 리트는 주선율이 테너에 놓이게 되므로 테너 리트라고도 하였다. 16세기 초반에는 많은 다성리트 모음집들이 출판되었는데이들은 가정이나 모임에서 연주될 음악이었던 것 같으며 악보에는 모든 성부에 가사가 붙어 있지만 악기와 인성을 자유로이 섞을 수 있다는 지시가 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독일인들의 흥미가 이태리의 마드리갈이나 빌라넬라로 기울어지면서 리트는 쇠퇴하게 되지만 이들은 독일 신교음악인 코랄의 음악적인 원천이 된다.

 

4. 스페인

로만스

로만스는 가사가 유절적이고 설화적인 발라드의 일종으로 음악 역시 유절형식에 주선율이 윗성부에 놓이는 수직화성적인 짜임새이다. 로만스가 어떻게 연주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대체로1550년경까지는 궁정에서 각 성부를 한 사람 또는 몇 명이 부르는 합창형식으로 연주된 것 같으나 필사본을 보면 첫째 연의 주 선율 아래에만 가사가 붙여진 것으로 보아 독창성부에 기악반주로 연주되기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비얀시코

비얀시코는 <농부>를 뜻하는 비야노의 축소형으로 중세 스페인의 춤추며 부르는 후렴 있는 노래 가사에서 유래하였다. 이 노래 는 그 반복적 형식이 프랑스의 비를레나 이태리의 발라타(A-b-b-a-A)와 비슷하지만 일정한 유형이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음악양식은 이태리의 프로톨라와 매우 유사하여 주선율은 단순하고 선율스러우며 윗성부에 놓인다.

 

종교개혁과 음악 양식

 

종교개혁

독일을 선두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로마 카톨릭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16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중의 하나로 이 극적인 사건은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의전 및 행정적 개혁뿐만 아니라 교회의 부패를 없애려는 운동이었으며, 동시에 교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을 만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었다. 종교개혁가들은 예배의식에 라틴어만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자연히 각 국가의 신교교회에서는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예배의식이 생겼다.

 

1. 신교의 음악 양식

코 랄

루터교회음악의 핵심은 코랄인데 이것은 교회노래라고도 하고 현대 용어로는 찬송가라고도 한다. 현대의 찬송가는 보통 4성부곡 이지만 코랄은 원래 가사와 하나의 선율만으로 이루어진 독일 찬미가로 반주 없이 불렀으므로 이것은 중세의 단성 성가에 비견된다. 중세 이후의 구교음악이 단성성가에서 발생된 것과 마찬가지로 17,18세기의 루터교회음악도 이 코랄에서부터 발전되었다.

 

콘트라 팍툼

콘트라 팍툼은 원래의 가사를 새 가사로 대체하는 성악 작곡법으로 즉, 세 속의 노래를 종교 노래로 바꾼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이다. 신교는 세 속의 노래가 가사를 바꾸어 친밀감 있는 많은 찬송가를 제정하였다.

다성 코랄

루터교회의 작곡가들은 일찍부터 합창대를 위하여 다성코랄을 작곡하여 출판하였는데 여기에 수록된 곡들은 다양한 종류의 다성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양식들을 보면, 첫째로 독일 리트에서와 같이 코랄선율이 정선율로 취급되어 긴 음표로 테너에 놓이고 3개 이상의 다른 성부들이 모방이 아닌 독립된 모티브로 자유롭게 감싸거나, 둘째로 네델란드 모테트와 같이 코랄의 각 악구가 모든 성부에서 모방적으로 발전되고, 셋째로 코랄선율이 테너에 놓이고 다른 성부들은 수직화성적 짜임새에 가까운 대위선율로 이루어지고, 넷째로 코랄선율이 제일 윗 성부에 놓이고 모든 성부가 수직화성적 짜임새로 되어있다. 16세기가 경과됨에 따라 점차로 윗 성부에 주선율이 놓이는 양식이 우세해져서 마침내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코랄은 대부분 모든 성부가 수직화성적 짜임새이고 찬미가풍으로 단순한 리듬이며 주선율이 놓이는 칸티오날 양식으로 작곡된다.

 

코랄 모테트

단성성가가 중세 모테트의 원천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코랄선율은 신교 작곡가들의 코랄 모테트의 원천이 되었는데 이 발전과정은 중세 모테트의 발전과 유사한 경로를 거치게 된다. 즉 2성 또는 3성 코랄 모테트는 중세의 모테트와 같이 코랄선율이 최저성부인 테너에 놓이고 다른 대위선율이 첨가되었는데 이것은 중세의 작곡가들이 성가를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나 해석을 첨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려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코랄의 가사와 선율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16세기말에 이르면 이러한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여 15세기 종교음악 작곡가들이 했던 것과 같이 코랄 선율을 자유로운 예술창작의 재료로 사용하고 여기에 예술가들의 해석을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코랄선율이 모든 성부에서 모방적으로 다루어지거나 또는 이 선율을 한 성부에 놓고 다른 성부들이 모방 대위적으로 진행되는 코랄 모테트를 작곡하게 되었다. 코랄 모테트의 출현으로 신교의 교회음악은 회중이 부르는 단순한 칸티오날 양식의 찬송가와 전문적인 합창단이 부르는 장식적인 음악으로 확실하게 구분되었다.

 

2. 구교의 음악 양식

팔레스트리나 양식

팔레스트리나에 의하여 대표되는 폴리포닉한 아 카펠라 양식에 의한 합창양식을 가리킨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양식은 그의 미사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들은 네델란드의 모방대위법적인 양식에 기초를 둔 것으로 어떤 악장에서는 기사의 각 구절마다 새로운 동기가 도입되고 다른 성부에서 차례로 모방되는 <모방 기점>이 사용되고 또 다른 악장에서는 모방적인 부분과 수직화성적인 부분이 교차되며 변화를 주기도 한다. 또한 가사의 정확한 전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다성적인 짜임새가 가사의 전달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반음계주의를 철저하게 회피하여 무지카 픽타 이외에는 반음계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음악은 다른 작곡가의 음악보다 부드럽고 투명한 음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선율선 또한 자주 3화음적인 진행을 보이고 베이스도 4도 또는 5도 도약이 많아서 조성적인 경향이 강하지만 그의 음악은 선법에 기초한 곡으로 조성적으로 분석될 수는 없다.

 

4. 르네상스 시대의 기악음악 양식

 

르네상스 기악곡들의 초기단계는 마드리갈, 샹송, 모테트와 같은 노래선율에 트릴이나 빠른 음계, 또는 꾸밈음을 첨가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음색작업은 대부분 악기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처리하였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작곡가들이 첨가음을 기보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을 모방한 기악곡들이 생기게 되었다. 르네상스 기악 양식의 특색 있는 수법은 다음과 같다.

 

아주 빠르고 긴 음계적 패시지.

수많은 큰 도약.

성역의 한계보다 한층 넓은 선율적 음역.

 

류트나 건반악기의 악곡 중에서 지시된 쉼표 없이 자유로이 부가되거나 제기되는 대위법적 성부.

광범한 장식법.

보다 자유로운 불협화음의 처리법.

칸쪼나(canzona)는 이태리어로 <노래> 또는 <샹송>을 의미하는 말로 이태리에서 다성샹송을 악기로 편곡한 것을 프랑스 샹송(canzon francese)또는 악기로 연주되는 샹송(canzon da sonar)이라고 하였다. 이 기악곡들은 이름 그대로 프랑스의 샹송을 모방하여 작곡한 것으로 샹송의 특색인 빠르고 경쾌하며 리듬감이 강한 선율과 단순한 다성적 짜임새를 보이고 있으며, 시작 부분 또한 샹송 특유의 리듬으로 시작되고 있다. 작곡가들은 건반악기를 위한 독주 칸쪼나 외에 몇 개의 악기들을 위한 앙상블 칸쪼나도 작곡하기 시작하였는데 초기의 칸쪼나들은 대부분 한 개의 주제이거나 서로 비슷한 몇 개의 주제들이 계속 모방되며 다성적으로 발전되는 곡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 칸쪼나들은 서로 다른 성격의 주제들로 구성되어 한 주제가 도입되고 모방된 후 일단 종지되고 또 다른 성격의 주제가 도입됨으로 서로 대조되는 몇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6세기말 경에는 이 부분들은 차츰 그 길이가 길어지고 더욱 대조되고 분명히 나뉘어지는 독립된 악장을 이루게되어 17세기의 교회소나타(sonata da chiesa)로 발전된다.

 

리체르카레

리체르카레는 푸가의 전단계를 이루는 모방적 기악형식인데 16 - 17세기의 많은 기악 작품에 쓰였던 명칭이다. 칸쪼나가 샹송을 모방한 기악곡이라면 리체르카레는 모테트와 비슷한 짜임새를 보이니 '가사없는 모테트'라고도 할 수 있는 성격이 짙다. 즉 이러한 모방적 리체르카레는 르네상스 시대의 성악 모테트의 양식을 기악에 적용한 데서부터 시작되어 모테트처럼 몇 개의 주체의 모방적 처리가 그 주요한 특징이다. 이에는 기악 합주용과 오르간용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이 중 오르간 리체르카레는 16세기 중엽에 시작되어 점차 성악 모테트 양식으로부터 탈피, 모방부를 확대하거나 기악 특유의 즉흥적 패시지를 삽입하는 기악 형식으로 발전했다. 16세기에는 연습곡이라든가 자유양식에 의한 즉흥적인 성격의 곡에도 리체르카레라는 명칭이 쓰이기도 하였다.

 

춤 곡

춤곡들은 곡의 기능상 리듬이 확실하고 규칙적이어야 했으므로 모방적인 짜임새는 보이지 않고 주선율이 장식되는 것이 보통이며 분명히 구분되는 몇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또한 춤곡들은 성악곡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발생되었으므로 자유롭게 기악곡 양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후에는 독립되어 춤을 동반하지 않는 연주용 기악곡으로도 작곡되었으나 춤의 특징적인 리듬과 짜임새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춤곡은 중세부터의 관습대로 2 3개씩 짝지어 작곡되었는데 가장 흔한 짝은 파반느와 갈리아르 또는 파싸메쪼와 쌀타렐로 등이다. 대개 첫 곡은 위엄 있고 느린 2박자인 반면 두 번째 곡은 경쾌하고 빠른 3박자로 첫째 곡을 반주하므로 이들은 춤곡인 동시에 변주곡의 일종이기도 한다. 16세기 중엽에는알르망드 또는 알망이라는 보통 빠르기의 2박자 춤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빠른 3박자의 쿠랑트도 합세하여 이 두 춤곡들은 바로크 시대의 춤 모음곡의 기본 악장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서로 대조되는 춤들이 짝지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춤곡들은 후에 다악장 형식인 춤 모음곡과 실내 소나타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토카타

16세기 후반에 유행한 오르간 즉흥곡인 토카타는 이태리어로 <만지다>를 의미하는 토카레에서 유래한 것으로 오르간 주자가 건반위에서 즉흥연주하는 것을 암시하였다. 즉 음을 길게 유지 할 수 있는 오르간의 특성을 이용하여 한 손에서 음을 지속시키는 동안 다른 손에서 빠른 음들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변주곡

다성성악곡을 건반악기나 류트 독주로 연주할 때 제일 윗 성부를 장식하여 원래의 선율을 변형시키면서 연주하는 변주기법은 중세에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는 베이스에서 짧고 단조로운 노래나춤곡이 계속 반복되는 동안 다른 성부에서 변주되는 일련의 변주곡들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주곡들은스페인과 영국에서 특히 발달되었는데 이 베이스에 즐겨 사용된 선율은 파반느에서 유래하였다. 변주곡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칸투스 피르무스 변주곡

일정한 멜로디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그 멜로디는 변화가 없거나 극히 작게 변화되어 여러 번 되풀이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리고 되풀이될 때마다 그 멜로디는 다른 대위법으로 반주가 붙어서 다른 성부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주제와 변주

파퓰러 튠에 의거하는 것으로서, 그 튠은 되풀이될 때마다 수식된 형태를 취하는 것이었다.

 

헥사코드 변주곡

영국의 헥사코드 바리에이션 hexachord variation 이라는 것 음계 중 처음 여섯 개의 음을 주제로 사용한 것이다. 이 종류의 변주곡은 대개 <우트 레 미 파 솔 라>라고 하는 표제가 붙고, 버지널용 악곡으로 널리 연주되었다.

 

그라운드

베이스 성부에 배치된 4마디에서 8마디의 짧은 주제에 의한 것으로서 상성부는 계속적으로 변화, 풍부한 대위법의 형태를 취한다.

 

즉흥곡

기악음악은 즉흥연주를 통하여 많이 발전되었고 각 악기 특유의 연주 기법도 개발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하던 즉흥연주 방법은 첫째로 원래 있던 선율을 정선율로 하고 여기에 다른 성부를 첨가하거나, 둘째로 원래의 선율을 장식 또는 변형하기도 하고, 셋째로 어떤 선율이나 형식, 화성 등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독주악기를 위한 기악곡들은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즉흥양식의 춤곡들로 이들은 일정한 박자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짜임새를 보이며 자유롭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곡들은 프렐류드, 프리앰불룸, 판타지아, 또는 리체르카레라고도 불리었다.

 

바로크( 1600년∼1750년 경 )

 

바로크 음악의 이해

특징, 사회적 고찰

바로크 음악의 성악곡

단일 악장, 혼합 형태

바로크 음악의 기악곡

단일 악장, 혼합 형태

 

이 시대의 음악가

 

몬테베르디, 쉬쯔, 퍼셀, 륄리, 파헬벨, A.스카를라티, D.스카를라티

코렐리, 비발디, 페르골레지, 북스테후데, 바흐, 헨델, 타르티니

 

1. 바로크 음악의 이해

 

바로크란 통설에 의하면 포르투갈어의 바로코-barroco를 어원으로 하는 말이다.

본래 바로크라고 하는 말은 18세기 고전주의적 위치에서 16세기말 이후의 예술양식을 볼 때, 르네상스예술의 고전적 균형감에 대하여 왜곡된 기묘한 프로포우션을 가진 타락한 취미로 보인다고 하는 해석에서 그것을 비방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리글, 벨프린 등의 독일 미술사가에 의하여 이 시대의 예술작품에도 르네상스의 예술과는 다른 독자적인 표현이념이 있으며, 그 자체로서 훌륭한 가치가 있음이 인정된 결과 예술사의 시대양식 개념으로서 적극적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음악사 분야에 이것을 처음으로 이행시킨 것은 1920년의 작스의 논문 <바로크 음악>이다. 이 논문에서 작스는 벨프린을 본받아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예술 사이에는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평면효과와 심층효과, 닫혀진 형식과 열려진 형식, 다수성과 통일성, 명료성과 불명료성의 5쌍의 대립하는 개념이 인정된다는 점을 음악분야에서 입증하려고 시도하였다. 한 권의 책에다 <바로크 음악>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934년 하스의 <Musik des Barock>가 최초이지만, 그 뒤 이 말은 다수의 논문, 저작에 되풀이 사용되어, 이제는 음악사상의 시대양식 개념으로서 확립된 감이 짙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

우선 음공간의 조직에 대해 살펴보면, 리만이 <통주저음의 시대>라고 하는 술어로써 특색 지운 것처럼, 통주저음의 지배를 받은 시대이며, 외성이 서로 긴장감을가지고 수평으로 대립하여, 음력적(音力的)으로 약간 희박한 통주저음의 화성이 수직적으로 그것을 매개한다는 원리를 특징으로 한다. 그 때에 통주저음은 저음의 선율선을 맡는 것과 동시에 내성부의 화성을 메운다고 하는 2중의 기능을 띠고, 그 존재는 성악, 기악을 불문하고 바로크적인 앙상블에 있어서 불가결한 것이다. 또, 음공간의 조직과 표 일체의 관계를 이루는 것에는 바로크 시대의 음색상이 있다. 음색의 수직적인 동질성 또는 융화성보다도 수평적인 독립성을 중시하고, 외성부가 강화된 관현악법과 일반적으로 관통력이 날카로운 울림에 대한 기호가 이 면에 있어서 지적될 수 있다. 바로크 오르간의 구조와 성격은 위의 특징을 잘 축소하여 나타낸 것이다.

음악 형식상으로 보면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악곡의 부문 구조에 있어서 단일주제성과 전체 구조에있어서의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양자는 몬테베르디의 극음악과 프레스코발디의 오르간 음악 등, 초기 바로크 작품에는 상호간 침투하여 다이나믹하고 유동적인 형식감을 자아내고 있다. 한편, 18세기에 들어온 수기 바로크 작품에서는 양자는 차차 명확히 갈라져 전자는 미크로 코스모스적인 질서를 지향한다.

바하의 평균율 세계는 이와같은 바로크적인 질서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바로크 시대에 즐겨 쓰인 변주형식과 모음형식, 또 나폴리악파의 극음악에 있어서의 셰나모 성법도 같은 의식하에 존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요소적, 단일적인 것을 중시하며 그 집합 또는 종합으로서 대형식을 만들어 나간다는 형식원리는 바로크음악에 있어서 강약법이나 속도법에도 엿보인다. 크레센도나디미누엔도 등의 연결이 없는 포르테와 피아노의 계단형의 대비, 이른바 테라스형의 다이나믹이 바로크음악의 강약법의 기초이다. 속도법에 있어서도 점차로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변화는 희귀하며, 이 두 빠른 알레그로와 칸타빌레적인 아다지오가 악장을 단위로 인접하면서 대형식을 이루어간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표현내용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은 <아펙트>이다. 그러나 <아펙트>의 표현은 낭만파의 미학에 있어서 개성적인 감정의 표현과는 질을 달리하며, 객체화되고 유형화된 인간감정의 묘사나 표현인 것을 특질로 한다. 감성과 함께 오성의 작용이 요구되어, 각종의 비유적 또는 상징적인 표현을 매개로 하여 <나타내는 것>과 <나타나는 것>의 범위 안에서는, 앞에 말한 <아펙트>외에 공간표상, 운동표상 및 음악적인 여러 요소에 의하여 상징되는 것이 가능한 그 밖의 의미에서의 관련이 포함된다.

 

사회적 배경

 

바로크음악은 절대주의의 왕정을 배경으로 하는 궁정생활, 근세의 시민 사회의 상승기에 있어서 도시의 시민 생할 및 유럽의 정신 생활 전반에 대하여 더욱 보편적인 규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가의 사회적 존재는 서로 교류하였다고 해도, 궁정음악가, 도시음악가, 교회음악가의 어느 것에 속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신분에 맞은 음악적인 가요의 형식과 기회에 따라 활동을 하였다. 그런고로, 그들의 장작과 연주는 한편으로는 기회 음악적인 성격이 강하고, 지역적, 인습적인 것으로 빠져버리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일상적인 수요에 관련되는 것에 의하여 건전한 보편성과 목적에 적합한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의 의식에 있어서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한정된 사회의 중심인 자기 신분에 대한 관심과 직업적인 예술로서의 스스로의 기교에 대한 자세이다. 프로토리우스의 <음악대전>(1615∼1620) 이후 마테존의 <완전한 악장>에 이르기까지,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가 저술하여 남긴 저작물의 포괄적인 체계성과 그 배후에 있는 인문주의적 교양의 넓이는 실로 감탄할만한 것이다.

일반적인 시대구분으로서 바로크 시대는 16세기 말에서 바하, 헨델의 활약이 끝나는 18세기 중엽쯤까지의 거의 1세기 반을 포함하는 것이 정설이다. 그것을 또 특징 있는 몇 개의 시기로 세분한다면 초기바로크를 1580∼1630년, 중기바로크를 1630∼1680년, 후기바로크를 1680∼1750년이라고 하는 부코프찌의 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하겠다. 특히 바로크 시대 음악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관찰하는 경우, 이 시대구분은 극히 적절하다. 그러나, 같은 1세기 반 사이에도 나라와 지역에 따라 나타나는 음악상의 여러 현상의 시기적 또는 성격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2. 바로크 음악의 성악곡

단일 악장

1. 서 창

고도로 변화된 낭독조로 된 양식 중 길거나 혹은 짧은 악절은 레치타티보로 알려졌다. 단성 음악의 서정적인 선율 부분과 구별되어 나타난 서사적인 양식의 낭독 형태이다. 17세기 말 경에는 아리아와 서창의 분명한 구분이 완성되었다. 서창은 대사를 읊게 되어 있어서 아리아로 최고도의 감정이 표사되는 사이사이에서 소재를 연결시키거나 혹은 서주로서 그 역할을 한 것이다. 서창은 아리아가 갖는 형식적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리듬도 자유로운 형태로 되어 있고, 산문 대화를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심각한 장면인 경우 서창은 전체 오케스트라로 반주되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오페라적인 이야기는 숫자 저음을 실현한 하프시코드에 의해서만 반주되었다. 전자의 경우를 반주부 서창, 후자를 세코 혹은 건조한 서창이라고 일컫는다.

 

2. 아리아

라프레젠타티보 양식에서 더 선율적인 악절은 형식적 특성을 취하여 마침내 아리아엣 설명적인 부분을 분리시켰다. 이런 아리아의 가장 전형적인 것은 네오폴리탄 오페라 악파에 의해 발전된다. "다카포 아리아", 또는 3부로 된 것을 들 수 있다. 이 형식은 세속적 그리고 종교적인 모든 음악극적인 작품을 위한 작가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리아 형식은 또한 듀엣이나 트리오와 같은 합주에서 자주 적용되었다.

 

3. 아리오소

서창 형식과 서정적인 아리아 형식을 혼합시켜 독창용으로 만든 자유로운 성악곡 형태이다. 아리아와 아리오소도 전체 오케스트라로 반주된다. 아리오소는 또한 성악과 관현악 반주를 이용하여 분위기를 급격히 변화시키고자 하여 사용되었다. 아리아와는 달리 아리오소는 형식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4. 코러스

합창과 합주 악절은 특별한 형식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오라토리오나 미사곡 작법에서는 대위법적구성이 우세했으며, 단성 음악 구조로 오페라 곡에서 지배적이었다. 독주로 노래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코랄 악절은 바로크 오페라에서는 드물게 사용되었으며, 행위의 필요한 부분으로서 극적인 사건이 요구될 때에만 나타난다.

 

5. 모텟트

바로크 시대에도 르네상스 시대의 무반주 코랄인 모텟트의 전통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구성법만은 르네상스 시대의 선법인 대위법이 아닌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조성 대위법으로 되었다. 모텟트는 일반적으로 의전적인 성격을 띄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6. 콩세르 스피리튀엘

Geistilich Konzerten 등 여러 가지로 콘체르타토 양식에서 흔하게 작곡되었다. 지속되는 몇 개의 성부 혹은 몇 개의 합주 악기로 제한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단지 하나의 성부만을 위한 것이었다. 17세기 독일작곡가들은 이와 같은 형태의 악곡이 루터 교회 예배시의 칸타타와 같은 방식으로 많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자주 쓰인 악곡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7. 앤 덤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은 영국 국교회를 위한 찬미가의 작곡을 계속하였다. 바로크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형식은 운문으로 된 찬미가를 극적인 양식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8. 독창곡

독창곡은 비록 주된 형태는 아니었으나 독일 작곡가들이 흔히 지은 형식이다. 유절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기악 반주를 가진 2부 혹은 3부 형식의 아리아로 된 민요풍의 곡이기도 하다.

 

1. 오페라

바로크 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혼합 성악 형태로서 극적이었으며, 처음에는 "음악극"이라고 일컬었다. 귀족, 시인, 그리고 플로렌스 지방 음악가들의 집단에서 이 형식을 시도한 데서 비롯된다. 이들은 카메라타로 알려져 있다. 대사가 음악을 주도하고 리듬을 조화 있게 표현하는 극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이와 같은 욕망의 표현은 '단성 음악 양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페라는 원래 세속적인 주제에 드라마 형식을 가미한 것이었다. 초기 오페라는 그리스 신화에 배경을 두어 만들었으나, 후기에는 역사, 전설 및 소설적 영웅을 주로 다루었던 것이다. 정가극과 희가극 사이의 구분은 17세기 말에 생겨났다.

오페라는 오케스트라, 합창 그리고 독주자들을 사용하였다. 연주는 적당한 무대 장치와 극적인 표현으로 공연되었다. 처음에 오페라는 궁정 같은 환경에서 비공개로 보여주기 위해 행해졌으나, 곧 극장이나 오페라 하우스가 건립되어 대중들에게도 공개 연주되었다. 음악적으로 볼 때 오페라는 아리아, 합창, 춤, 듀엣 및 기타 합주 악보와 같은 여러 형태를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음악은 구조에서 다분히 단성으로 되어 있다. 코랄 악절은 초기 오페라에 잘 되었으며 마침내 무의미한 부분은 축소시켰고, 그 대신 독창 아리아가 받아들여진 반면에 더욱 주의를 요하게 되었다. 17세기 말 경 오페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컸기 때문에 독창곡은 오페라 작곡과 연주의 역할에 있어 비중이 큰 부분이었다.

4개의 오페라 악파를 찾아낼 수 있는데, 이태리악파, 프랑스악파, 영국악파 및 독일악파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이태리악파의 오페라가 먼저, 그리고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그 중심지는 플로렌그, 베니스, 로마, 나폴리 등지였고, 유럽의 정치, 경제의 중심 도시로 파급되어 나아갔다. 17세기 말경 대부분의 이태리 오페라는 독창곡 연주에 불과하게 되었다. 벨 칸토 형식으로 된 아리아는 매우 정교하게 장식되어 기교를 부린 악절로써 세코 서창에서 불려지는 드라마틱한 대사와 함께 이어져서 이루어졌다. 오케스트라는 이태리 형식에서 서곡과 작품에 극적인 긴장을 조금 덧붙인 성악 악절을 위해 반주를 마련하였다.

루이 왕가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오페라는 일반적인 강세로 된 언어에서 이태리 오페라와 구별된다. 프랑스 작곡가들은 고전 프랑스 드라마의 명성과 많은 인기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며, 극적인 성실과 행동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발레 에피소드의 포함은 궁정 발레의 전통을 계승하여 프랑스 양식으로 된 서곡 연주 시 사용되었다. 오케스트라 역시 노래 부를 때 반주 뿐 아니라 무곡을 위한 음악에서도 사용하였다.

영국의 오페라는 아주 적은 작품에 나타나 있다. 일반적인 특징은 프랑스와 이태리의 오페라 형식을 받아들였다. 가면극에 의한 영국극 형식의 전통에서 음악은 가끔 첨가되었으며, 약간의 오페라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에서는 오페라가 폭넓게 수용되었고, 이태리 양식에 잘 지켜졌음을 볼 수 있으며, 중요한 독일의 작곡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들 작품의 대부분은 독일어 가사로 쓰여졌으나 이태리 양식으로 되어 있다. 대중적인 성질의 노래에 음악적인 여흥으로 이루어진 형식과 결합한 징슈필은 오페라와 동등한 단 하나의 고유 형태로 간주된다.

2. 오라토리오 오라토리오도 오페라처럼 같은 요소를 갖추고 있으나 극적인 행위의 사용이나 상연을 위한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페라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태리에서는 교회의 강당에서 연주되었는데, 바로크 시대 말기에 와서는 종교적이긴 하나 비의전적 주제를 기초로 한 음악적 형식이 되었으며 음악회 형식으로 상연하였다. 오라토리오는 독창자를 사용하는 한편 합창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항상 코랄 악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독창과 소규모 합주 악장 형식은 더 제한된 특징이라고 하더라도 오페라의 형식과 동일하다. 오라토리오는 흔히 나레이터 또는 testo로 알려져 있는 연극의 인물을 사용하는데, 이 인물은 서창 형식으로써 작품의 줄거리를 설명하고 소개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경우 다른 연주의 인물들은자신의 아리아와 앙상블을 소개할 때에만 서창을 사용한다.

3. 수난곡

수난곡에 관한 작법은 카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빈번하게 작곡되었다. 신약성서 중 4개의 복음서에서 설명된 그리스도의 수난의 실제 오라토리오 작법에서 가사를 그리스도의 시련과 십자가상의 못 박힘, 그리고 작곡가들이 이러한 주제와 조화하여 선택해야만 하는 것처럼 다른 주석에 관하여도 성경의 인용어로 제한하였다. 나레이터는 복음의 성격을 띠면서 레치타티보 양식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닌 모든 대사를 노래한다. 다른 독창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되어 이야기 내용을 노래해 준다. 한편 합창은 일반 대중, 병사, 목사를 나타냈으며, 합창단들은 주석에 의거하여 노래했다. 루터 교회를 위한 수난곡 작법에 독일 프로테스탄트 코랄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빗나간 작품과는 달리 수난곡 역시 이 시기의 오라토리오와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4. 칸타타

칸타타는 여러 형식과 여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독주와 코랄 칸타타는 세속적인 경우와 같이 의전적이거나 비의전적인 종교 목적을 위해 쓰여졌다. 칸타타의 구조는 거의 모든 형태의 음악에서 동일하다. 성부와 함께 오블리가토 형식으로 흔히 사용되는 독주 악기를 반주해 주기 위해 소규모의 악기군을 사용하였다. 이 때 성부는 독창자나 코러스가 맡아서 하였다. 아리아, 앙상블 및 코러스의 형태는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에서 사용되었다. 칸타타는 실내 음악용으로 변화시킨 오라토리오에 속하는 친밀한 형태이며 축소로 간주할 수 있다. 독주 칸타타와 합창 칸타타 사이의 차이점은 힘(음량)의 사용이었다. 독주 칸타타는 하나의 독창 성부를 위하여 쓰여졌다. 합창 칸타타는 합창과 약간의 독창자를 사용하였다. 로마 카톨릭 작곡가와 프로테스탄트 작곡가들이 모두 칸타타를 작곡한 반면 16-17세기에 걸쳐 루터 교회 작곡가들에 의해 쓰여진 칸타타는 그 양이 방대하여 이 당시 교회 음악을 풍성하게 해 주었다. 대부분의 칸타타는 교회력에 있어서 특별히 성스러운 날을 위해 쓰여졌으며, 의전적인 칸타타는 오히려 음악 설교를 표현하기 위해 불려졌다.

 

5. 미 사

카톨릭 미사는 작곡가들에 의해 여전히 작곡되었다. 전형적인 바로크 형식의 요소를 갖고 있으며, 코랄 작법과 같이 솔로와 합주 안에 다양한 부분으로 구분되어 다 카포 아리아 형태로 간혹 사용되었다.

 

3. 바로크 음악의 기악곡

 

일반적으로 바로크 시대에는 기악 음악을 위해 계획된 특정 악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악기는 대체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건반악기를 위한 기악곡은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심지어는 오르간으로도 연주할 수 있다. 합주의 경우 바이올린, 플룻, 오보에는 바순, 첼로 및 베이스 현악기로 교환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클라리노 트럼펫, 오보 다모레 등 그와 같은 악기들의 작품에서 특정하게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비슷한 음역을 가진 악기로 대체할 수 있다.

 

단일 악장

1. 토카타

토카타는 흔히 프렐류드(전주곡)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즉흥형식에서 탈피하여 르네상스 토카타에 이어 계속되는 형식이다. 완숙한 바로크 형식에 있어서 즉흥 토카타는 모방적인 대위법적 양식 부분과 쌍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형식의 마지막 결정은 2개의 광시적인 즉흥 부분 사이의 푸가의 중간 부분으로 고안된 토카타에서 나타냈다. 토카타는 흔히 쌍으로 이루어진 독주곡으로 독립된 하나의 악장으로 취급되었다. 이 경우 토카타는 즉흥적인 특성이 짙다고 볼 수 있다.

 

2. 프렐류드

이 이름은 도입 악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유롭게 사용된 것으로 즉흥적인 특성을 가진 것 중에 하나다. 그것은 그 스스로 토카타 형식에 적용되었다. 바로크 시대 말기에는 프렐류드는 푸가와 결합하여 항상 열광적으로 어울렸다.

 

3. 리르카레

하프시코드와 오르간을 위한 모방적 대위법적인 형식인 바로크 시대의 리체르카레는 르네상스의 리체르카레와는 대조적으로 하나의 주제를 모방적으로 발전시킨 대조적인 부분이 없는 작품이다. 리체르카레는 화성 구조에서 더 선법적인 경향이 있으며, 보다 적은 절정의 대조로 그것의 주제적인 소재로 이용하며, 잇달아 일어나는 취급의 사용도 보다 적게 만들었으며, 또한 주제적 소재는 서서히 진행되어 가고 리듬적으로도 그 중요성이 희박한 편이다.

 

4. 푸가

푸가는 2개나 2개 이상의 각 성부에 모방된 주제로 되어 있는 단일 주제를 갖고 모방적 대위법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제의 제시도 토닉조(Tonic key)에서 도미난트조(Dominant key)로 교대로 주제를 진행시키는데 주제에 대한 후자는 응답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형식의 발전을 이루는 수단으로 I-V의 화성적 관련성을 강조시키고 있다. 푸가는 발전된 리체르카레와 대조적으로 더 선율적이고 리듬적인 특징으로 주제를 사용했다. 그들은 주요 주제와 함께 지속적인 대위 주제를 적용시키면서 조를 여러 번 변형시키거나 동형 진행하거나, 혹은 리듬을 변형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주제를 발전시킨다. 에피소드나 부분적인 것은 주제를 한 악절에서 완전히 나타내 주지 않고 모든 성부나 일부의 성부를 통해 그 주제를 반복시켜 나타내 주고 있다. 푸가는 본질적으로 기악 형식인 반면 특히 다른 건반악기 연주에 잘 적응하며, 푸가 발전의 원리는 다른 기악 형식의 대부분에서 볼 수 있고, 역시 바로크 시대의 규모가 큰 합창곡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5. 판타지아

흔히 오르간을 위한 건반 음악으로서 판타지아는 더욱더 대규모적이고 더 복잡한 리체르카레의 일종이다. 단일 주제가 각 악절에서 연속으로 나타남으로써 전체적인 작품은 주제에 관한 대위법적 변주곡의 형태를 취하도록 되어 있다. 영국에서는 fancy라는 용어로 비올 또는 관악기의 조화나 합주를 위해 쓰여진 일반적인 성질의 작품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판타지아라는 이름은 즉흥적인 단일 악장으로 된 양식에서 이루어졌다.

 

6. 관현악 서곡

이 용어는 여러 가지가 내포된 사용된 반면 프랑스 오페라와 이태리의 오페라에서 탈피한 두 개의 형식으로 프랑스 서곡과 이태리 서곡이라는 표제 아래 다양한 부분에 대한 순서와도 다르며 완전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서곡은 느리고 화려하고 풍부한 화성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어졌다가 같은 부분이나 첫머리 느린 부분으로 되돌아가도록 결론짓는다. 한편 이태리 서곡은 빠르고, 느리고, 빠른 악장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두 개의 형태는 오페라에서 관현악곡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관현악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7. 주제와 변주곡

독창적인 선율이거나 기존의 선율이거나 간에 르네상스에 사용되었던 동일한 형식의 확장은 많은 변주곡에서 나타난다. 바로크 시대에 그와 같은 악곡은 기악 연주에 있어서 기교적인 면 때문에 그들이 써왔던 특별한 악기를 더 특별하게 개발하였다. 변주곡에는 2가지 종류가 사용되었다. 하나의 형태로는 가가 변주곡에서 대위 선율이 변화되는 반면, 성부에서 성부로 방황하는 것처럼 선율을 완전히 그대로 남겨두는 대위법적인 특징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단성 형식이다. 즉 화성 위의 선율은 뒤에 오는 변주곡에서 장식되거나 변화되는 반면에, 화성은 철두철미하게 같게 감겨진다.

 

8. 파사칼리아와 샤콘느

각기 다른 형식을 가리키는 이 2개의 용어는 원래 둘 다 베이스 선율을 반복시킨 변주곡이다. 때로 이 같은 오스티나토 선율은 베이스 성부와 다른 성부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그래서 기본 주제가 화성 형태의 성격을 띠도록 되어 있다. 파사칼리아와 샤콘느는 비록 건반 악기를 위해 더 자주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모든 형태의 악기들과 결합을 위해 쓰여졌다.

 

9. 코랄 프렐류드

코랄 선율에서 오르간 음악의 일반적인 형태는 작품의 기본이 된다. 약간의 예에서 코랄 선율은 변주곡을 만들기 위한 주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들 작품은 코랄 모음곡, 또는 코랄 변주곡 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코랄 선율은 판타지아의 기본적 요소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의 작품은 코랄 판타지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단일 형태로 된 코랄 선율로서, 매우 발전된 형태에서 비교적 단순한 단성 형태 등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이 같은 형식은 아마도 루터 교회에서 회중에 의해 실제로 불려진 성가의 서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혼합 형태

1. 교회 소나타(소나타 다 키에자)

르네상스 시대의 부분적인 칸쪼나에서 발전하여 바로크 시대 실내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된 혼합 형식으로 자유롭게 꾸민 것이다. 각 악장에 명백한 형식이 없는 반면에 이 같은 작곡 형식은 흔히 하나와 그 이상의 악장에서 대위법적 양식으로 느리고, 빠른 속도로 여러 가지 악기의 결합을 위해 쓰여졌다. 첫째로는 독주 멜로디 악기와 콘티누오, 둘째로는, 악기들과 콘티누오를 위해 가장흔하게 쓰여진 트리오 소나타이다.

무곡 형식은 본질적으로 실내 소나타에서 볼 수 있던 반면, 교회 소나타의 악장은 그런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간혹 무곡 형식으로 되어 있기도 하였다. 교회 소나타는 특히 후기 바로크 시대에 와서 간단한 이름인 '소나타'로 불려졌다.

 

2. 실내 소나타

이것은 종종 큰 규모로 사용하므로 소로 소나타 또는 트리오 소나타처럼 쓰여진 조곡의 합주 형식이다. 실내 소나타에서는 보다 적게 찾아볼 수 있다. 첨가적인 그리고 대체적인 춤곡이 종종 사용되었다. 프렐류드는 흔히 실내 소나타의 앞에 두었으며, 무곡과도 다른 아리아와 같은 악장도 종종 볼 수 있다.

 

3. 콘체르토

솔로 콘체르토와 콘체르토 그로소 등 두 개의 콘체르토 형식은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 기악곡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들 2개의 형식 중 솔로 콘체르토는 독주자로서 하나의 악기를 사용했으며, 반면에 콘체르토 그로소는 독주 악기군(대게 3개)과 오케스트라 음향의 커다란 덩어리와 대조시켜 사용한 것으로 구분하고, 3개의 악장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다. 즉 알레그로, 밀접한 관계조로 되어 있는 느린 악장, 그리고 원조로 되어 있는 아주 짧고 빠른 악장 등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각 악장은 독주자와전체 관현악이 교대하는 계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전체적인 주제적 소재는 전체 연주에 의한 합주에 의해 제시되며, 차례로 독주자들에 의해 그 주제를 발전시키도록 되어 있다. 솔로 콘체르토와 콘체르토 그로소는 결코 독주자의 기교적 솜씨를 나타내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바로크 작곡가들은 베이스와 소프라노 선율간의대조, 명백한 장조, 단조 조성에 대한 개념과 다수의 별개 악장들의 사용 등 기악 형식을 하나로 이상화시켜 대조의 개념과 결합하려는 가능성을 꾀하였다.

 

4. 모음곡

각기 다른 리듬과 빠르기를 가진 다수의 모곡 악장을 결합시킨 기악 소품으로, 확장된 개념은 환상의 무곡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고안된 것이다. 완전한 작품 형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러한 무곡들, 알라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그리고 지그 등 각 무곡은 일반적으로 2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첫 부분은 딸림조로 끝나며, 두 번째 부분은 중간쯤에서 으뜸조로 되돌아간다. 무곡은 서로 주제적 연관성이 없으며 단지 통일성 있는 요소는 모든 무곡 조의 불변성이다. 명명된 4개의 무곡들을 기본적인 무곡 형태라고 생각하였던 반면에 다른 무곡들, 심지어 무도장을 사용하는 풍조가 종종 늘어났으며 원래 무곡과 대체시켰다. 각 춤곡은 그 고유의 리듬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쓸모 없이 이상화시킨 형식으로 되었다.

 

5. 오케스트라 모음곡

기본적인 4개의 무곡에서, 관현악 조곡으로서의 명백한 한계는 없었으나, 부가된 악장들은 무곡과 다른 방법으로 자유롭게 사용되었다. 오케스트라 모음곡은 제1악장들을 프랑스 조곡의 형식으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종종 서곡이라 불리운다.

 

6. 건반 악기 소나타

성악 작품과 구별이 생기고 기악 작품에서 소나타라는 용어의 사용은 바로크 시대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다수의 건반 음악 작품은 비록 그 형태가 바로크 시대의 2개의 대표적인 소나타 형식 가운데 실내 소나타와 교회 소나타이든 간에 그들이 비슷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소나타라고 불리어졌다.이들 소나타 중 몇 개는 여러 악장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도는 단일 악장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간단한 2부 형식, 3부 형식은 독립된 악장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그 형태는 무곡 같은 특징에서 가요 형식까지 다양하였고, 대개 단성 구성으로 되어 있다.

 

로코코(18세기 초 ∼ 후반)

 

로코코 음악의 이해

회화에서의 로코코, 음악에서의 로코코

 

이 시대의 음악가

쿠프랭, 라모

 

1. 로코코 음악의 이해

 

로코코는 18세기 초엽부터 후반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예술가의 시대양식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가 다시 널리 문화 현상 전반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의 이러한 사용법은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등지를 중심으로 쓰이는 일이 많고, 적극적인 시대양식 개념으로는 쓰이는 일이 많고, 적극적인 시대양식 개념으로는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 음악사에서는 <로코코 음악>이라고 한 항목을 세우지 않는다. 로코코의 어원은 프랑스어의 로카유(rocaille)로서 이 말은 암석, 자갈, 조가비 등을 써서 자연을 모방하여 만든 정원동산의 뜻이며, 로카유는 이러한 바위와 조가비의 모티브를 갖춘 가구와 그 양식적 특징을 나타내는 의미도 있다. 그 특징은 조가비 무늬 또는 소용돌이 무늬 등으로 대표되는 순수한 장식적 경향이며, 우아하고 화려하지만 반면에 깊이나 내용적인 면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회화에서의 로코코

회화에서는 바트, 부셰 등이 이 양식을 대표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표면적인 쾌감을 주는 이러한 경향은 프랑스의 궁정 예술의 특색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고, 그 양식적 특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로코코>의 시대양식 개념으로서의 적극적인 의미는 바로크와 고전파의 두 가지 양식을 잇는 중간적 양식으로 파악되는 수가 많으나, 중심이 프랑스의 궁정예술 양식이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적인 거대함을 사랑하는 바로크 후기에 생긴 지방적인 천박화와 표면화하는 현상으로서, 넓은 의미의 바로크 양식 속에 내포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프랑스 이외의 나라에서 주로 쓰이는 용법이라 함은 주지된 바와 같으나, 프랑스에서는 반대로 이 말을 장식, 색채, 비대칭을 강조하는 독일 바로크 양식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또 낡은 것과 시대에 뒤진 것을 가리킬경우에도 사용되며, 한편 프랑스 예술의 특징을 질서, 청아함, 장대함 속에서 찾아, 이것을 <고전주의>라고 하는 일이 많다. 따라서 일반에게 사용되는 로코코 음악이라는 말은 독일과 영국, 미국에 있어서 양식적인 해석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음악에서의 로코코

로코코 음악은 18세기의 화려한 궁정생활을 반영시킨 것으로서, 당시의 프랑스 예술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알려진 명쾌함과 질서를 표현한다고 하지만, 대체로 깊이가 없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독일바로크 음악, 그리고 그 마지막 단계를 나타내는 바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대위법적인 형식적 엄격성 또는 그러한 것과 결부된 종교적, 교회적 기반과의 관련이 결여되어 있을뿐더러, 다음 고전파 시대에 확립된 음악 형식의 정비, 완성도 충분히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세속적, 사교적인 성격은 우아함과 평이한 점에서 두드러져 있다. 일반적으로 화성적인 양식을 취하며, 단순한 형식감을 특징으로 삼는다. 그저 단순한 형식의 클라브생 음악에 로코코 음악의 한 전형을 불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또 로코코 음악과 합리주의나 계몽주의와의 긴밀한 관계가 지적되는데, 이들 사상이 여러 가지 점에서 직접, 간접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로코코 음악의 이름 아래 들을 수 있는 것은 우선 프랑스의 음악가들이다. 즉, 클라브시니스트로서는 프랑스의 쿠프랭을 필두로 라모, 다캉, 당드리외, 마르샹, 바르바스토르의 이름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의 성격적, 묘사적인 표제음악은 르클레르나고섹 등의 기악곡, 몽시니, 필리돌, 그레트리 등의 오페라 코미크와 함께 로코코 음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도미니코 스카를랏티, 페르골레지, 사키니 등의 쳄발로 소나타, 이 밖의 기악곡이나 오페라 부파를 들 수 있다. 독일에서는 감정과다 양식과의 관계도 있고,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가령 바하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텔레만은 로코코 음악가라 할 수 있는 많은 특징을 갖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로코코 음악에 포함되는 것은 18세기 중엽에 활동한 각지의 전고전파 운동이다. 그라운, 크반쯔, 에마누엘 바하 등의 베를린 악파, 요한 시타미쯔, 필쯔, 리히터, 홀쯔바우어, 토에스키, 칸나비히 등의 만하임 악파, 로이터, 몬, 바겐자일 등의 전기 빈 악파, 또한 파리에서 활약한 쇼베르트, 이탈리아에서 런던으로 옮겨와 활동을 계속한 크리스티안 바하 등이 그 중에서도 중요하지만, 또 그들에 의하여 준비되었던 고전파의 거장들인 하이든과 모차르트도 로코코 시대에 태어나 이 스타일을 흡수하고 이 양식 아래서 창작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특히 모차르트의 경우 1774년, 즉 18세기 무렵부터 한 동안 갤런트 스타일의 작품에 물들어 있었다. 이런 스타일은 베토벤의 가장 초기의 작품에서도 어느 정도 찾아 볼 수 있다.

 

고전주의( 1750년∼1825년 경 )

 

고전주의 음악의 이해

고전주의의 기본양식

 

 

1. 고전주의 음악의 이해

 

음악사에 있어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둘러싼 시대는 실로 화려하며, 그것은 고전파 시대라 불린다. 라틴어의 classicus는 원래 <납세자 계급에 속하는 자>라는 뜻에서 <모범적>이라는 뜻을 갖기에 이르렀다. 독일 문학에서는 1785∼1830년경이 die Klassik이라 불리어 레싱, 클롭시톡, 빌란트, 헤르더를 거쳐 괴테와 실러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프랑스 문학에서는 고르네이유, 라시느, 몰리에르 등을 거느린 루이14세 시대가 클라식이라 불린다. 그리고 1770∼1830년 사이의 유럽적 양식은 고대나 르네상스에 의거한 역사주의적인 미술로, <고전주의>라 불려야 마땅한 것이다. 음악사에 있어서의 고전파시대는 독일 문학사의 그것과 일치하며, 사상적으로는 칸트에서 출발하고, 피히테, 헤겔이나 셀링의 독일 idealismus의 시대이다. 이데알리스무스는 인식론적으로는 <관념론>, 윤리학적으로는 <이상주의> 등으로 번역되지만, 그 양쪽을 포함하는 것이다. 베토벤과 헤겔이 바로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실로 주목할만한 일일 것이다.

이 시대에도 유럽의 교양의 원천으로서의 고대, 특히 그리스를 모범으로 간주했던 것이며, 르네상스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때에도 Humanismus가 제창되었다. 1800년을 둘러싼 휴머니즘은 <신인문주의>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헬더나 빌헬름 폰 훔볼트에 의해 장조 되었다. 이것은 게르만적인 민족정신이나 독일적 국민성과 보편적인 인간성이 그리스도를 원형으로 하여 변증법적으로 결합된다. 인류의 인간성이 새로운 이상을 지향하고, 교육이론이나 학교 제도의 개혁을 통해 인격성의 이상이 추구되었다. 말하자면, 프랑스에서 발발한 합리주의적 정역학적인 고전주의와 <질풍과 노도>의 비합리주의적 역동학적인 천재들의 운동이 신인문주의적 이상에 의해 종합되었던 것이다. 고전주의적인 단순, 명료하고 법칙적인 외적 형식의 이상이, 자연적, 유기적 내용을 지닌, 긴장에 가득 찬 내적 체험과 결합한다. 형식과 내용, 육체와 정신의 조화, <아름다운 영혼>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음악사에 있어서의 고전파는 일찍이는 크반쯔, 하세, 바하의 아들들이나 그 동시대인들, 이탈리아에서는 도메니코 스카를랏티와 그 후계자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종말은 낭만파와의 관계가 분명치 않고, 20세기에 이르러서도 네오 클라식 운동을 낳고 있다. 문학사에 있어서는 최근에는 고전파와 낭만파를 총괄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음악사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시도는 가능하다. 고전파의 원천에는 의식적인 단순화가 보여지고, 선율이 근본적인 담당자로서 표면에나타나 민요적, 민중적인 것이 예술적인 것과 합류했다. 시대의 시점을 1740년경까지 소급시켜 본다면, 보헤미아 음악가들의 각지에의 진출, 바겐자일을 둘러싼 초기 빈 악파, 필립 에마누엘 바하를 둘러싼 북독일 악파의 전체를 통해서 독일 음악이, 기악은 물론 오페라에 있어서까지도 중요성을 띠어온 것이 명백하다. 거기에는 크반쯔 등의 <혼합적 취미>의 주장이 있으며,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도,에마누엘 바하에게도 각 국 양식의 융합이 보였다. 그러나, 글룩의 <심정에 호소하는, 힘찬><모든 인간에 호소하는>음악의 주장, 단순하여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있는 민중적인 것에 대한 경향이 중요성을 가졌던 것이다. 고전파의 음악 양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770년경에 이르기까지의 <초기고전파> 혹은 <전고전파>와 그 이후의 <성기(盛期) 고전파>를 구별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전고전파와 음악적 로코코 시대와의 구별은 곤란하며, 당연히 전고전파 안에 <갤런트 양식>과 <다감양식>이 다함께 포함되는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의 로코코가 바로크 후기 양식에서 태어난 데 대해서, 음악에 있어서의 로코코는 표현 수단의 의식적 한정, 단순함, 주선율의 우위 등에서, 이미 고전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기고전파의 보편적 어법의 밑바닥에는 8마디 악단(樂段)에 의한 구성원리가 있고, 이와 같이 단순한 메트룸에 대해 리듬은 이해불능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복잡화된다. 조성감과 화성에 있어서도 고전파는 일관해서 바로크와도 최근대와도 명백히 구별되는 합리적 통일성을 유지한다. 선율은 그대로 고전파 음악의 <영혼>이며, 선율에 있어서의 새로운 표출적, 개성적 선율법은 슐쯔, 라이햐르트, 쨀터, 쭘시테크 등에서 나타나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서 성기의 양식을 완성한다. 기악에서는 염미적 선율법이 이탈리아인이나 요한 크리스티안 바하의 <노래하는 알레그로>나 <칸타빌레의 마니아>에서 극복된다. 미묘한 리듬법, 유동적인 화성법과 조성, 거기에 또 음색과 다이나믹이 첨가되어, 고전파에서 비로소 본질적 의미에서의 <주제>라 불려지는 것도 성립되었던 것이다. 개개의 동기, 동기로서 구성된 주제는 생명이 긴 발전을 가능케 하고 더욱이 그 발전을 통해서 항상 인식될 수 있는 것이 된다. 베토벤의 제5교향곡의 원동기의 발전이 그 전형적인 것이 되는 이른바<주제영작>의 원리가 태어났다. 이리하여 음악 사상 처음으로 창조하는 예술가의 인격성이 그 내면으로부터 호소해온다. 이 <보편적 어법>에 의해 작곡가는 체험을 <보편 인간적인 것>으로 높여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듣는 자는 표출상술을 통해 공체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바켄로더나 노발리스 등의 낭만파 문인들이 음악가를 신적인 것의 사제라고 찬미하는 것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고전파의 기본양식

고전파의 기본 양식은 소나타형식이며, 이것은 다른 몇 개의 악장과 결합된다. 3악장 형식은 알렛산드로 스카를랏티의 신포니아와 사마르티니, 갈룹피 등의 피아노 소나타 이 후에 확립되었는데, 4악장형식은, 만하임 악파에서는 시타미쯔, 빈 악파에서는 바겐자일, 몬 등 이래로 받아들여지고 이탈리아인이나 북독일 악파에서는 아직 한동안 3악장이 지켜진다. 피아노 소나타나 피아노와 다른 악기의 소나타로 4악장 형식이 기준이 되는 것은 베토벤 이래의 일이다. 소나타 형식 자체는 바로크적인 것에서 점차로 형성된 것이며, 빈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만하임에서도, 밀라노에서도 창출된 것은 아니다.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의 3부 형식에서 전개부는 초기에는 아직 전개부적 성격이 명백하지 않다. 반복은 제시부와 전개부 및 재현부로 두 번 행하여지고, 이 후자에 있어서의 반복은 하이든, 모차르트에있어서도 보여지는 것인데, 점차로 버려진다. 소나타 형식에서 처음부터 특징이 있는 것은 조성의 취급 방법이다. 그러나 고전적 형식의 특징으로 여겨온 2주제성은 베토벤 이전에서는 반드시 보편적 원칙으로는 되어있지 않다. 기악의 성악에 대한 절대적 우위도 베토벤 이전의 일이며, 이탈리아인의 전고전파 이래로 성악과 기악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베토벤에 이르기까지는 고전파시대의 관심은 관현악에서도, 교회음악에서도, 실내악에서도, 리트에서도 아니고, 바로 오페라에 주로 쏠려 있었다. 그리고,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야말로 이들 여러 악식의 종합이며, 최고도의 민중성과 예술성과의 둘도 없는 통일의 기념비가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미묘한 색채는 모차르트에서, 하이든이나 베토벤까지도 능가하는 차원으로 충족되었다.

음악에 있어서 고전파는 시민계급의 해방과 때를 같이했다. 바로크 시대는 음악은 주로 궁정과 교회의 것이었는데, 고전파 시대에는 공개연주회가 점차로 행하여지게 된다. 18세기 전체를 통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모범이 된 것은 1725년 이래의 파리의 <콩세르 스피리튀엘>이다. 음악 애호가의 가정 음악은 시민사이에서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는데 자유 예술가로서의 음악가의 독립은 당장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1778년에 하이든이 "자유로운 여러 예술과 작곡이란 아름다운 학문은 수공의 속박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 사람이 그 여주인을 모시고 이익을 모으려고 할 때, 기분도 마음도 자유롭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기술하고 있듯이, 음악가에게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개인적인 창조의 자유가 부여됨과 동시에, 그들은 또한 자기의 책임까지도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다. 독일 철학, 독일 문학의 위대한 업적은 음악가들에게까지도 고무시켰음이 틀림없다. 음악가는 인간 존재의 모든 문제에서 인격적으로 대결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의 예술은 포괄적인 인간성의 그릇이 되었던 것이다. 음악사에 있어서의 고전파는 위대한 조화와 통일의 시대였다. 기능화성적 작곡법은 소나타 형식에서 긴장감이 가득 찬 극적인 논리적 형식으로 결정되고, 대표적 작품에서 수직과 수평적, 화성과 대위법적인 방향이 다시금 결합되었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에서는 자연적인 것이,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인간적인 것이 궁극적인 깊이와 높이에서 음악적으로 파악되었는데, 베토벤에게 있어서는 다시 이 두개의 우주가 합일되었다. 베토벤의 만년이 고전파에 속하느냐 낭만파에 속하느냐는 하나의 논쟁 문제일 뿐, 거기에는 모든 낭만파적 감정의 고양과 형식의 자유로움이 보여진다 하더라도 슈베르트나 슈만에 있어서의 본격적 낭만파와는 전혀 다른 강인한 형식주의, 고전주의적 이념이 보인다. 빈 고전파의 위대함에 현혹되어 다른 지방의 고전파가 부당하게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짤쯔부르크에는 교회음악가로서 요제프의 아우 이하엘 하이든이 있었으며, 뵈멘 출신의 천재적인 교양곡 작곡가 조젯티, 피아노 음악가 듀섹, 이탈리아에는 피아노 음악의 거장 클레멘티, 코스모폴리탕의 복케리니, 여기다 또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케루비니 등이 있다. 프랑스 고전파 오페라의 대표자는 메윌이라 하겠고, 기악에서 프랑스의 영웅적 고전주의를 정점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의 비옷티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현대의 견지에서 본다면, 고전파는 세계 음악사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정점도 아니며, 모범 그 자체도 아니다. 그러나 괴테와 그 시대가 세속적인 근대 유럽 문화에 있어서의 하나의 정점이었음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음악에 있어서의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의 세계는 불멸의 정점일 것이다. 전고전파와 낭만파까지도 포함시킨 광범한 고전파의 새로운 통일적 파악과 연구야말로 금후 우리들의 과제일 것이다.

 

낭만주의( 19세기 )

 

낭만주의 음악의 이해

낭만음악의 역사, 특질.

 

이 시대의 음악가

베버, 슈베르트, 로시니, 도니제티, 마이어베어, 벨리니, 쇼팽, 슈만 리스트, 멘델스존, 베를리오즈, 베르디, 바그너, 구노, 부르크너, J.슈트라우스, 브람스, 생상스, 비제, 부르흐, 포레, 마스네, 토스티, 레온카발로, 푸치니, 말러

 

1.낭만주의 음악의 이해

 

 

<낭만적> 또는 <낭만주의적>이라는 어귀가 예술 정신에 있어서의 기본 유형을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그 역사적 구현은 한 문화권, 한 시대의 특정한 현상에 국한된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이고, 그 표현의 방법에 있어 명로와 불명료, 순수성과 불순수성 등의 서로 다른 점이 있고, 그 현상의 범위에 있어서도 대소(大小), 광협(廣狹)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인간 정신사의 여러 가지 국면에서 나타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아르스 노바의, 혹은 현대의, 낭만주의적 음악이 존재하는 데 대하여, <낭만적>인 것의 가장 전형적인 역사적 구현을 19세기에서 거의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음악사상 낭만파 시대라고 부른다. 유형개념으로서의 <로만틱>,<클라식>과는 상대적 개념을 이루고 있지만, 시대양식으로서의 낭만파에 선행되는 고전파와의 관계에 관하여서는, 양자와의 관계를 양극적으로 대립으로 생각하여 이 두 시대를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경우와, 그 기간의 대립성보다는 오히려 통일성 내지는 연속성이란 관점에서 그 관계를 살피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입장을 명확하게 표명하고 있는 것은 블루메로서,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시대를 <클라식-로만틱>시대라고 부르며, 이 기간의 기본 경향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그 이전의 단계를 고전파, 그 이후의 단계를 낭만파로 구분한다.

클라식-로만틱 시대에는, 그 이전의 시대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대립이나 분화가 개재되어, 18세기 중엽과 후기 낭만파와는 화성면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으나 다만 그 밑바닥에 있어서는 요소 및 형식의 규범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는 통일을 이루고 있다. 페르골레지와 시타미쯔부터 레거에 이르는 기간의 화성법이나 리듬법을 앞의 바로크 시대와 현대를 비교한다면, 이 기간은 역시 통일된 시기로 구별된다. 소나타 형식, 론도 형식, 행진곡 형식 등은, 여러모로 자유로운 취급을 당하면서도, 이 시기를 통하여 계속 보전되었다. 형식, 조성, 표출의지의 점에서 제각기 대단한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모차르트, 베토벤이 완성한 양식의 규범에, 바그너도, 시트라우스도, 레거도, 스메타나도, 차이코프스키도 다같이 의존하고 있다고 하여, 블루메는 고전파와 낭만파를 하나의 통일된 시기로 보는 것이지만, 이에 대하여는 양자의 상이(相異)를 강조하는 베셀러의 견해가 있다. 이 같은 파악의 상이점은 이전부터 독일문학 내지는 정신사의 해석에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이며, 양자를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시트리히 그리고 코르프 등의 입장이 있다.

 

낭만음악의 역사

단순히 예술이라는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이나 인간의 생활태도에까지 미치는 포괄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는 낭만파의 운동은, 보통 음악사상 19세기의 10년대 무렵부터 생각되고 있으나, 그 징후는 이미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쇼베르트, 에마누엘 바하, 1770년대의 하이든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트름 운트 드랑>적 경향은 프레로만티시즘이라 하여 낭만파의 선구로 지적되고 있다. 이것을 계속시키는 것은 성기 고전파 시대를 겪은 본래의 낭만파와 그 시대가 구분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보다 앞서 하이든의 만년이나 모차르트의 작품에 있어 고전적인 요소와 낭만적인 그것과의 융합을 지적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기 고전파의 시기에 때를 같이하던 군소 작곡가의 경우에는, 고전적인 조화적 종합의 수준까지도 달하지 못하고, 로코코의 말기적 현상에서 초기 낭만파적 경향으로 이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780∼90년대 클레멘티의 소나타와 1800∼10년 무렵의 크라머의 협주곡이나 피아노 작품, 1800년 전후의 듀섹의 실내악곡, 이어 체르니와 후멜의 작품 가운데 낭만적인 태도의 초기적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초기 낭만파의 작곡가로서는, 독일 국민오페라의 확립자 베버, 많은 훌륭한 리트를 남긴 슈베르트가 있다. 그들은 베토벤이 사망한 전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로부터 19세기 중엽까지는 성기낭만파라고 일컬어, 여기에 슈만, 멘델스존, 쇼팽 등이 포함되어, 19세기 후반에는 <고전주의적>인 브람스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조류에 대하여, 음악 외의 예술과의 연결을 세차게 요구하던 <로만틱 리얼리즘>의 계열이 대립되어,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가 표제 교향곡, 교향시, 오페라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이러한 경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주로 교향곡 분야에 있어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브루크너와 말러, 거기에다 리트 작곡가로서 알려진 볼프, 그리고 교향시, 오페라, 리트의 리하르트 시트라우스 등이 독일, 오스트리아의 후기 낭만파를 형성하였고, 이미 말러의 만년의 작품에 있어서도 베르크의 기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듯이, 현대로 인도하는 도정을 상시하고 있다. 19세기의 프랑스에 있어서는 구노, 생상스, 마스네, 비제 등이 영속적인 생명을 지닌 오페라를 남겼지만, 베를리오즈의 다음에는 세기의 후반에 들어서서부터의 기악의 부흥을 들 수 있다. 바그너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악곡의 이론적 구축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프랑크, 그의 제자인 댕디 등, 그리고 명확과 균정을 중시하던 고전주의적 경향을 낭만주의와 절충한 생상스 등이 있으며 억제된 고유한 작풍을 보이던 포레는 다음 시대를 지향하는 길을 개척하였다. 더구나 그 국민성이 낭만주의와 각별한 근친성을 지니고 있는 독일과 본래부터 고전주의적 경향이 짙은 국민성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와은 다같이 <낭만파>로 불려지기는 하나, 각 나라의 낭만주의에 대한 자세가 근본적으로 상당히 다르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는 19세기에 기악의 왕좌를 독일에 양보하였으나, 롯시니, 도니젯티, 베르디, 19세기 말의 베르즈모의 마스카니 등이 오페라 분야에 있어서의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장점을 나타내고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에 있어서도 <낭만파라고 부르기는 하나, 독일과의 상이가 뚜렷한 것이다. 러시아, 체고, 북유럽, 스페인에 있어서 민족적 자각의 고조에 따라 융성을 이룩한 국민악파는 무소르그스키의 화성법에서 볼 수 있듯이 고전적인 주체계의 동요를 촉진하는 계기마저 내포하여 드뷔시의 인상주의에의 자극을 주었다.

 

특 질

낭만파 음악은 그 가운데 각양각색의 대립을 내포하고 있어 이것을 통일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이다. 낭만파 음악이 내포하고 있는 주요한 몇 가지 대립을 다음에 든다.

 

국민주의-보편적 성격

전파의 거장들이 작품이 어느 나라에도 파악되지 않는 보편적이며 코스모폴리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글룩이나 모차르트에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다. 민요의 선율과 민족 무곡의 사용은, 19세기의 국민악파만이 특징이 아니고 고전파의 작곡가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어느 민요에 의하여 민족성에 특징을 붙이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민중적인 선율의 보배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며, 그것이 스페인 민요냐, 러시아 민요냐 하는 문제는 국민악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반하여 19세기의 국민주의에 있어서는 여러 민족음악의 어법을 사용하여 국민적 성격이 강조되고, 민족적 소재가 고전파와 같이 단순하게 인용되는 것이 아니라, 악곡 전체가 민족적 어법에 의해서 일관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국민적 음악어(語)의 수립이 지향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전파에 의해서 확립된 보편적인 어법은, 보로딘이나 드보르작, 그리고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주의에 있어서도 뿌리깊은 바탕이 되고 있어 낭만파 시대에 있어서는, 보편성이라는 고전파의 유산과 국민주의와의 복잡한 갈등을 엿볼 수 있다.

 

표제음악-절대음악

낭만주의의 예술 이론은 모든 예술장르의 해체마저 주장한다. "낭만주의 문예의 사명은, 문예의 온갖 분리된 장르를 다시 결속시켜, 문예를 철학 및 수사학과 접촉시킬 뿐만 아니라..."(후략)라 낭만파 초기의 이 운동의 추진자 프리드리히 폰 실레글은 말하고 있지만, 나아가서 여러 예술의 조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음악과 시적, 회화적인 것과 같은 음악 이외의 예술과의 융합을 이상으로 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표제음악이 그 성기를 맞아, 바그너의 종합 예술론도 대두하게 되었다. 시적 정서를 어렴풋이 암시한 슈만의 피아노 소곡으로부터,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 베를리오즈의 표제 교향곡, R.시트라우스의 교향시 가운데 그 일부에서 느낄 수 있는 어느 정도 현실적인 경향이 짙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도 들겨 듣게 되는 수다한 표제음악이 만들어졌다. 음악에 있어서의 색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관련하여, 쇼팽, 리스트, 프랑크, 말러 등에 의한 반음계적 화성법의 발전, 베를리오즈, 바그너, R.시트라우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의 관현악법의 복잡화가 낭만파의 커다란 특징이 되고 있으나, 이 같은 광의의 표제음악적 경향으로 낭만파 전체를 해석할 수는 없다. 멘델스존에서부터 브람스, 레거에 이르는 일련의 절대음악적 경향이 있으며, 낭만파에 있어서의 표제음악-절대음악의 대립은 음악미학상으로도 바그너 대 한슬릭의 대립으로써 나타났다.

 

소곡의 애용-방대화

이 시대에는 유별나게 피아노를 위한 소곡이 애호를 받게 되어 바가텔, 즉흥곡, 인테르멧조, 녹천, 발라드 등이 작곡되었다. 베토벤의 바가텔에 그 선구를 볼 수 있으며,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그리그 등은 섬세하고 시적인 소곡을 남겼다. 멘델스존의 ,무언가>와 같이 표제를 지닌 것도 적지 않다. 이러한 작품들은 리트와 더불어 가정음악의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성적이며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소품의 내용과는 반대로 악곡의 규모나 구조의 방대화와 복잡화, 또한 몸짓이 크고 화려한 표현도 낭만파의 두드러진 경향이라 하겠다. 바그너, 말러, R. 시트라우스 등에 있어서의 오케스트라 편성의 확대는 이에 대한 하나의 외면적 구현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지적한 대립이 말러의 경우와 같이 동일한 작곡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이 흔히 있다. 그의 교향곡에 대하여 <죽은 자식을 그리는 노래>등은 음색법, 선율법, 형식면에서 고도의 단순성을 요구하고 있다.

 

전통-혁신

낭만파 시대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과 독창성을 찾고, 화성법, 음색, 형식, 리듬법에 있어서 전통을 타파하고 새로운 수단을 꾀하려는 혁신적인 경향이 커다란 특징이 되어 있고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등은 이 선에 서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시대를 뚜렷이 특징짓는 것은 전통과의 굳은 연결이며, 아득한 과거에 대한 동경, 바하의 영향에 따르는 폴리포니와 바로크의 여러 형식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라 하겠다. 낭만주의의 과거에 대한 탐구와 전통적인 것에 대한 존중에 영양분을 주고 있는 것은 첫째로 대위법 등의 기술에 대한 교육이 끊이지 않았던 전통이며, 둘째로 <참된 교회음악>을 중심으로 하여 오랜 기간에 걸친 논쟁에 옛날의 거의 잊혀졌던 거장들이 새로이 등장하게 된 사실이며, 팔레스트리나, 랏수스, 로티 등은 그 일부라 하겠다. 19세기에 있어서의 그 영향은 교회음악뿐만 아니라, 브루크너나 말러의 교향곡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셋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바하의 부흥이다. 바하에 대한 열광은 그와의 친화성의 확인과 새로운 이해에서 우러났고, 낭만파 시대를 넓고 깊게 일관하고 있다. 이 시기의 대작곡가 및 허다한 군소 작곡가들이 혁신과 새로운 효과와 수법에 대한 탐구와 역사적 전통 가운데에 서 있었는가를 파악함은 이 시대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 수 있으리라, 과거에 훌륭한 업적에 대한 낭만주의의 경애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탐구와 관련하여 기억하여 둘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의 역사적 음악학의 기초를 닦는 것과 앞으로의 발전이며 바하와 팔레스트리나의 최초의 전집도 19세기 중엽부터 출판을 보게 되었다.

 

예술가-대중

작곡 의뢰인, 음악소비자 등, 다소라도 등질(等質)의 서클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참된 예술가라고 말하는 고전파 이전의 상황은 18세기에 서서히 진행되고 있던 음악가의 신분적 구속에서 해방과 공개적 콘서트의 발전에 따라 변모되었고 낭만파 시대에는, 음악가는 청주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대립관계, 도전적인 관계에 서게 되고, 대중에 충격을 주어 당황케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베토벤의 만년의 현악4중주곡에서 레거의 만년의 실내악곡에 이르는 경향에서 엿볼 수 있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이해되었던 전문적이며 고답적인 음악과 라너, 주페, 레하르와 같은 <오락적>으로 기울어진 음악에 대한 분리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거기다가 이 분열은 더욱 더 날카롭게 되어 현대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민악파

 

국민주의 음악

사회적 배경과 특징

러시아 5인조

 

이 시대의 음악가

글린카, 스메타나, 보로딘, 큐이, 발라키레프, 무소르그스키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그리그, 림스키코르사코프, 사라사테, 시벨리우스

 

1. 사회적 배경과 특징

 

프랑스 혁명에 의해 표출된 자유·평등의 정신은 대중 속에 폭넓게 인식되어 이 시대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전제 정치가 폐지되고 민주적 입헌 정치가 확립되었다. 한편 19세기 초부터 이 자유주의와 병행해서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요구하는 국민주의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 국민주의적 경향은 음악에 있어서도 나타났는데 러시아, 보헤미아, 스칸디나비아 제국 등 그 때까지 음악국이 아니었던 북유럽 제국에 있어서 특히 현저했다.

국민주의 음악에 나타난 각 민족의 특수성은 소재가 된 민족특유의 음악이나 민요 같은 음악면 뿐만 아니라 민족의 생활감정이나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 때까지의 낭만타 음악과는 다른 선율·리듬·화성 등이 생겼으며 넓게는 악곡의 종류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 온 보헤미아에서는 민족적인 통일 운동에 강한 정열을 보이면서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을 중심으로 국민 음악이 창조되었다. 작품 가운데는 민족 해방과 관련되는 애국적인 제재의 것이 많다. 교향곡 <신세계에서>를 대표작으로 하는 드보르작의 작풍은 향토적인 선율을 독특한 화성에 의해 채색하고 거기에 강한 보헤미아풍의 분위기를 표출하는 점에 특징이 있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에서는 노르웨이에서 그리그가 등장하여 민요를 토대로 한 낭만적인 작품을 썼다. 그 밖에 핀란드의 시벨리우스와 스페인의 팔랴 등도 이 계열에 속하는 작곡가이지만 연대적으로는 근대음악에 속한다.

 

러시아 5인조

 

서유럽의 선진 제국에 뒤떨어져 있던 러시아는 세력을 정비함과 동시에 전제적인 체제가 강화되었으나 그 반동으로 자유주의적인 분위기도 유입되어 19세기에는 농노 해방령이 발표되면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먼저 글린카가 작가인 푸슈킨과 함께 러시아 국민 가극을 창조했고 그에 이어서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르그스키의 5인조가 나타났다. 그들의 작품에 공통적인 것은 러시아의 풍토에서 발생한 강한 민족적 색채이며 그것은 선율·리듬·화성의 음악 요소면에서도 특이한 취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 반면에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저인 것을 도입하면서도 서유럽의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썼으며 교향 관현악과 발레음악면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인상주의

 

인상주의

개념 및 특질

 

이 시대의 음악가

드뷔시

 

1. 인상주의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원래 회화상의 한 유파, 대략 1870∼1900년 모네, 피사로, 시슬레이, 르느와르, 베[르토, 모리조, 기요망, 가이유보트 등에 관한 개념을 음악에다 적용한 것이다. 예술적 영역의 상이를 초월해 인상주의라는 개념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를 예술 일반의 문제로 환원하고, 예컨대 인상주의 예술을, 문화의 여러 영역에 통하는 시대정신이 예술상으로 구현되는 것으로서 간주하도록 하는 논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포괄적인 논점에서 관찰한다면, 회화, 음악상의 인상파 외에 로댕의 조각, 상징파의 시의 일부, 프루스트의 소설, 르 메들이나 아나톨 프랑스의 비평을 이 진영에 참여시킬 수 있다. 그건 이른바 「순간의 인상은 재빨리 기록하는 태도」이며,「주리에 의한 개념작용에 대한 감각의 승리」이며 19세기 낭만주의적 감정표출이나 자연주의적 현실묘사에 대항하여 주객미분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반성에 의하지 않는 직관적으로써 줄기찬 유동 그 자체인 참된 실재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프루스트에 의하면, "사물의 표면과 넓이란, 우리가 사물 자체를 인식할 때의 기억이 갖다주는 것의 명칭과는 현실적으로 별개의 것"이며, 인상파는 "직접 느낀 것으로부터 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꺾어 버리겠다"고 주장하였으며 때로는 우리가 비전이라 일컫는 추리의 집합체를 조각 조각으로 깨뜨리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정관적인 주관에 내포되는 개성적인 이미지의 전달을 꾀하고 있다. 따라서 표현에 있어서 뉘앙스나, 뉘앙스의 교착이 조성하는 미묘한 분위기 등은 극도의 절제가운데 추구된다. 과연 예술의 여러 영역의 본질적인 마티에르의 구별은 움직일 수 없으나 인상파가 주장하는 회화의 빛깔, 색채와 음악의 음향, 음색의 중시를 유비적으로 본다는 것은 허용되기도 할 것이며 게다가 음악과 시에 있어 다같이 이미지의 형상이 대상을 묘사하지 않고 또한 고정되지 않은 채 시시각각으로 환기되어, 그로 말미암아 <마음의 상태>를 암시하는 작품 형성에 있어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 사실도 특기해야만할 것이다. 예술의 여러 형식이 이러한 상호 침투를 초래하게된 데 대해서는 그 사이의 장벽을 제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사실상 예술가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빛의 변화를 좇아 시간을 화면에 끌어들여 「사물이 지니는 음악성을 암시한」화가들, 「음악에서 부를 탈회하겠다」고 외친 시인들, 그리고 음악가는 <구름>이나 <바다>나 <눈 위의 발자국>이나 <물의 교태>를 시간이란 화포 위에 환기시켰다. 이러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인상파나 상징파의 예술가들은 어느 미적 체험을, 그 체험의 창구인 개별적 감각에만 멈추지 않고, 더욱 깊이 여러 감각이 분화되기 전에 어느 통일을 이루고 있는 의식 내부의 심급에까지 파고들어 파악하였다. 인상주의를 음악에 한정시켜 인상파 음악의 특징을 기법상으로 개괄한다면, 다음 몇 가지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교회선법, 5음음계, 온음음계 등 선법성의 재발견 내지는 발명, 도입, 각종 병행음정 및 병행화음, 불협화음-고차배음, 보탠음, 연접음 등을 포함한 화음이 해결을 전재로 하지 않는, 이른바 비화성음, 비음계음이 반음계법에 따르는 변화음으로서가 아니라, 본래 고유의 것으로서 사용된다. 이에 관련하여 3도 화성에 따르지 않는 새로운 화음의 발견, 또는 박절에 따르지 않고 세분된 율동법이나, 정밀, 섬세한 감각을 요구하는 악기법, 관현악법(분할된 현악기군, 색채적인 독주악기의 중용(重用)과 독특하나 그 결합과 같은 경우에 있어 전통적 화성법의 이론의 중핵을 이루는 기능적 연관의 윈리적 의의가 상실되어 그것과 관련해서 생기는 긴장도, 모두가 음자체의 울림의 매력과 거기에서 조성되는 미묘한 그림자 가운데 융합되어 버린다. 기능화성 원리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인 주제법은 시대감각에 따라 이미 염두에 두지 않게 되었다. 요컨대 앞에 말한 기법을 통하여, 음악 청취의 근본적 방법이 기능화성 원리를 대신하여 정법성을 바탕으로 한 음향감각적-음색 원리를 전면에 내세워 작품 형성을 일관시킬 때, 비로소 인상주의 음악이 성립된다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개개의 음색 효과에 부가된 이미지가 연쇄 추적되어 특수한 방식으로 전체적 효과를 위해 집결되는 것이며, 인상주의 음악은 그 수단으로서 가장 두드러지게 음향 감각적인 것을 내세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 음향을 초월한 예술인 것이다. 인상주의 예술은 어느 분야에 있어서나 프랑스가 주도적인 지위에 서 있었다. 인상주의 예술은 어느 분야에 있어서나 손꼽지만, 뒤카, 시미트, 루셀 등이 있으며, 또한 라벨의 작품 중에도 그와 비슷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가 프랑스의 작곡가인만큼 인상파 음악은 1890년 전후부터 1910년대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일 낭만주의는 바그너가 거대한 정점에 올라앉은 이후부터 점차 붕괴의 과정을 밟았고, 그 결과로서의 새로운 세력이 된 것이 이 인상파였던 것이다. 프랑스 외에 도 스페인의 팔랴, 투리나, 이탈리아의 레스피기, 독일의 시네커, 슈테판, 폴란드의 시마노프스키, 영국의 델리어스, 본 윌리엄즈, 스코트, 미국의 그리프스, 레플러, 그리고 어느 한정된 작품에 있어서의 스크랴빈, R. 시트라우스와 같은 다소나마 이 경향에 동조한 바 있는 작곡가들이 여러 나라에 나타났다. 그러나 인상파는 그 뒤 오늘날에 이르는 어느 악파와도 마찬가지로 끝내 한 시대를 좌우할만한 지배적 양식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음악상의 인상파에 있어서 인상적 계기가 인상주의적 계기로서 표출화 하기 이전에도 쇼팽, 리스트, 바그너, 랄로, 무소르그스키, 샤브리에, 그리그, 포레, 사티 등의 음악가운데 그 선구적, 과도적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기능화성법의 원리적 의의를 근본부터 뒤흔들었던 인상파의 감수성의 영향은 후세에까지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나 인상주의의 미학이 전면적으로 우위를 지속할 만큼의 양식은 그 뒤에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기법이 악곡 가운데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을 뿐이다.

 

근대음악(1901년~1945년 2차 대전까지)

근대 음악의 여러 형태

신비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신고전주의, 신낭만주의, 신신비주의, 십이음렬주의, 신즉물주의, 원시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 시대의 음악가

바르톡, 라벨, 사티, 오네게르,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라흐마니노프

 

근대 음악의 여러 형태

 

신비주의

신비주의는 본래 이성을 배척하고 직관을 중시 여기며 의식을 가볍게 다루고 내적인 경험을 존중하는 것이다. 판단과 추리 따위의 사고를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이든가 신에 대해 어떤 독특한 방법으로써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그 정신을 고양시켜 주관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러, 이른바 법열감(法悅感)에 찬 가장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여간 거기에는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짙게 느껴진다. 이 경향은 사티와 졸리베 등에게서도 볼 수 있지만 이의 대표적인 작곡가는 러시아의 스크랴빈이다. 그는 1908-1925년을 브뤼셀에서 지내는 동안신지학(神智學)의 클럽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신지학이란 자연을 하나의 신비로 보고 그 비밀을 연구하여 신과의 신비적인 합일을 이룸으로써 마침내 신의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철학적 종교 사상인데 합리주의의 입장을 물리치고 자신을 신적으로 도취시켜 신의 내용을 인간화하여 인간의 최고의 경지를 탐구하려는 데 있다. 이 같은 경향은 특정한 시대의 양식은 아니지만 독일의 신비주의의 시작이 13세기경인데, 신앙심이 높았던 14세기의 종교적인 행사 같은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스크랴빈은 이 신지학에 입각한 신비주의자였다. 작곡 기법상에 있어서 그는 선구적인 여러 방법을 시도했는데 그는 이른바 신비 화음(mystic chord)을 구성하였다. 이는 즉 6개의 음(c-f#-bb-e-a-d)으로 성립된다. 이로써 조옮김과 자리옮김도 가능하고 하모니도, 가락도 낼 수 있다. 그 같은 방법은 쇤베르크의 음렬작법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경향은 1903년에 쓴 제3 피아노 소나타에서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오케스트라 교향시 '법열의 시'와 최초의 교향곡인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독자적인 기반을 이루었다.

그의 미완성으로 끝난 '신비'에 있어서는 빛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냄새와 맛까지도 끌어들인 모든 감각을 합친 신비극을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그는 음시(音詩) 분야에서 사상과 음과의 종합예술을 창안하였다.

 

표현주의

인상주의와 마찬가지로 회화의 정의를 음악에 옮겨온 것, 인상주의가 객관적인 냉정한 태도로 외계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대하여 표현주의는 자신의 마음의 표출을 제일의 적으로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회화 등에 비해 심정 표현적이므로 많건 적건 간에 표현주의적 요소가 있으며, 음악사상으로도 그 경향이 농후하게 나타난 시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보통 표현주의의 음악이라 말할 때에는 20세기 초에 있어서의 한 경향에 한정된다. 회화에서는 큐비즘, 포비즘 등의 경향이 이에 포함되지만, 음악에서는 특히 쇤베르크 등을 중심으로 한 게르만계의 작곡가를 표현주의 계열이라할 수 있다. 쇤베르크는 특히 칸딘스키, 코코슈카 등과도 연락이 있어 이 점에서도 표현주의의 계열은 분명하다. 칸딘스키는 특히 추상화의 창시자로서 유명하지만 이와 같은 외적 존재에서 분리된 자기의내면을 지주(支柱)로 하는 구성은 음악에 있어서도 일종의 구성주의로서 나타난다. 후기 낭만파에서 이어 받은 표현의 극한까지의 추구와 함께 이것을 자기의 주관에 의거한 구성에 의하여 진술해 간다는 이 두가지 경향이 표현주의 시대의 양상을 이룩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표현파의 화가 키르히나는 "게르만적인 인간의 내면의 환상에서 포름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확실히 표현주의의 본질을 지적한 것이며 음악에서도 게르만계의 작곡가가 표현주의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미래주의

20세기 초두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넷티가 제창한 하나의 예술 운동을 말하는데, 이는 마리넷티의 지도 밑에 회화와 시로부터 예술 전반에 걸쳐 파급되었다. 그들은 전통에 반항하여 급진적이고 행동적인 미래파의 선언을 1909년 2월 파리의 피가로지에 발표하였다. 이는 메카니즘(machanism)에 대한 예찬이며 기계미(機械美)에 대한 인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과거의 문화에 대한 인습적인 동경을 부정하는 것이며 근대 사회의 다이내미즘의 동적인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음악 분야에 있어서는 작곡가 프라텔라가 주창자로서 1912년에 미래주의 음악을 선언하였으며 기계포(機械砲), 사이렌과 기적이 음 등 시끄러운 음을 사용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시인 루이지 룻솔로는 그와 협력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전차와 내연 기관과 자동차의 군중의 소음을 이상적으로 뒤섞어 맞추는 것이 '영웅'이나 '전원 교향곡'을 반복하면서 듣는 것보다 훨씬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많은 소음 악기를 만들었고 소음 예술의 기초적인 법칙의 확립을 위해 소음을 6개의 종류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이 미래주의(=소음주의)의 작품에는 바람과 우뢰, 자동차의 경적, 아이들의 완구 등 모든 종류의비음악적인 소음을 사용하였다.

1914년 이탈리아의 밀라노 극장에서 19개의 소음 악기 등으로 된 연주가 있을 때 청중 중의 반대자들과 30분간이나 난투극을 벌이면서 이 소음 오케스트라를 룻솔로가 지휘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전부터 대전 중에 걸쳐 유럽 각지에서 행해졌다. 물론 그것은 전쟁의 긴장과 불안에서 오는 시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이 음악이 이탈리아와 파리 등지에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향은 마침내 현대 음악에 타악기를 많이 사용하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20세기의 기계 문명과 그의 다이내미즘에 대한 동경 등은 후세에 바레즈와 같이 13인의 주자에 의한 이조의 타악기의 이오니자시옹(Ionlzation)의 작품과 제2차 세계 대전 후 현대의 뮤지크 콩크레트 등에 유형 무형으로 영향을 준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고전주의

후기 낭만주의의 주정성, 표제성에 대한 반동으로서 생긴 작곡 경향의 하나로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주로 부조니에 의해 제창되고 체계가 세워졌다. 음악에 있어서는 음의 길이나 간격, 음악에 대한 엄격한 객관적 태도를 중요시했고, 그 때문에 바로크 혹은 그 이전의 대위법적 수법을 존중해서 파르티티, 콘체르토 그롯소, 토카타, 파사칼리아, 리테르카레 등의 형식을 썼으며, 프랑스에서는 바하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부조니는 자작인 <희극 서곡>(1897)이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에서 이미 이러한 실험을 하고 있으며, 1920년대의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노협주곡(1925), 발레<뮈즈 신을 거느리는 아폴론>(1927)등에서 이것을 실천했다. 이 밖에 힌데미트, 카젤라, 말리프에로, 피스톤 등도 같은 작품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신고전주의 라는 표현은 종종 브람스, 프랑크, 레거 등에게도 사용되지만 그들의 창작활동을 신고전주의로서의 움직임이라고는 볼 수 없다.

 

신낭만주의

비더마이어 양식의 반동으로서 일어난 정신적 경향, 음악 예술상의 바그너 <예술과 혁명>(1849)이란 책에서 정점에 달했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이 말은 이 한 시기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고, 후기 낭만파와 같은 뜻, 20세기의 작품으로 낭만적인 경향을 가진 작품, 신고전파 이후의 경향 등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지극히 보편적으로는 근대 음악의 선구를 이룬 작곡가 엘가, R. 시트라우스, 시벨리우스, 레거 등의 음악을 가리킨다. 특히 독일어의 Neuromantik는 바그너, 브람스, 볼프, 브루크너 등을 한데 뭉쳐서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수가 많다.

 

신신비주의

금세기 프랑스 작곡계의 최고봉 중의 한 사람인 메시앙은 악계에 주목을 끌고 있다. 그의 특성 중의 하나는 영감에 신들린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 제목의 대부분은 종교적인 것들이다. 그에 의하면 "신의 말을 거는 사람만이 위대하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6인조에 대한 반동으로 드뷔시 풍의 인상주의적인 수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드뷔시의 교회 선법이나 온음 음계 대신 조옳김의 한정된 선법인 일종의 독특한 음계를 사용하여 독자적인 분위기를 나타낸다. 1930년경부터 그는 인도의 리듬, 그리스의 리듬, 새의 노래의 리듬, 또는 비역행 리듬 등 각각 특징을 지닌 리듬에 대한 이념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신비주의는 두 차례에 걸친 대전의 후반에 속하는 작품 스타일을 말한다. 그는 드뷔시의 기법을기초로 하면서 신비주의적인 스크랴빈과 사티의 음악 이념을 계승하였다. 그의 작품 중 특히 1931년의 오르간곡 '그리스도의 승천'과 '그리스도의 강탄' 그 밖의 작품을 보면 그는 분명히 종교적인 명상과 신학적인 사색, 나아가서는 종교적인 감정에 깊이 이끌려 법열의 경지와 음악 창작의 행위를 일치시켜려는 것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1935년 그는 앙드레 졸리베, 다니엘 르쥐르 등과 같이 프랑스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그 목표는 인간성과 서정의 회복이었고 베를리오즈적인 미학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이로 보아 그들은 신고전주의를 배격하고 낭만주의에의 동경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조옮김의 제한된 선법'은 청중이 연주회의 장소에서 음악을 듣기 때문에, 조옮김의 불가능한 성질이라든가 비역행 등을 인정할 사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듣는 이가 무의식중에 또는 모르는 사이에 불가능성의 신기한 매력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 조옮김의 한정된 데서 오는 조성의 편재와 비역행에서 오는 일종의 운동의 단일성, 말하자면 처음과 나중이 같은 데서 오는 융합 등의 효과란 모두 신비적인 경지에 이르는 법열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십이음렬주의

12음기법이라 불리는 작곡상의 방법에 입각해서 작곡된 음악을 말한다. 12음이란 반음계에 포함된 12음을 뜻하고 있으며, 이 12개의 음을 조직적으로 균등하게 사용함으로써 조성 또는 선법에 입각한 음악과는 다른 체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20세기 전반에, 그 때까지의 조성체계를 초월한 하나의 새로운 기법으로서 전개된 것이며, 그와 같은 뜻에서 무조음악의 한 형식이라 하여 <조직화된 무조음악>으로 보는 측도 있지만, 현재의 그 전개 상태로 본다면 무조음악과는 다른 별개의 양식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2음음악에는쇤베르크가 창시한 계통과 하우어의 계통이 있는데 현재로는 쇤베르크의 계통이 주류라고 생각해도 좋으므로 여기서는 그 기법에 대해 설명한다. 쇤베르크의음기법을 그의 말에 의해서 다시 자세히 정의한다면 <개개 음의 상대성 관계로서 형성된 12음에 의한작곡>이란 것이 된다. <상호간에서만 관계가 맺어졌다>함은 조성음악의 토닉, 도미넌트 같은 기능에대한 말로서 판단한다면 이해가 용이하리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조성음악에서의 모든 음은 그 선율의 중심적인 토닉에 관계에서 생각되어진 것이며, 조바꿈에 의해 다른 조가 사용된 때라 해도 그것은 중심적 조성에의 관계조라는 뜻으로 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2음음악에서는 모든 음은 그 직전의 음과의 음정 관계에 의한 결부만이 인정되는 것이며, 모든 음은 평등하게 취급된다. 또 다음의 <12음>이란 전술한 바와 같이 반음계에 포함되는 12개의 상이하는 음을 전부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것으로써 어떠한 작곡이 행해지는가? 실제 작곡에 있어서는 우선 <12음 음렬.이라는 것이 설정된다. 이것은 12반음을 어떤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며, 그것은 개개의 악곡마다 각각 새로이 설정된다. 이것은 그 이전의 음악에 있어서의 선법 또는 음계와 비슷한 작용을 하며 그와 동시에 주제로서의 역할도 갖는다. 12음의 작곡은 원칙적으로는 이 음렬을 되풀이해서 제시함으로써 구성되는 것이며, 그럴 때에 이 12개의 음의 순서는 항상 지켜지고 있다. 말하자면 어떤 음이 연주되었을 경우, 나머지 11개의음이 음렬적으로 제시된 뒤가 아니면 그 음이 다시금 되돌아올 수는 없다. 이것은 12개의 반음 중 어느것에도 다른 음보다 뛰어난 기능을 주지 않기 위한 규칙이다. 단, 이상의 규칙만으로는 악곡이 필연적으로 단조로와지고 발전성이 없으므로 우선 음렬을, 그 성질을 파괴하는 일 없이 변화시키는 것이 고려된다. 그 가장 기본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각개 개시음을 12반음 중 어느 음에다 옮겨 놓음으로써 11개의 다른 형을 얻을 수 있으므로, 합계하면 1개의 음렬에서 48개의 음렬을 얻는 셈이 된다. 12음음악에서는 선율은 물론, 화성도 모두 이 음렬의 이용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므로 악곡의 모든 음관계는 이 음렬의 음정에 의해 특징지워지고 통일되는 것이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정만의 규제이고, 리듬과 악식에 대해선 12음음악으로서의 특별한 규정이 없다. 그러나 음악은 유기적 구성체이므로 선율이나 화성에 따라 리듬과 악식도 조성음악과는 다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인 말할 나위도 없다.또한 쇤베르크의 제자인 베베른의 후기 작품 이후 이상 말한 음렬작법의 사고방법이 리듬, 음색의 분야에까지 확대되어 새로운 전개를 보이고 있는 것은 현대 음악에서의 중요한 사고방식이다. 쇤베르크가 1923년의 op.23<5개의 피아노곡> 및 op.24<세레나데에서 처음으로 시도하고 1924년의 op.25<피아노 모음곡>에서 완벽하게 전개된 12음음악은 이렇게 해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기법의 하나가 되고, 또한 새로운 기법을 낳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신즉물주의

원래는 미술 용어로서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 있어서 주관적 정신적 자아 체험의 강렬한 표현을 목적으로 한 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대두된 화가들의 경향에 대해서 이름 붙인 것이다. 1923년경부터 만하임 미술관장 할틀라우프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1925년의 만하임에서의 전람회에 이 명칭을 붙이게 된 이후로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이다. 카놀트, 딕스, 시림프, 그로스 등이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퇴폐적인 세상을 반영하여 일부에서는 일종의 악취미적인 경향에 빠지게도 되었다. 노이에 사할리리카이트는 회화에 있어서보다도 합목적기능성이라는 형식을 취하여 건축이나 실내용품, 공예품 등에 아주 강한 지속족인 영향력을 끼친 것은 연주분야였다. 그것은 그 때까지의 19세기적 낭만주의에 배경을 갖는 주관적, 연주 양식에 대한 반동으로서 주관을 배제하고 <작품에 충실한-Werktrue> 연주양식의 확립이라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토스카니니가 그 대표적인연주가이며, 오늘날 낭만적인 연주가라고 생각되고 있는 크라이슬러, 엘만, 레오니트 크로이쩌 등도 이 신즉물주의의 세례를 받은 연주가이며, 또한 시게티, 하이페쯔, 시나벨, 피셔, 빅하우스, 키제킹, 카잘스, 포이어만 등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등장했거나 또는 전성기에 있었던 연주가들의 대부분은 신즉물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러나 <Werktrue>라는 사고방식은 <악보에 충실하고 악보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일체 배제한다>는 좁고 극단적인 해석을 일부에서 하게 된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카잘스나 피셔의 바하, 시나벨의 베토벤을 생각할 것도 없이 이들 연주가들에 의해 연주가의 레퍼터리가 현저히 확대되었고, 또한 현대 음악에의 관심이 높아졌음도 확실하다. 때때로 쓰여지고 있는 <사할리히한 연주>라는 표현 방법은 확실히 용어법(用語法)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의 new objectivity는 독일어에서 온 번역이다.

 

원시주의

원시음악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는 음악사상의 선사시대 때의 음악을 말하는데 실제로는 오늘날에도역사상의 원시시대와 같은 문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인간들의 음악을 말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시대에 사용되었던 통속적인 명칭으로서, 학문적인 호칭으로는 독일계의 학파에서 <자연민족의 음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영·미계의 학파에서는 <미개민족의 음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자연 민족이란 말은 계몽주의 시대에 룻소가 <자연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문화민족과 자연민족과의 구별은 문자 문화를 갖지 않은 사람들을 자연 민족, 문자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문화민족이라고 하는 설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비 문자문화에 속하는 종족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초기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 적도-아메리카의 피그미, 카라하리 사막 지역의 부시만, 인디안의 안단에 있는 실론섬의 베타, 동남 아시아 각지의 네그리토,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원주민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농경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까지 포함한다면 각지의 종족이 이 범주 안에 들어가게 된다. 이 자연민족의 분ㅍ는 비 유럽지역에 이른다고 하겠다.

성악과 기악은, 어느 쪽이 먼저 나타났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흥미로우며 또 19세기의 일련의 음악 기원론 이 후(왼쪽 메뉴의 고대음악 참조) 많은 학자들 사이에 격론이 오고 갔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도 이 문제는 충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추측컨대 매우 원시적인 성악 양식은 가장 오래되었고, 기악보다도 먼저 나타난 가능성이 강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예를들면 오늘날에도 구석기 시대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북부 원주민은 폭발적인 에너지로서 높은 음으로 노래하기 시작하고, 선율은 자유로운 곡선을 그려서 급격히 하강하고, 피아니시모로 조용히 사라진다. 작스는 이와 같은 종류의 순수 선율을 <급승하강선율>이라고 부르고 있다. 급승하강선율에서 하강하는 방법은 각 종족에 따라 여러 가지이다. 이를테면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연속적 곡선으로 하강하는데 비해서 뉴멕시코의 븐니족은 분산화음적으로 하행한다. 벨기에의 민족음악학자 파울 콜라르는 1954년에 주목할만한 논문 <음악 창조에 있어서의 원시적 현상.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코랄은 아메리카의 버나드 발란시엔의 연구 및 다카도모-묵택정조의 대만의 고사족의 악궁연구에 근거하여, 선율의 기원에는 성악적 기원과 기악적 기원의 두 가지가 있어 각각 고유의 선율양식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악적 선율은 2음 선율부터 시작하여 4도 또는 5도로 발전해가는데 비해서 기악적 선율은 <솔-도-미-솔>의 자연 배음렬에서 출발하여 변격형의 무반음(無半音) 펠타토닉 음계로 발전했다. 또 기악 음악이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대해서는 작스의 <악기의 정신과 생성>(1929)에 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악기의 발생을 23계층으로 나누어서 논하고 있다. 이 중에서 제1층에서 제12층까지가 석기시대로 하고 있다. 또 악기의 역사적 기술에 관해서는 작스의 <악기의 역사>가 자세하다. 여기서는 악기를 통해서 음정이나 음계를 어떻게 해서 얻고 있었는지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비교음악학 또는 민족음악학적인 모든 연구를 통해서 분명해진 자연민족의 음악의 특징은 음악이 <미>를 추구하기 위한 <예술>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매우 종교적 내지는 주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일상 생활의 모든 것이 음악과 춤이 결부되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 음악이 특정의 개인이나 단체의 전용물로 생각되었다는 것, 드럼이나 악궁 또는 플롯 등 일부의 악기는 언어와 동등한 전달 수단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 등일 것이다. 현존하는 자연 민족의 음악은 음악사의 원시시대 혹은 고대를 기술하는 경우에 가장 유력한 음악자료인데, 최근에는 많은 자연민족이 점차로 주위의 고도 문화와 접촉하여 <문화수용>을 일으키고 있으며 귀중한 자료는 잃어가고 있다. 어컬튜레이션이란 <각자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개개의 그룹이 지속적인 접촉을 하여 어느 쪽이고 한 쪽 또는 양쪽의 그룹으로 원래의 문화유형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현존하는 자연민족의 음악중에서 무엇이 본래의 것이고, 무엇이 어컬튜레이션인가를 구별해서 가려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자연민족의 음악의 연구에 대해서는 민속학적방법, 민족학적방법, 인류학적방법 등 외에 새로운 경향으로 양식분석방법이 여러 가지로 시도되어가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19세기 러시아의 음악은 5인조 등의 작곡가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유럽 음악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이래 러시아는 세계 민족 음악 운동의 선구자 내지는 추진력이 되어왔다. 1917년 혁명을 계기로 하여 1920년 무렵에는 예술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것 또는 전위적인 것이 용인되었다. 따라서 유럽의 모더니즘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는데, 1928년 제 1차 5개년 계획을 계기로 하여 예술 부문에까지 이데올로기의 강화로 나타났다. 1930년에는 형식에 있어서는 민족적, 내용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선언하였다. 그 후 당의 정치적 요청에 따라 서구적인 모더니즘을 깨끗이 털어 없앰으로써 작곡 양식은 19세기로 되돌아간 감이있다. 그들은 엄한 비판을 강행함으로써 그 내용에 있어서는 계급적인 것, 나아가서는 국가 목적에 합치되는 작품을 강요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인 형식주의에 의해 이루어진 대중과 예술의 분열을없이 하고 개인적인 창조 활동을 사회에 재통합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사회주의적인 예술 창조의 방법이다.

 

현대음악(1945년 2차대전 이후)

현대 음악의 여러 형태

뮈지크 세리엘르

뮈지크 콩크레트

전자음악

우연성 음악

재즈 음악

 

이 시대의 음악가

프로코피예프, 브리튼, 메시앙, 힌데미트, 오르프

코다이,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케이지

 

1. 현대 음악의 여러 형태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음악은 먼저 음악관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 새로운 소재와 방법을 탐구하였다. 제1차 대전 후는 반낭만적인 사조의 흐름에 따라 신고전주의 방향으로 나갔다. 제2차 대전 후에는 전반적으로 전혀 새로운 영역을 향해서 출발한 감이 있다. 개중에 메시앙과 같은 이는 르네상스나 혹은 중세의 기교를 부활시키려는 경향도 볼 수 있으나 젊은 세대의 작곡가들은 새 양식을 개척하는 데 힘을 경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 뮈지크 세리엘르는 12음 음악에서 발전적으로 파생한 것이다.12음 기법은 제2차 세계 대전후 점차 일반화되어 왔으나 창작상의 문제로 따져 본다면 이미 과거의것이다.

12음 기법의 창시자인 쇤베르크는 음의 높이에만 세리(순열-順列)를 규정했을 뿐, 그 밖의 요소는 옛 그대로의 수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베베른의 후기의 작품 중에서 1940년에 쓴 '오케스트라의 변주곡 op.30'에는 음의 높이와 함께 리듬의 세리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쇤베르크가 다하지 못한 것을베베른이 새로운 세리의 관념을 확립시켰다. 다시 말하면 세리에 의한 구성원리를 음을 높이 이외에 음가, 셈여림, 음빛깔 등에 대해서도 적용하였던 것이다. 한편 메시앙은 그리이스와 인도의 리듬에 관심을 가지고, 1941년에 쓴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이라든가 1948년 교향곡 '튀랑 갈릴라'에서 높이뿐만 아니라 지속, 강약, 음색 등을 음 소재의 요소로 채택했다. 이는 지난날의 하모니, 멜로디, 리듬이라는 음악적 3요소에 비해 일보 전진한 것이다. 이를 세리엘르적으로 사용하여 정밀한 음 감각을 표현하며 결국은 작곡자의 주관으 떠나 객관적으로 나타낸다. 이 같은 수법은 젊은 세대, 예컨대 시톡하우젠과 볼레즈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뮈지크 세리엘르란 말은 1955년경에 사용되었는데 1955년 프랑스의 볼레즈가 르네샤르의 시를 가지고 작곡한 '주인 없는 방망이'의 성악과 실내악의 작품에서 이 수법을 볼 수 있다.

한편, 이탈리의 작곡가 노노 또한 대전 후 주요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베베른 후기 작품의 기법을 이어받아 멜로디뿐만 아니라, 음의 길이, 강약, 밀도, 템포 등에 세리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메시앙의 수법이 젊은 작곡가들에게 준 영향은 물론 정교하고 치밀한 음 감각을 표현하는 방법의 보편화 및 전자 음악의 작곡법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뮈지크 콩크레트

뮈지크 콩크레트 - 구체음악(또는 구상음악)이라고도 한다. 1948년이래 파리 방송국에서 셰페르가 실험을 시작, 작품은 처음에 라디오로 방송되었고, 또 52년에는 사르가보의 청중 앞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한 번 외계에 울린 소리, 예컨대 철도소리, 사람소리, 악기소리, 자연계의 소리, 동물의 소리 등을 녹음하여 이것을 기계 또는 전기로 조작하여 변질, 중합시켜 한편의 음악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초기에 있어서는 음반이 사용되었는데, 얼마 뒤 보급되기 시작한 테이프 레코더가 이를 대신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미래주의 운동이 음악에 끼친 영향의 결과라고 할 롯솔로의 <소음주의>가 그 기원으로 생각되지만, 셰페르 자신은 그 사실을 전연 몰랐다고 말한다. 여하튼, 음에 의한 초현실주의적인 표현으로 생각되며, 첫 해에 셰페르는 <철도의 에튀드>외 6편, 다음 해에 <멕시코의 피리>외 1편, 50년에는 작곡가 앙리와의 협동으로 <애매한 협주곡>등 모두 6편의 작품을 내어놓았다. 1952년에는 불레즈(에튀드 I, II)나 메시앙(음색=지속) 등이 제작에 참가하였는데, 이들은 뮈지크 세리에르의 양식 및 전자음악의 초기 양식에 가까운 구조적인 것으로서, 셰페르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과는 아주 대조를 이룬다. 1953년에는 셰페르와 알리의 공종작품으로 1시간 남짓을 요하는 대작의 오페라 <오르페우스 53>을 완성, 이것은 서독 도나우에싱겐의 현대 음악제에서 공연되었는데 독일 비평가들로부터는 독선적이라 해서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54년 봄, 서독 카셀에서 카프카의 소설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구상음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뒤 파리에서 바레즈의 <사막>(1954)을 비롯하여 필리포, 아르튀이, 하우벤시톡=라마티, 크세나키스, 페라리 등이 작품을 제작하였고, 미국에서는 콜롬비아의 프린스턴 전자음악센터에서 1952년 이래 우사제프스키와 뤼닝이 같은 실험을 하였다. 또 시톡하우젠은 56년의 전자음악 <소년의 노래>에서 전자음과 소년의 노래 소리를 구성적으로 변질한 소재를 혼합했으며, 그 이후로 이런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오늘날 순수한 음악작품으로서의 구상음악의 존재 의의는 의문시되고 있으며 극·영화의 반주 이외에 방송용의 극음악에 있어서 전자음, 재래의 기악·노랫소리·대사 등과 함께 일종의 소재로서 쓰이는 일이 많아졌다.

 

전자 음악

전자계산기-Computer가 실무나 학문의 영역에서 커다란 업적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흔히 일반 사람들은 전자음악이라면 이러한 종류의 전자 두뇌로 만들어지는 음악으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전자계산기의 정보를 주어 제작하는 Computer-music이라 불리는 음악도 일종의 전자음악이 틀림없으며, 이미 미국의 벨 연구소, 서독 뮌헨의 지멘스 회사 제작의 기기, 거기다 스웨덴의 스톡홀롬에서 Computer-music의 실시가 진행되는 중이며 이것이 장래의 전자음악의 주류를 이루리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음악계에서 전자음악이라고 흔히 불리는 것은 음원을 얻는다는 것과 그것을 변형·중합시키거나 재생시킴에 있어서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전자적 회로를 이용함에 불과하며, 작품을 테이프 위에 고정시킴에 있어서는 가위와 접착 테이프로 무수히 떼어 내거나붙이거나 해서 조작하는 등, 극히 수공업적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작곡상의 아이디어도 후기의 베베른에서 시작되는 뮤성법에 의하고 있다. 이 같은 전자음악은 1950년부터 서독 쾰른의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실험이 시작되어 53년에는 창시자 아이메르트와작곡가 바이어의 공동작인 <음향습작 I, II>등 세 작품이 시작되었다. 아이메르트의 모든 작품을 거쳐 53년부터 54년에 걸쳐서의 시톡하우젠의 작품 <습작 I, II>가 정현파를 사용해서 결정적인 성과를 올렸으며 훗날 레코드로 취입되어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러한 작품에서 이론적으로는 무수히 많이 얻을 수 있는 음소재의 음높이를 극히 한정시키고 있다. 음소재는 앞서 말한 정현파 외에 톱니파,단형파, 백색잡음, 클리크음 등도 사용되고 합음이나 백색잡음에서는 제성여기기를 사용하여 어느 음역을 잘라버리는 등의 수법도 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소재의 음이 시작이나 마침에 있어서의 미묘한 음량 변화, 악기에서는 불가능한 빠르거나 정교한 리듬 등, 전자음악의 영역은 매우 넓으나 한편 그러한 감각생리와의 결부에는 여전히 미지의 문제가 많다 하겠다. 앞서 말한 쾰른 이외에도 독일의 바덴바덴과 뮌헨의 방송국, 베를린 공과대학, 다름시타트의 작곡가 하이스의 연구실, 벨기에에 있는 <APELAC>의 스튜디오,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 미국에서는 프린스턴의 전자음악센터와 일리노이 대학,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의 음악연구 스튜디오, 네델란드의 유트레히트 대학, 폴란드의 바르샤바 방송국, 스위스의 그라베자노의 실험실 등, 세계 가기에서 전자음악 개발에의 왕성한 의욕을 볼 수 있다.

 

우연성 음악

이 우연성의 음악은 우연 음악 또는 불확정성 음악의 이름으로통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존 케이지의 사상적 실천, 나아가서는그와 같은 동료들 간에 맺어진 용어로서 광범위한 내용에 그 한계는 애매한 점이 없지 않다. 아무튼 그는 조성에서 탈피하려면 음 그 자체부터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12음음악과 무조 음악에서 떠나 주로 타악기를 위해 작곡했으며 타악기만으로 앙상블을 조직하였다.타악기 연주자를 모아 그는 14회의 연주회를 가졌고 독자적인 음향 소재로 된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사용하였다. 이 피아노에는 여러 가지 금속, 나무, 참대, 고무, 유리, 그 밖의 물체를 각기 피아노 줄에 접촉시켜 음질, 음의 높이 등의 변화를 내서 독특한 음색과 타악기적인 효과를 노렸다. 뿐만 아니라 1954년의 피아노곡 '4분 33초'에서는 피아니스트가 악기 앞에 앉은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시간이 지난 후 퇴장한다. 그런데 그 시간에 들려 오는 잡음이라든가 듣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 고동소리 그 모두가 다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는 같은 해에 서독의 도나우에싱겐의 현대 음악제에서 피아니스트인 튜더와 함께 2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에 장난감과 피리 등을 가지고 '34분 46.776초'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야유와 폭소와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사상은 유럽 작곡계의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종래의 뮈지크 세리엘르이 너무나 치밀한 작곡법에 대한 반발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오케스트라의 어떤 파트에 대하여 개략적인 지시만을 줄 뿐, 연주자의 어떤 범위 내에서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작곡법이 오늘에 와서 일반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특히 아메리카에서는 음악도 그 역사와 약속에서 사로잡히지 않고 인생과 실생활의 심볼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적인 것, 그런 기분이야말로 내가 가장 아메리카에서 즐겨하는 본질"이라고 했다.

이 우연성 음악을 단적으로 말한다면 감각적이고 비정적이며 때로는 자극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대전 이후 계속되는 세계의 정치적인 위기라든가 인간 존재에 대한 불안 같은 데 기인하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에 나타난 여러 가지 의의 중의 하나는 작곡가의 체험의 폭을 확대시키고 나아가서는 개인을 초월한 세계를 대상으로 하려는 데 있다.

 

재즈 음악

 

재즈는 19세기 말부터 미국 뉴올리안즈에서 생겨 발달한 음악이다. 재즈 음악 연구회 회장인 마이셜 W. 스탄즈 교수는 "재즈란 유럽으로부터의 멜로디와 하모니 그리고 유럽의 악기가 아프리카의 리듬과 혼합하여 미국에서 육성된 미국의 음악"이라고 재즈에 대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이 재즈는 대중적인 음악 전반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리얼 재즈에 관해 언급하기로 한다. 이 음악의 근원은 대단히 광범위하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온 흑인의 원시적인 리듬을 가진 민속음악과 유럽의 음악, 특히 민요 등과 융합한 것으로서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대중 음악이다.

1915년 재즈 밴드로 공개 연주한 이래 지금은 세계를 정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야성적인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한편, 종류에 따라서는 댄스 음악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널리 퍼졌다. 재즈는 즉흥적으로 가락을 지어 연주하는데, 종교적인 내용을 가진 영가, 블루스들이 중요한 근원으로 되어 있다. 재즈는 보통 4박자인데 2박짜리도 있으며 악센트는 제2, 4박에 두고 연주한다. 가락은 특수한 신커페이션을 사용한다. 재즈의 종류는 대략 뉴올리안즈 딕실랜드 재즈, 소편성의 캄보우 재즈, 보칼 재즈, 심포닉 재즈, 모던 재즈, 신기한 노베르티 재증 등이 있다. 그리고 마치 요람에서 흔들리는 듯한 스윙 재즈, 열광적인 한 재즈 등이 있다.

한편, 재즈 음악에 거쉬인을 위시하여 그로페 등은 현대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재즈 작곡가로는 스트라빈스키, 사티, 힌데미트, 미로, 라벨, 오네게르, 기타 많은 이들이 있다. 재즈는 신선하고 젊은 활기에 찬 정열적인 것으로서 세계의 재즈 팬들에게 매혹적인 대중 음악으로 대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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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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