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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19 프랑스문학의 기원 by 아데라


프랑스문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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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난 제일 먼저 프랑스 문학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한 나라의 문학의 기원을 알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기원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한 나라의 문학적, 정신적 토양이 어디 있는지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것은 인위적으로 단절 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나라의 구성원 들이 어떠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이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 한 나라의 문학의 기원을 추측한다는 것은 곧 그 나라 문학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문학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서양 문학의 주류로 인정 받아온 프랑스 문학이지만 서양문학, 또는 문화의 젖줄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프랑스 문학은 이 고대의 유산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느냐의 문제와 귀결된다. 게다가 한 나라의 문학은 국가의 성립과도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나라 언어의 문제도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국가, 언어, 그리고 문학의 관계를 다루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문학을 말할 때 한문학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와도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문제를 단순화 하여, 내가 살펴볼 프랑스 문학은 프랑스라는 국가의 형태가 갖추어 지고 프랑스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최초의 왕조라 할 수 있는 메로벵 왕조(La dynastie des M'erovingiens) 시대부터 비록 라틴어를 모체로 하면서도 나름대로 현대 프랑스어의 전신이 되는 자신의 언어를 가꾸기 시작했음을 상기할 때, 우리는 프랑스의 역사, 그리고 언어의 기원을 살펴보고 문학의 장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선은 고대 프랑스어(Ancien francais) 로 씌어진 최초의 문학들을 살펴보고 다음으로는 일종의 서사시적 성격의 무훈시(武勳詩), 그리고 문학 장르 구분에 따라 시, 소설, 연극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 기원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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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재 프랑스라고 부르는 지역에는 기원전 5-6세기 경에는 켈트(Celtes)족이 살고 있었고 이 지역은 골르(Gaule) 지방이라 하는데 로마인들은 이를 갈리아(Gallia)라고 불렀다. 골르 지방은 비옥한 지역으로 주위에서 끊임없이 침입을 받았는데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미 게르만족의 위협이 동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는 골르 지방 남부에 관심을 가지고 기원전 125년경 현재의 남프랑스를 침공하여 이 지역을 속주로 만든다. 기원전 58년 시저의 로마군은 마침내 골르 지방을 정복하는데 성공하였고 기원전 51년 골르 지방은 완전히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게르만족의 저면적인 침입이 있기 전까지 약 500년 동안을 흔히 갈로-로멩(Gallo-Romain)의 시대라고 부른다.

게르만족의 침입은 갈로-로멩 시대 초부터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왔는데 기원전 4세기부터는 로마제국의 약화와 더불어 더욱 노골적으로 행해졌다.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 중 궁극적으로 골르 지방에서 로마의 세력을 몰아낸 것을 프랑크족이었다. 특히 프랑크족의 클로비스(Clovis)는 486년 스와송(Soisson)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골르에 남아있던 로마의 군사 잔재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제 골르의 주인은 프랑크족이 되었으며 이 부족의 이름은 현재 프랑스의 기원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몰락, 그리고 프랑크족의 골르 정복, 역사는 이제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고 프랑스의 역사가 시작된다. 클로비스의  메로벵 왕조(428-751)는 프랑스의 제2왕조인 카롤렝 왕조(La dynastie des Carolingiens, 751-987)로 이어진다. 이 시기의 초반에는 그 유명한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가 나타나서 통일 제국을 이룬다. 대제의 죽음 후 프랑스는 분열되고 취약해진 왕권 하에 봉건제도는 점점 그 기반을 다져간다. 프랑스의 제3왕조는 위그 카페(Hugues Capet)와 더불어 시작하는 카페 왕조(La dynastie des Cap'etiens, 987-1328)로서 왕의 힘은 강력한 제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군웅할거의 봉건제도가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그럼 이제 프랑스 초기의 언어와 프랑스어의 탄생과정에 대하여 알아본다. 우선 골르 시대에는그들 고유의 언어인 골르와(Gaulois) 언어를 사용했으리라 생각되며, 로마의 침입은 이들의 언어와 문화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골르인들은 구어 라틴어의 영향으로 자신들의 언어는 점점 잊게 되었다. 반면 관리나 학자들, 특히 교회에서는 고전 라틴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시기는 식자층이 사용하던 라틴어, 그리고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던 라틴어로 양분되는데 이 구어 라틴어는 게르만어의 영향을 받게 되며 이러한 토대 위에서 6세기부터 9세기에 이르기까지 골르 지방에서 통용되던 갈로-로망(Gallo-roman)이라는 언어가 형성된다. 이 언어는 단순히 로망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의 로망어라는 것은 로마제국 본토에서 사용되던 구어 로망어를 뜻한다. 그런데 이 로망어 자체도 단일한 것이 아니라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어서 프랑스의 경우 이 언어는 크게 둘로 나뉘어 진다. 대체로 현재의 대서양 해안의 라 로셸을 시작으로 중부 산악지대를 넘어 그로노블, 리용 정도를 잇는 선에서 남쪽의 언어는 랑그 독(Langue d'oc)이라 하고 그 북쪽의 언어는 랑그 도일(Langue d'oil) 이라 한다. 이중 랑그 독은 오늘날의 프로방스 지방의 방언인 프로방살(Provencal)이 되고 랑그 도일이 오늘날 불어의 모체가 되는 고대 프랑스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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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년『스트라스부르의 맹약(Serments de Strabourg)』은 로망어로 씌어진 현존하는 최초의 문헌이라고 간주된다. 이는 샤를마뉴대제의 손자이자 경건왕 루이(Louis le Pieux)의 아들인 독일왕 루이(독일어로는 루드비히-Louis le Germanique)와 대머리왕 샤를르(Charles leChauve)가 경건왕 루이의 사망 후 장자의 권리를 근거로 제국 전체의 상속을 요구하는 그들의 또 다른 형제인 로테르(Lothaire)에 대항하여 서로 도울 것을 약속한 것으로써 당시의 역사가인 니타르(ithard)가 약 860년경에 엮은 연대기에 실려 있는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의 맹약』은 역사학이나 언어사 측면에서 중요할지는 몰라도 문학작품이라 볼 수는 없다. 9세기 말에 씌어진 『성녀 욀랄리 찬가(Cantile'ne 또는 Se' quence de Saint Eulalie)』에서 우리는 좀더 문학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성녀를 찬양하는 29행의짧은 이 시는 성자들의 삶을 통하여 대중을 교화시키려는 다분히 교육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9세기 말부터 11세기에 걸쳐 나오게 되는 이러한 성자전으로는 『레제 성자전(Vie de Saint Le'ger)』『프와 다장 성녀의 노래(Chanson de Sainte Foyd'Agen)』등이 있다. 이와 같은 성자전은 그 내용이 너무도 종교적이고, 교화적인 측면이 강해서 혹자는 이를 문학작품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11세기 중엽의 『알렉시 성자전(Vie de Saint Alexis)』은 기존의 성자전과는 달리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우선은 길이 면에서 이는 625행으로서 당당히 독립적인 하나의 작품일뿐더러 운율과 기법에 있어서도 대단히 세련된 작품이다. 또한 분명 종교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고통과 비애가 담겨 있어서 이는 프랑스 초기 문학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며 이후 중세 프랑스 종교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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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게 되는 두개의 문학 장르는??이들은 거의 동시에 발달하게 되는데??성자전과 같은 종교문학이 갖고 있지 못한 독창성을 갖고 있을뿐더러 종교적인 내용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명백히 문학이 종교에서 벗어나 인간의 세계를 다룬 경우이다. 이중 하나는 랑그 도일로 씌어진 무훈시이며 다른 하나는 남프랑스의 음유시인인 트루바두르(Troubadour)들이 랑그 독으로 노래한 서정시(Po'esielyrique)이다. 가장 오래된 무훈시인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는 11세기 말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최초의 트루바두르라 할 수 있는 아키텐느 공기욤9세(Guillaume Ⅸ,옃 d'Aquitaine)의 생존연대는 1071년부터 1127년이다.

무훈시는 영웅들이나 기사들의 초인간적인 모험담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이는'geste'라는 단어의 어원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라틴어의 'gesta'에서 유래하는 이 단어는 훌륭한 행위, 공적, 무훈 등을 뜻한다. 무훈시는 대무문의 경우 이전 시기, 즉 샤를마뉴 대제 시대나 경건왕 루이 시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제된 주제는 이슬람교도들과 싸우는 기독교인들의 투쟁으로 집약된다. 이는 바로 프랑스의 경우는 십자군 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11세기나 12세기의 이야기임을 뜻하며, 스페인의 경우 역시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이 일어나던 레꽁끼스따(Reconquista)시대의 이야기이다. 즉 무훈시는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무훈시는 분명 중세사회의 커다란 두 개의 축, 즉 봉건제도와 기독교의 정신을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교도와 대항하여 싸우는 기독교인의 모습,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갓들의 모습, 무훈시는 십자군을 성전으로 승화시키고 왕과 신하의 수직관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개인의 이익이나 안위는 단체나 집단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사도 정시이며 이러한 행위야말로 영웅적인 행동인 것이다.

무훈시의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학자는 샤를마뉴 대제의 업적이 너무도 큰 까닭으로 후세로 구전되는 과정에 일반대중에 의해 미화되고 다듬어졌으리라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십자군 정신의 고양을 위하여 어떤 개인이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많은 이론과 주장이 있고 이 문제는 아직도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무훈시의 연구 중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으로 남아있다.

무훈시의 형식은 레스(laisse)라고 하는 시절(詩節)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10음절과 모음압운(母音狎韻)??압운이란, 글을 짓는데 운을 다는 것으로 모음압운이란 모음으로 운을 다는 것으로 현대에 들어서는 압운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등의 몇 가지 시형식이 있으며 14-15세기에는 산문화(散文化)하기도 하였다. 오늘날까지 장단(長短)80종 정도가 알려졌으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롤랑의 노래』이다.

무훈시중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완벽한 구성미를 갖춘 『롤랑의 노래』는 무훈시의 전범을 이루고 있다. 10음절의 4천2행으로 이루어진이 시는 291개의 레스로 구분되어 있다. 장대하고 영웅적인 이 서사시의 바탕이 되는 것은 8세기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자그마한 하나의 사건이다. 샤를마뉴 대제는 스페인 원정 중 색슨족의 침입 때문에 급히 회군해야만 했다. 그의 군대가 피레베네 산맥을 넘을 무렵 후위 부대가 바스크족의 기습공격을 받고 전멸을 하게 된다. 당시 희생자들 가운데 롤랑이라는 브르타뉴의 한 귀족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덧붙여지고 미화되어서 하나의 전설이 되고 마침내는 장엄한 서사시로 승화된다. 롤랑은 이 백 살이나 되는 샤를마뉴 대제의 조카로 변하고 용맹한 장수의 상징인 롤랑의 친구로서, 지혜로운 올리비에(Olivier)란 인물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스페인 원정은 십자군 원정으로 바뀌고, 기독교도들인 바스크족은 40만 대군이나 되는 이슬람군으로 대체된다. 롤랑의 군대를 전멸시키는 것은 배신자 가늘롱(Ganelon)의 간계 때문이다. 샤를마뉴는 이슬람군을 전멸시키고 가늘롱을 처형함으로써 조카의 복수를 하고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열정적인 신앙심, 대전투, 영웅적인 기사 정신, 국가에 대한 충성심,『롤랑의 노래』는 하찮은 실제사건을 하나의 서사시로 끌어올린 걸작임에 틀림없다. 분명 이 작품은 신의 도움을 받은 기독교 세계가 악의 화신인 이슬람 세력을 징벌하는 이야기이다. 이는 어쩌면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신의 권위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로마의 건국에 신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베르길리우스가『아에네이스』를 썼듯이 말이다. 한편 여기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비록 암시로 그치고는 있지만 봉건 사회의 내적 갈등을 그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 가늘롱의 배신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극적 구성의 긴장감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군주와 신하간의 어긋남을 보여주는 것이다.

『롤랑의 노래』는 무훈시의 정점을 차지하면서 그 후 많은 모방작을 낳게 되고 무훈시는 중세 문학의 커다란 유행의 물결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남에 다라 초반의 장엄미는 점점 떨어지고 때로는 광대시인의 조잡한 상상력에 의지하게 되어 13-14세기 가서는 퇴락의 길을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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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훈시가 랑그 도일로 씌어진 북부지방의 문학이라면, 또한 남성적이고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문학이라면, 이와 거의 동시대에 생겨난 서정시는 랑그 독으로 씌어진 남방 문학이며, 전체적으로 여성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는 문학이다. 애초에 서정시라는 말은 리라(lyla)라는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는 시이며 이는 서정시가 무엇보다 음악성을 갖춘 문학 장르임을 뜻한다. 남프랑스의 서정시인들은 트루마두르라고 불렸는데 이 뜻은 음악적으로, 도는 시적으로, 무엇인가 찾아내고, 만들어내고, 지어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단테는 이 트루바두르들을 자신의 선구자로 받들고 있으며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프랑스어로 시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이 시인들은 프랑스의 북부지방은 물론이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남프랑스에서 이러한 세련괴고 여성적인 문학이 태어난 것은 부유하고 문예를 사랑하며 자유스런 성향을 지닌 영주들이 시인들을 보호하였기 때문인데, 한편 아키텐느의 대 영주인 기욤9세처럼 그 자신이 트루바두르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안정을 누리고 있는 까닭으로 풍속과 문예조차도 마치 지방의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처럼 부드러움을 지향하게 된다. 지중해와 가깝다는 지형적 조건 역시 남방의 이국적 문화와의 교류를 쉽게 하였다. 특히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던 아랍문화의 접촉 역시 기억해 둘 만하다.

서정시의 가장 큰 주제는 사랑인데 이는 트루바두르에 의해 독특한 개념으로 발전해나간다. 시인들 스스로가 가장 '이상적인 사랑(Fin'amor 도는 Fine amour)'으로 명명한 이 사랑의 개념은 흔히 궁정 귀족들 간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으로 ' 궁정식 사랑(Amour courtois)'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여기서 주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귀한 신분의 귀부인(Dame)이며 이 귀부인은 사랑의 주체가 되는 남성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경우가 많다. 게다가 여자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원칙적으로 이 사랑은 결혼과는 양립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성은 여인에게서 한마디의 다정한 말, 한번의 사랑에 찬 시선을 받을 때까지 무한한 기다림 속에서 사랑을 갈구한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듯 이사랑은 수직적인 관계로 표현된다. 이 사랑은 불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까닭으로 비밀스럽게 유지되어야 한다. 더불어 끊임없이 이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등장해서 사랑의 주체는 고통에 빠진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이로 인해 식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랑의 고통 속에서도 사랑한다는 사실 그 하나로 인해 기쁨을 느낀다.

트루바두르에 의해 개척된 서정시는 12세기 중엽부터는 북프랑스까지 전파된다. 이제 북부에서도 랑그 도일로 시를 노래하는 트루베르(Trouve're)라고 하는 음유시인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남프랑스의 이상적 사랑의 주제를 차용하기도 하였지만 좀더 다양하게 시의 폭을 넓혀간다. 파스투렐(Pastourelle)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장르로, 기사가 순진한 양치는 소녀를 유혹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풍자적인 요소도 다분히 있는 시로서 귀족적이면서도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프랑스의 시 세계는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중세를 거치며 더욱 더 발전해나간다. 13세기 뤼트뵈프(rutebeuf)는 궁정식의 사랑과는 다른, 일상생활의 현실 세계로 눈을 돌린 14세기 기욤 드마쇼(Guillaume de Machaut)는 엄격한 형식미 속에서 발라드(Ballade)나 롱도(Rondeau)등의 시에 천착하게 된다. 뤼트뵈프나 기욤 드 마쇼에서 이제 시는 굳이 악기가 동반되지 않더라도 시 자체의 내적 리듬을 갖게 되었다. 15세기, 중세가 막을 내리려 할 무렵, 샤를르 도를레앙(Charles d'Orl'eans)은 잃어버린 사랑과 조국에 대한 향수를 시에 담고 프랑스와 비용(Francois de Villon)은 시를 통하여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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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중엽 무훈시나 서정시보다 약간 늦게 소설의 모태가 되는 한 장르가 나타난다. 현재 프랑스어로 소설을 로망(Roman)이라고 하는데 이 로망이라는 말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즉 이 말은 로마 본토에서 사용하던 라틴어와 구분되는 것으로 라틴어가 로마의 점령 지역에서 속화되어 그 나라 대중이 구어로 사용하는 언어인 것이다. 결국 로망이란 간단히 말해 현대 프랑스어의 모태가 되는 고대 프랑스어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로망이 어떻게 하나의 문학장르가 되는가. 당시의 식자층, 즉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주로 성직자들에 해당된다??라틴어로 된 책을 로망어로 옭기는 것이 바로 그 첫걸음이 된다. 따라서 문학장르로서의 로망은 곧 라틴어를 로망어로 바꾸는 것(Mise en roman)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로망이 처음에는 라틴 작품의 충실한 번역이었을지 몰라도 번역가의 주관성이 개입하면 개입 할수록, 상상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허구의 세계가 삽입되면 될 수록 현재 우리가 소설이라고 부르는 문학장르로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 문학의 기원을 다룬다는 면에서는 소설이라는 말보다 로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로망이 오늘날 소설의 모태가 되는 것은 사실이고 게다가 오늘날의 소설이라는 것도 시나 연극 등의 그 어떤 장르보다도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범위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비록 중세의 로망과 현재의 소설이 다른 점이 상당히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로망을 소설이라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한편 중세의 로망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를 당시의 불어로 옮겼다는 그 사실 외에도 다양하고 때로는 무분별하게 사용되었다.

로망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문학의 장르로 격상시켜서 생각할 때 프랑스 최초의 소설, 혹은 로망작품은 고대작품, 특히 라틴 문학 작품을 번안한 것으로 다음 네 편이 가장 중요하다.

 

1) 『소설 알렉상드르(Roman d'Alexandre)』: 1130년부터 1190년까지 3개의 판본이 나오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로 대부분의 경우 허구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12음절로 씌어 있어서 후에 알렉상드렝(Alexandrin : 12음절 시구)의 기원이 됨.

2) 『소설 테브(Roman de The'bes)』: 1155년경의 작품으로 외디푸스 자손들의 이야기다. 라틴작가 스타티우스(Statius, 프랑스어로 Stace)의 『테바이드(Th'baide)』를 본뜬 것.

3) 『소설 에네아스(Roman d'Ene'as)』: 1160년경의 작품으로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아스』를 번안한 것임.

4)『소설 트르와(Roman de Troie)』: 약 1170년경, 브느와 드 쎙뜨 모르(Benoit de Sainte-Maure)의 작품으로 트로이 전쟁을 다루고 있음.

 

위의 작품들은 라틴어로 된 작품을 로망어로 다시 쓴 것이기 때문에 고대로망(Romans antiques)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작품들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고대소설이라 부른다. 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작품을 소재로 하여 로망어로 씌어진 작품이되 번역가 혹은 작가의 간섭이 어느 정도 원작과의 차별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위의 작품들은 무훈시처럼 전투장면이나, 기사의 용맹함 등을 담고 있기는 하나 무훈시에서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던 요소가 크게 부각되어 있다. 위의 서정시에서 살펴본 대로 남프랑스의 부드럽고 여성적인 분위기는 북쪽으로 올라와서 북부의 트루베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는 서정시뿐 아니라 고대소설에도 영향을 미쳐서 사랑의 주제는 고대소설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궁정귀족의 부드럽고 여성적인 분위기가 널리 퍼진 데에는 알리에노르 다키텐느(Alie'nor d'Aquitaine)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는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의 부인으로, 후에는 노르망디 공??이는 나중에 영국의 왕(헨리2세)이 된다??의 부인으로 변신하게 되는 이 자유문방하고 문예에 심취해 있던 여인은 자신의 궁정에 많은 예술가들은 모아놓고 그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브느와 드 쎙뜨 모르 역시 그녀의 보호아래 있었으며, 그녀가 루이 왕 사이에서 낳은 딸들 역시 어머니처럼 예술을 사랑하고 문인들을 키울 줄 알았다. 특히 장녀인 마리(Marie)는 후에 샹파뉴 공의 부인이 되어 북부지방에 궁정문화가 널리 퍼지는데 공헌했다.

남프랑스에서 시작된 여성적인 궁정 분위기와 고대 라틴작품의 로망어로의 번안, 이것이 프랑스 소설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는데 여기에 하나 더 언급해야 할 것은 브르타뉴 지방의 이야기들이다. 이는 켈트족의 전설을 뜻하기도 하고,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브르타뉴 지방??여기서의 브르타뉴란 현재 프랑스의 브르타뉴는 물론 영국의 웨일스, 콘월, 아일랜드까지 포함된다.??에 전해 내려오는 아르튀르(Arthur, 흔히 영어로 아서)왕의 이야기를 말한다. 이제 이러한 전설이 어떻게 소설의 세계로 편입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1135년경 죠프르와 드 몽무트(Geoffroi de Monmouth)는 라틴어로 된 『브르타뉴 왕들의 역사(Historia regum Britannie)』라는 책을 쓰게 된다. 이 책은 제목이 뜻하는 바대로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역사라는 테두리에서 씌어진 것이다. 저자는 브르타뉴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으로 아르튀르왕을 부각시킨다. 구전에 따른다면 아르튀르는 6세기 초 색슨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브르타뉴를 위하여, 즉 켈트족을 위하여 싸운 인물이다. 이 역사책은 1155년 앙글로 노르망 사람이었던 바스(Wace)에 의해서 『브뤼트의 이야기(Roman de Brut)』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된다. 이는 대단히 자유스런 번역으로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에 나오는 아니에네스의 증손자뻘이 되는 브루투스(프랑스어로 브뤼트)가 브르타뉴로 오게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저자는 자신이 속해있는 국가의 뿌리를 나름대로 찾으려 한 것으로 특히 그는 프랑스인에게 아르튀르왕의 전설을 일깨워 주었다. 뿐만아니라 바스는 아르튀르왕의 용맹한 신하들, 즉 '원탁의 기사들(Chevaliers de la table ronde)'을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다. 색슨족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왕은 용맹하나 그러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함을 갖추고 있어서 궁정의 분위기는 거칠기만 한 것이 아니며, 왕은 권위가 있지만 이를 굳이 무력으로 나타내지는 않는다. 원탁이 나타내는 이미지조차도 어느 누구 하나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공평함과 평등함을 뜻한다. 칼을 휘두르며 색슨족과 대항하는 전설 속의 왕의 이미지는 어느덧 부드러운 이미지로 바뀐다.

고대소설의 영향, 여성을 중심에 위치시키는 부드러운 남방의 문학, 그리고 브르타뉴를 배경으로 하는 아르튀르와 그 기사들의 이야기, 이 3요소의 영향으로 이제 프랑스는 진정으로 소설이라는 문학장르를 갖게 된다. 이는 흔히 중세의'궁정소설(Roman courtois)'또는 '기사도 소설(Roman de chevalerie)'이라고 명명되며 이분야에서 이제 프랑스 최초의 소설가라고 일컬어지는 크레티엥 드 트르와(chre'tien de Troyes)가 등장한다.

1135년경에 태어나 1190년경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크레티엥 소설의 주된 내용은 모험과 사랑으로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그의 마지막 소설인 『성배 이야기』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프랑스만이 아니고 유럽전체에 퍼지게 되었고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부여하고 있다.

 

7

일반적으로 프랑스 연극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의식에서 찾는다. 성직자들은 종교 행사나 성자 축일의 의식에 있어서 신자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성서에 관련된 장면을 재현하게 된다. 이러한 성서적인 볼거리는 점점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는데 이 경우 사람들이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세속적인 요소라든가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삽입하게 된다. 이처럼 종교적인 요소와 세속적인 요소의 결합은 이후 프랑스 연극의 두 갈래 큰 흐름을 이루게 된다.

종교의식에서 출발한 프랑스 연극은 이후 봉건제도의 몰락과 더불어 민중의 의식을 담은 세속연극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 15세기 경에 나온 『파틀렝 선생의 소극(La Farce de Maitre Pierre Pathelin)』이 중세를 대표할 만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극 작품과 다른 장르의 작품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무훈시나 시같은 장르는 읊거나 노래하는 장르로 연극과 마찬가지로 공연의 성격이 짙다는 사실 때문이다. 또한 관중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극 자체의 속성상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글로 된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음도 하나의 이유다. 허나, 오늘날의 연극을 의미하는 단어가 중세에는 없음을 생각할 때 이런 것 역시 연극이라는 테두리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텍스트로 전해내려오는 작품은 많지 않고 또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연극이 아닐지라도 연극이 중세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양적인 문제에 국한 시키더라도 훨씬 광범위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것은 아마도 연극이 중세인들에게 있어서 생활의 한 부분임을 뜻하는 건 아닐까 싶다.

 

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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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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