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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9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14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그래 난 이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두려움과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전신이 화들화들 떨리기 시작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쥐새끼들처럼 다들 어디가 숨었어? 어서 기어 나오지 못해. 다 총살해버리기 전에! 이런 개, 돼지보다 못한 새끼들! 명색이 군인이란 놈들이 전쟁이 터졌는데 싸울 궁리는 안하고 제살 궁리부터 하다니. 빌어먹을!”
 
민병기 소대장의 목 갈린 부르짖음이 멀리, 아주 멀리에서 들리는 우렛소리처럼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소대장의 짤막한 독전도 뭉텅 삼켜버리고 말았다.
 
총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이렇게 죽고 마는가!
 
박병술은 억울한 생각이 들어 참호바닥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산더미처럼 등을 짓누른 흙더미가 어찌나 무거운지 쉽지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젖 먹던 힘까지 써서야 가까스로 흙먼지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눈을 뜨고 보니 그사이 고지는 온통 불바다로 변해있었다. 참호는 허물어져 구덩이가 메워졌고 나무는 허리가 부러져 줄기만 남은 채 불이 펄펄 붙고 있다. 뿌리 채 뽑혀 참호 안에 굴러든 갈참나무도 보인다.
 
옆에 있는 돌에 의지해 몸을 일으키던 박병술은 에크! 하고 놀라며 손을 뗐다. 돌덩이가 벌겋게 달아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빠지직-빠지직- 하얀 수증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충천하는 화광은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혔고 어둠 속을 가르는 탄도의 곡선은 황홀한 붓질로 드넓은 어둠의 화폭에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그린다. 화염은 뭉게뭉게 솟아오르며 어둠에 더 짙은 먹칠을 했다.
 
어디선가 벌써 부상자들의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충천하는 불기둥 속으로 누군가의 동강난 팔뚝이 M1소총을 부여잡은 채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뒤쪽등성이 어딘가로 날아가 떨어졌다.
 
“내 다리, 내 다리 어디 갔어? 이 개새끼들아. 내 다리 찾아내!”
 
질겁한 병사들은 하나 둘 진지를 버리고 후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박병술도 참호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나 누군가의 손이 뒤에서 그의 발목을 으스러지게 거머잡았다.
 
“같이 가. 개자식!”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박병술은 힘차게 군홧발로 그 병사의 어깨를 걷어찼다. 그러나 힘을 너무 준 탓에 그 역시 참호 속으로 다시 굴러 떨어졌다. 그의 손이 물컹거리는, 물기가 질퍽하고 뜨끈한 무언가를 짚었다. 어느 병사의 파열된 복부바깥으로 비주룩이 흘러나온 창자였다. 그 창자에는 비릿한 핏물이 흥건했고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옆의 전사는 거죽만 간신히 붙어있는 다리를 가져다가 이어보려고 잉-잉- 울면서 버둥거린다. 화광 속에서 먼지와 화염에 꺼멓게 그을어버린 병사의 얼굴은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키득키득 웃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하얀 이발만 벌씬 벌씬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엔가 포격은 중지되고 잠시 고지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정적 속에 묻혀버렸다.]
 다행이도 박병술은 머리털 한 곳 다친데 없이 멀쩡했다. 참호 주위의 초목조차도 성한 것 없이 죄다 날아가고 황폐화됐는데 아직도 멀뚱멀뚱 살아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북괴군이 공격해 온다!”
 
누군가의 경악한 부르짖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북쪽 먹골 방향 계곡을 타고 인민군기갑부대가 남진하는 궤도의 절그럭 소리가 어둠 속에서 분명하게 들려왔다. 좁은 산길인데다 기복이 심하고 비까지 내려 질척거려서 군사이동이 쉽지 않을 텐데도 그 소리는 급속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박병술은 육감으로도 진지에서 적군 사이의 거리가 몇 천 미터 정도밖에 안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먹골에서 역동교를 지나 진다리까지는 금방 밀고 내려올 것이다. 도로변의 수많은 냇물들이 밤새 내린 비에 불어서 그들의 공격로에 장해로 되었으면 좋을 테지만 그런 천연장애도 효험이 없는 듯 인민군의 선두공격부대는 도로와 옥수수 밭, 감자밭을 짓뭉개며 새벽어둠 속에 은폐한 채 고속도로 남진하고 있었다.
 
지휘관이고 병사들이고 모두들 망연자실하고 아연실색한 채 아무 대책도 없이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벌써 많은 병사들은 전사했거나 부상당했으며 일부는 부대를 이탈해 도망하기까지 했다.
 
“대대장님의 철수명령이시다. 모두 서둘러라. 야, 이 새끼들아! 뭘 굼벵이처럼 꾸물대고 있어. 어서 이 부상병새낄 등판에 업지 못해! 이미빼기에 콩알을 박아 넣기 전에!”
 
민병기 소대장은 아무에게나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손에는 권총을 뽑아들고 마구 휘둘러댔다. 어디에 부상을 당했는지 그의 손등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중대장님. 싸워보지도 않고 이렇게 패주해야 합니까? 총 한방 쏴보지 않고 패퇴하다니. 이게 무슨 군댑니까. 더러워서!”
 
소대장은 소대를 둘러보러온 중대장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명령에 복종하는 건 군대의 천직이야. 잔소리 말고 집행이나 해!”
 
“야, 이 새끼들아! 모두 귓구멍이 막혔어. 퇴각이라잖아. 절골 방향으로 퇴각해서 거기서 521고지를 차지해야 되니까 빨리 서둘라고.”
 
그즈음 B중대도 좌측의 내린천 쪽으로 철수하는 모양 욕지거리소리와 군사 장비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플래시불빛도 번뜩거린다.
 
중대는 급급히 전연진지를 포기한 채 산줄기를 타고 전략이동지인 521고지를 향해 남쪽으로 급행군 했다.
 
아직도 공포가 가시지 않은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통에 소대들은 부대편성이나 점검을 할 사이가 없이 혼란한 지휘 상태 그대로 이동했다. 부상병들 때문에 부대의 이동은 굼뜰 수밖에 없었다. 탈영병들과 전사자들로 소대의 병력은 훨씬 줄어든 상태였지만 행군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적군이 뒤를 바싹 쫒고 있기 때문이었다.
 
산길은 미끄러웠고 질척거렸다. 길이랄 것도 없이 그냥 계곡과 비탈과 능선과 숲을 헤치고 전진해야만 했다. 병사들의 행색은 꾀죄죄했고 장교들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들이 난무했다. 모두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 있었고 부대의 사기는 일락천장 했다.
 
박병술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발걸음만 옮겼다. 말할 기운도 없었고 기분도 없었다. 개미 한 마리 살아남기가 힘든 맹포격에 살아남았다는 기적적인 사실하나만이 신기할 뿐이었다. 싸워보고 싶다는 소대장과 같은 그런 불타는 의욕도 없었고 탈영병들처럼 군인의 양심을 저버리려는 절망감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피곤하고 졸렸고 날이 밝으면서부터는 산길에 지친 때문인지 시장기가 심하게 발작했다. 군복팔소매는 어디서 떨어졌는지 잘린 채로였고 철모도 보이지 않아 맨머리 바람이었다. 도대체 군인의 행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
 
죽지 않았다. 나는 죽지 않았다. 목숨이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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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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