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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7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언제 오면 될까요?”
가격 같은데도 관심이 없다.
“내일 아침에나 점심에 오시면 될 겁니다. 모두 한 장씩만 현상하실 건가요?”
“네. 아마 사진이 잘 안 나왔을 거예요 상관 말고 죄다 현상해주세요.”
잘 안 나왔다는 말로 은근히 자신의 사진기술의 미숙을 암시하면서도 아가씨는 얼굴표정을 흩트리지 않는다. 한결같이 정교하고 절제된 모습이다. 잘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말 속에는 그녀가 최신설비를 갖춘 사진관이 아닌 구석진 『패밀리』를 찾게 된 이유가 모름지기 담겨져 있었다.
어느 동네사람인가, 보광동에 새로 이사를 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초면의 손님에게는 실례되는 행위였음으로 혀끝까지 굴러 나온 말을 입 안으로 감아 들였다. 사실은 그녀의 거처뿐이 아니라 나이, 직업, 모두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만큼 그녀는 매혹적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들어 가세오.”
인사를 하고 아가씨는 문밖으로 사라졌지만 정도는 그녀가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유리문가에 붙어 서서 발끝을 쳐들고 오리목을 뽑아냈다.
여자에 대해 이토록 관심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안개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그 깊은 곳에 드팀없이 뿌리를 내린 듯한 강인함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한동안 정도는 넋을 잃고 멍하니 실내 복판에 못 박혀 있었다.
은파랑, 은파랑. 은밀하면서도 투명한 색깔의 아가씨! 나이는 20세 안팎으로 보이고……
참, 사진을 현상해보자. 그녀가 찍은 사진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사진 속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마음을 읽고 싶었다.
정도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사진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진작가가 보고 싶었던 대상이니 그 자신의 소망과 꿈이 담겨있다. 사진은 작가의 눈이기도 하다.

정도는 아가씨가 맡기고 간 필름을 가지고 암실인 지하실로 내려갔다.
풀빛 안전등을 켜자 좁은 암실의 구조가 어슴푸레하게 드러났다. 눈을 감고도 암실의 구석구석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장소다. 왼편으로는 스테인레스제의 현상액, 정지액, 정착액 버커들과 수세용 물통이 놓여있고 맞은편엔 산광식散光式럭키확대기가 항상 준비되어있다.
정도는 실내등마저 끄고 숙련된 동작으로 필름을 릴에 감아서 현상탱크에 넣었다.『동양사진관』에서는 디지털사진현상을 주로 하고 필름현상은 대형오픈현상법을 도입했지만 그는 아직도 밀폐현상법을 고집하고 있다. 오픈현상법은 현상시간을 줄이고 작업과정이 편리하긴 하지만 필름을 옮기는 중에 약품이 떨어지는 불편도 따르기 때문에 완벽함을 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탱크 안에 현상액을 주입하고 손으로 흔들어 교반攪拌을 했다. 기포방지를 위해서는 시간과 교반규칙을 엄수해야만 한다. 교반이 부족하면 현상부족현상이 나타나고 지나치면 콘트라스트가 강해져 과다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웬일인지 현상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 한 편으로는 어떤 사진일까 하는 궁금증이 그를 조급하게 했다. 궁금증을 빨리 해소하기 위해 2~3분이면 완료되는 급속접착제까지 사용했다. 사진들에 어떤 화폭들이 담겨있을 것인가? 그녀의 모습도 담겨있을 것이다.
부푼 기대감에 기다리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초조해지고 설렌다. 미모의 아가씨가 찍은 사진이니 그만큼 피사체도 아름다울 것이다.

현상, 정지, 정착이 끝나자 수적방지제를 사용하여 수세시간도 평소 30분에서 5분으로 단축시켰다. 정도는 약간은 떨리는 손으로 수적방지제를 탄 증류수에서 필름을 꺼내어 스퀴지로 물기를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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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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