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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09 장편연재 "붉은아침"13 by 아데라


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6장 붉은 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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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만주의 겨울은 3월이 다 지나도록 도무지 물러설 기미가 없이 산의 계곡들과 들녘의 그늘진 곳에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먼 산 양지쪽에는 한낮이면 진달래꽃이 피었다가도 새벽이면 꽃잎이 얼어 죽어 버리고 새 꽃송이가 피어난다. 강은 낮에는 해빙으로 녹은 물이 빙판 위를 쭈룩쭈룩 흐르다가도 밤이 되면 또다시 꽁꽁 얼어붙는다. 음지엔 녹았다 얼었다 하며 굳어버린 잔설이 건조한 봄날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가는 겨울을 가까스로 부둥켜안고 있다. 그 와중에도 버드나무는 추위에 아랑곳없이 가지마다 물이 통통 차오르며 하얀 버들개지를 피우기에 여념이 없다.
 지난겨울 푸짐하게 내린 강설 덕분에 토양은 충분한 수분공급을 받고 잘 피어나서 표층만 녹으면 금방 얼음갈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우내 동결되었던 논바닥이 낮이면 녹고 밤이면 얼면서 지표면이 울퉁불퉁 궁굴어 올라오며 농부들을 논갈이로 재촉했다.
 금년 들어 농회부회장이자 민병중대장인 덕구는 할일이 더 많아졌다. 우선 논갈이 전에 몰수한 지주의 토지를 빈농, 고농들에게 분여해야 했다. 땅을 재고 가구와 인구에 따라 평균 분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원과 토질의 차이에 따라 상답과 하답으로 분류되었다. 사토와 점토도 차등 있게 분배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처음으로 사업이었다. 덕구는 물론 김 공작대 대신 새로 파견되어 온 박 공작대에게도 생소한 사업이었으므로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고 토의에 토의를 거듭해야 했다. 그러나 토지분여사업은 비록 어려웠지만 신중성을 기해 별 차질 없이 잘 추진되어 나갔다. 이대로라면 논갈이 전에 토지분여가 끝날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덕구는 한지주를 청산, 투쟁하는 군중운동도 박 공작대와 함께 진두에서 조직해야 했으므로 정말이지 눈코 뜰 사이 없었다. 낮과 밤을 이은 회의와 토의, 토지분여사업과 투쟁대회는 그를 극도로 지치게 했다. 그러나 덕구는 놀랄만한 기력과 강인한 인내력으로 고통과 피로를 이겨나갔다.
 집에 들를 시간도 없이 동분서주하는 아들을 아버지 최복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쩌다 골목에서 마주쳐 덕구가 먼저 인사를 건네도 고개를 수굿하고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지나가 버렸다. 덕구는 당연히 누구보다 기뻐해야할 아버지의 그러한 이상한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 수수께끼를 풀어볼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구당위에서는 한상권을 투쟁대회에 내세워 김 공작대의 암살사건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자백을 받아 낼 것과 소작농들에게 저지른 그의 죄악을 성토하고 양곡을 감춰둔 곳을 알아낼 것을 지시했다. 덕구는 읍내에 살고 있는 종수의 아내 이씨를 강촌마을 투쟁대회에 며칠만이라도 보내줄 것을 구당위에 요청했다. 그의 청구는 즉시 비준되었다.
 “영식아빠, 부탁임다. 제발 마님만은 투쟁대회에 내세우지 마시오. 마님한테는 아무 죄도 없슴다. 그분도 서방님한테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에 불과한데 왜 이곳에 끌어다가 투쟁하겠다는 검까.”
 소문을 들은 아내 곱단이가 덕구의 팔소매를 부여잡고 애걸했다.
 “그년이 머땜시 죄가 없다는 거여. 남정이 왜놈개다리질을 하며 숱한 죄 없는 백성을 잡아다 구타하고 징병에 잡아 보내고 출하를 긁어가고 공산당을 잡아 죽이는 반동행위를 눈 번히 뜨고 봄시로도 말리지 않았잖여. 그리고 지비를 끌어가는 날도 막을 대신 당신을 목욕시키고 옷단장을 시켜 서방 놈의 수청을 들게 했담시로. 그런 죄가 어디 한두 가지여. 종수 놈이 어딜 갔는지? 공산당을 어떻게 죽였는지 그년은 꼭 알 팅께 자백을 받아내사 쓰는 겨.”
 “넌 니가 지끔 허는 일얼 미느리가 갤처서 허노?”
 잠자코 등을 돌리고 앉아 곰방대만 뻑뻑 빨던 최복만이 못마땅한 듯 한마디 끼어들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이라 덕구는 잠시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아버진 그것도 말씀이라고 합니까. 종수란 놈은 왜놈 앞잡이질을 했고 난 불쌍한 소작농을 위해 일하는데……”
 “영식아빠. 제발 더 이상은 두 집 간에 척지지 말깁소. 영식아빠 손에서 싸움을 그칩쏘. 도대체 언제까지 두 집 싸움을 계속할검까. 영식일 봐서라도……”
 곱단은 눈물부터 앞서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눈가에 옷고름을 가져간다.
 “영식을 봐서라도 독초는 철저히 뽑아 버려야 돼. 그래야 그 애도 위험이 없고 착취가 없는 편안한 세상에서 살게 아닌 겨.”
 덕구는 한사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이 가져다 준 천지개벽을 한없이 고맙게 생각했다. 공산당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어떻게 소작농의 신세를 면하고 한상권을 투쟁할 수 있으며 종수가 기겁하여 뺑소니치고 그의 손아귀에서 곱단을 되찾아 올 수 있었겠는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영원히 한상권의 소작농으로 살며 종수의 발바닥 밑에서 원통해도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종질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이 기회에 다시는 저 한상권이나 종수 같은 계급의 적들이 불쌍한 백성의 머리 위에 군림하여 주인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제압해 버릴 작정이었다. 그러자면 그 뿌리를 뽑아 버려야만 한다. 인민이 땅과 나라의 주인이 된 주권을 그가 지키지 않고 누가 지켜 주겠는가.
 그렇다. 영식을 봐서라도. 영식이 누구 아들인데. 그 애더러 아버지처럼 한상권의 앞에서 굽실거리는 종이나 머슴이나 소작농이 되게 할 수는 없다. 다시는 그런 암흑의 세상이 돌아오게 해서는 안 된다.
 투쟁대회장은 마을의 소학교운동장에 설치했다. 대회장에 《악질지주 한상권을 타도하자!》, 《혁명 간부를 살해한 원흉을 잡아내어 처단하라!》,《왜놈의 앞잡이를 타도하자!》라는 플래카드도 내걸었다.
 소학교운동장의 느티나무에 매단 레일토막을 쇠망치로 두드려 동네사람들을 대회장으로 소집시켰다. 대회장은 삽시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벌써 군중대회를 여러 번 개최했으나 오늘처럼 많이 모여 보기는 처음이었다. 해방 초기엔 돌아가는 눈치만 살피며 적당히 참가도 하고 회피하기도 하던 것이 요즘은 토지를 분여한다니까 회의나 군중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적극성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연단에 올라선 덕구는 먼저 군중 속부터 찾아보았다. 아무리 깐깐하게 훑어보아도 아버지와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이봐, 순돌이. 민병 몇 동무를 데리고 우리 집에 가서 우리 아버지와 영식이 엄마를 데리고 와.”
 아버지와 아내에게 지주와 친일파를 투쟁하는 대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군중의 열의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탈피하기를 바랐다. 그는 아버지와 곱단이가 민병들과 함께 대회장에 나타나는 걸 친히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투쟁대회의 시작을 선포했다.
 연단에 올려 세운 한상권의 목에는 쇠줄로 벽돌 세 장을 매달고 군중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도록 강요했다.
 종수 마누라에게는 목에 《친일주구의 여편네》라고 쓴 팻말을 걸고 역시 허리를 굽혀 놓았다. 군중 속에 미리 배치해 놓은 적극분자들이 선두에 나서서 성토를 시작했다. 그러자 삽시에 여기저기서 분노의 성토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대개는 개인적인 불만의 토로와 분풀이에 그치는, 자질구레한 사건들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덕구는 군중을 유도할 목적으로 친히 연단에 올라섰다.
 “악질지주 한상권은 양곡을 감춰 둔 곳을 탄백하라. 혁명 간부를 암살한 배후조종자가 누구인가를 자백하라. 친일순사의 마누라는 왜놈 앞잡이인 남편을 어디로 빼돌렸는가를 실토하고 붙잡은 공산당원을 어떻게 살해했는가를 이실직고하라. 바른 대로 자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할 것이나 거짓말을 하면 엄벌에 처할 것이니 그리 알고 사실 대로 탄백하라!”
 무거운 벽돌장을 목에 매달고 오래도록 허리 굽혀 서 있으려니 견디기 힘든 모양인지 한상권의 두 다리가 화들화들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아까부터 배가 아파서 뒷간에 좀 다녀오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솔직히 자백하기 전에는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종수 마누라는 극한상황에 박두한 듯 얼굴이 새카맣게 질렸다.
 한상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단 위에 풀썩 무릎을 꿇고 무너졌다.
 “일어나! 자백하기 전엔 절대로 허리를 펼 수 없어.”
 덕구는 대회장을 지키던 몇몇 민병들을 지휘하여 한상권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아예 연단 위에 벌렁 넘어졌다.
 “이 영감태기가 엄살을 부리긴! 아직 매 한대 맞지 않았는데, 냉큼 일어나지 못해!”
 덕구가 발길로 한상권의 복부를 내지르자 그는 억,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배를 움켜쥔 채 골뱅이처럼 전신을 웅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민병들의 발길이 사정없이 그의 몸뚱이로 쏟아졌다.
 혼란한 틈을 타 이씨는 당금이라도 배설물이 쏟아지려 하는지 허락도 받지 않고 부랴부랴 연단에서 내려와 뒷간으로 달려갔다.
 “저 곰보 년을 붙잡아라! 도망치지 못하게.”
 덕구가 외치자 민병들이 우르르 달려가 그녀의 덜미를 움켜쥐었다.
 “연단으로 끌어올려.”
 “제발 빌어요. 배가 아파서 뒷간에 다녀올 테니 한 번만 사정 좀 봐주세요!”
 이씨는 평소의 우아하던 기품은 오간 데 없고 더러운 거지처럼 두 손을 싹싹 비볐다. 그 비굴한 모습에서 덕구는 모진 고문을 가해 형님을 죽게 한 이씨 남편 종수의 저주로운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녀에게 형님을 죽게 한 죄가 없다는 건 덕구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억울하게 원혼이 된 형님과 불행하게 순결을 짓밟힌 곱단이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종수가 아닌, 그의 눈에 껄끄러운 누구라도 짓밟아놓고야 속이 후련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상처받은 심리를 보상하고 복수를 정당화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인습이기도 했다. 아직도 그의 귓전에는 형님 덕민이가 임종의 순간에 남긴 유언이 쟁쟁하다.
 “덕구야. 이 성의 웬수럴 갚어줄 사램언 우리 집구석에 니밲에 없구나. 지발 성이 눈얼 감게 혀다오.”
 덕구는 이씨에게로 한걸음 다가가 그녀의 떨고 있는 턱을 손으로 받쳐 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곰보얼굴은 오늘따라 더욱 흉물스러웠다.
 “안 돼. 남편을 어디로 빼돌렸어? 산에서 잡은 공산당을 어떻게 살해했냐고? 불쌍한 사람 얼마나 죽였는지 자백하기 전에는 바짓가랑이에 똥을 싸질러도……”
 “으흐흑, 흐흑……”
 그녀는 갑자기 이상한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일어나지 못해!”
 덜미를 잡아 일으키는 순간 그녀의 치맛자락 밑으로 누런 배설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이씨는 밀려드는 수치심 때문인지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더니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퉤퉤, 더러워! 이년을 똥간으로 보내줘!”
 그녀는 엉엉 울면서 연단을 기어 내려갔다. 일어서면 더 흉한 꼴을 보일까 두려워서 그랬을 테지만 개처럼 벌벌 기어가는 그녀의 몰골은 너무나 흉측하여 사람들은 모두 눈길을 외면했다.
 “이런 망신을 당하고 인젠 어떻게 사람들 앞에 머리를 들고 살아요. 흑흑……”
 여인은 체념한 듯 기어가던 땅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통곡을 했다. 몇몇 민병들이 코를 틀어막고는 무슨 쓰레기를 쓸어버리듯이 그녀의 두 팔을 잡아 질질 끌고 뒷간으로 사라졌다.
 “쩌런! 쩌런!”
 최복남은 보다 못해 탄식을 하며 슬그머니 사람들 속을 빠져 집으로 돌아왔다. 곱단은 그보다 먼저 집에 와있었다.
 그날 대회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날 밤, 이씨를 가둬놓은 창고를 지키던 민병대원 한 사람이 다급히 덕구네 집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한밤중에!”
 “연장 동무. 그게 저, 큰일 났소.”
 “무슨 일인디? 말을 해야 알게 아니야. 찬채이 말해봐.”
 덕구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 채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옷을 걸쳤다.
 “창고 안이 쥐 죽은 듯 잠잠하기에 들어가 보았더니 글쎄 왜놈 앞잡이의 여편네가 저고리고름으로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을 했구만요.”
 파수꾼은 상급의 책임추궁이 두려운 듯 섬돌 아래서 쩔쩔 맸다.
 “동무들은 뭘 하고 있었소? 사람이 목을 매달아 죽은 줄도 모르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잠든 줄로만 알고……”
 “됐어. 어디 가봅시다.”
 덕구가 수하대원을 데리고 삽짝문 밖으로 나가자 최복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 아케서 기런 망신얼 주었응께 점잖언 마님이 어떻게 상판 쳐들고 살지라.”
 땅이 꺼지게 탄식을 터뜨리며 곰방대에 담배를 재워 불을 붙였다. 건넌방에서 곱단이의 흐느낌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최복만은 곰방대를 뻐금뻐금 빨며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밖은 어두웠다. 계절은 3월의 언덕도 넘어선 완연한 봄철이건만 밤 기온은 겨울처럼 쌀쌀했다. 그는 덕구가 집을 비운 틈을 타서 한상권네 집에 얼른 다녀올 생각이었다.
 한상권네는 말이 집이지 벽체와 지붕이 다 허물어진 곱단이네 폐가에 거처하고 있었다. 방  안엔 아직도 희미한 등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찢어진 창호지 구멍으로 안방구들에 맥없이 누워 있는 한상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리님, 주무십디여?”
 “어. 최 서방 자넨가.”
 “네 소인입니다유.”
 “내 집엔 머달라고 왔지라. 살피는 눈길덜이 많을 틴디. 어여 돌아개게나.”
 “들어가도 될랍디여?”
 최복만은 섬돌 위에 신을 벗고 안방으로 통하는 지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양 지게라우. 몬타 즈그 머시마 땜싱께 나리께서 이 고상 혀지라우. 민목이 없지라.”
 “긍기 앙그라 몬타 내 자식이 저지른 업보일세. 그넘이 지비 맏아들 덕민얼 죽이들 않고 곱단이럴 자근년으루 빼뜨러가들 않았다면 나헌티 요로코롬 징헌 불행언 덮치들 않았을겨.”
 “나리님, 지발 이 강촌마슬얼 떠나이다. 도련님들이 지긴 곳으로다.”
 “싫네. 난 지비와 함께 가업얼 일군 이 땅얼 떠날 수 없시. 난 내 죄가 머신지 알기 아래는 강촌얼 떠나들 않을 겨. 난 그 김 공작댄지럴 암살한 적도 없고 눌 갤처서 죽인 적도 없어라. 나헌티 죄가 있다먼 양곡얼 감춘 것 뿐이지라. 농회와 빈고농단에서 내 땅캉 재산얼 몬타 몰수했응께 다섯 식구의 목숨얼 머로 묵여 샐린단 말이노. 그렁께 숨겨두었얼 뿐이라제. 숨겨둔 곳얼 누학꼬도 말허지 않았제?”
 “여부가 있겠습디여. 소인얼 죽일락켜도 입얼 열들 않을꺼이다.”
 “그랴. 나헌틴 최 서방밲에 믿을 사램이 없당께. 3.1운동 때 조선서 만주로 피신 올 적부텀 지비는 내 목숨얼 건져준 은인이었지라. 내 혼차었다먼 길코 이곳까장 오들 못혔얼거라우.”
 “천만에유. 댑대로 천한 소인의 목숨얼 구해준 건 나리가 앙그랍디여.”
 “그랴 우린 생사고락얼 가티한 친구지라.”
 밖에서 개가 컹컹 짖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하던 말을 뚝 그치고 잠시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도 싶었다.
 “여보게 최 서방, 싸게 싸게 역서 나가게. 저기 뒷문으로. 자네까장 연루되게 하고 쟆들 않으이.”
 한상권은 다급히 최복만의 등을 밖으로 떠밀었다.
 “나리, 저…… 마님이 어이께 오밤중에…… 자살혔대유……”
 “마님이라니?!”
 “읍내에 기지는 작은 나리의……”
 한상권의 얼굴에는 놀라는 기색이 꿈틀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랴. 고마 알았응께 이제 싸게 나가게……”
 최복만은 저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그 아들한테서 갖은 수모와 박대를 받으면서도 그 아비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심려해 주는 그 마음이 뜨겁게 전해왔다.
 종수의 아내 이씨는 자살임이 판명되자 그 자리에서 멍석에 둘둘 말아 공동묘지에 내다가 묻어버렸다. 친일주구의 가족이라 봉분도 만들지 않았고 관도 없이 그냥 땅 속 깊숙이 매장했다. 한상권이나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과 막내아들도 매장 장소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민병대원 몇 명이 들것에 들어다가 장례의식 같은 것도 없이 간단히 매장해 버렸다. 그렇다고 감히 불만이나 불평을 부리는 사람도 없었다.
 이씨의 자살은 한상권을 투쟁하는 군중대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당연히 죽어야할 사람 중의 하나일 따름이었다.
 하루를 지나 투쟁대회는 다시 열렸다.
 성토의 내용이나 한상권의 대답은 첫날 그대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목에 달아맨 벽돌장 숫자 하나가 더 불어나 네 개가 되었을 뿐이었다.
 한상권은 성토나 질타보다도 목에 매달린 벽돌장의 무게를 감당해 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가는 철사가 목살을 파고들어 상처에서 피가 흘렀고 현기증이 발작하여 정신이 아뜩아뜩해졌다. 군중이 성토하는 소리는 입과 표정만 보일 뿐 귓속에서는 그냥 윙윙 소리로만 들렸다. 식은땀이 흘러 옷이 물걸레처럼 흠뻑 젖었고 다리는 화들화들 경련을 일으켰다. 버티다 못해 맥을 버리고 주저앉기도 했으나 금방 목덜미를 잡혀 일으켜 세워졌다. 해질 무렵이 되자 한상권은 갑자기 연단과 연단 아래의 군중이 핑글핑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물거리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했으나 버텨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까무러치고 말았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으나 잠간 눈을 떴다간 금방 감아버렸다.
 덕구는 기절한 한상권을 연단 위에 내버려둔 채 사람들을 데리고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한상권의 식구들은 눈을 뻔히 뜨고 보면서도 다가가서 돌보지 못했다. 발각되는 날이면 그 역시 투쟁대상이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최복만이 학교운동장으로 잠입해 연단 위에 쓰러진 한상권을 업고 몰래 빠져나왔다. 맥을 버리고 축 늘어진 한상권을 잔등에서 내려놓으니 거대한 체구가 안방구들을 꽉 채웠다. 평소 인자하던 얼굴은 수척하고 입술은 턱턱 갈라 터졌으며 하얀 머리카락도 먼지가 뿌옇고 까치둥지처럼 푸시시 헝클어져 있었다.
 한상권의 아내는 초주검이 되어 들어온 남편을 보자 목이 메어 말 한마디 못한 채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 버렸다. 맏딸 한영자와 둘째딸 한영희 그리고 7살 난 막내아들 한종학은 아버지의 가슴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아가씨, 암래도 앙그 되것제라우. 나리님얼 이대로 두었다간 먼 모진 꼴이락도 생길까봐 무서워유.”
 “그럼 어쩜 좋아요?”
 한영자는 울면서 물었다.
 “강촌마슬얼 떠나 멀리 도망쳐비레사 쓰것지라우.”
 “누워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도망을 친다는 거죠?”
 “아가씬 걱정마이다. 지헌티 맡기이다. 더 미룰 것 없이 지금 싸게 싸게 떠나사 쓰것지라우. 나리님얼 지등에 업혀 주이다.”
 “그러다 발각되면 도리어……”
 “은파에 가서 밤차럴 타면 누 안닥꼬 그라제라. 마슬만 무사히 빠져나가 버리먼 되지라우.”
 “최 서방. 날 기냥 이대로 주거비리게 내비두게. 자네헌티까장 누럴 끼치고 쟆들 않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한상권은 눈물을 머금고 간청했다. 늘 밝던 그의 얼굴이 몇 달 사이에 십년은 늙어보였다.
 “나리님, 암말 말고 지등에 업히이다. 지가 나리를 꼭 구해드릴 팅께유.”
 “최 서방, 이 은혜를……”
 한상권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마을은 두툼한 어둠 속에 묻혀 잠들어 있고 하늘에서는 차가운 봄비가 부슬부슬 흩뿌리고 있었다. 골목길은 텅 비어 있었지만 빗물이 고여 질척거렸다. 개들이 인기척을 감지한 듯 여기저기서 두어 마디씩 컹컹 짖어댔다.
 다행히도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발각되지 않고 마을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날씨는 오늘따라 비가 내릴 만큼 푸근하여 복만은 은파강 얼음이 풀렸을까봐 걱정되었다. 요즘은 낮이면 풀렸다가 밤이면 얼어붙곤 하는 은파강이었다. 그래서 밤에는 강을 건너기가 쉬웠지만 낮이면 얼음표면이 녹아서 은파강을 건너다니기가 여간만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 오늘은 밤에까지 날씨가 푸근하니 얼음이 강바닥까지 녹지 않았을까 걱정이 앞섰다. 아직 해동이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룻배도 사용이 불가능하기에 강만 풀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체구가 두 배나 더 큰, 맥을 버리고 축 늘어진 한상권을 등에 업은 복만은 워낙 구부정하고 왜소한 몸집인지라 더구나 위축되어 간신히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개미가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먹이를 등에 지고 굴 안으로 나르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삽시에 전신이 땀과 비에 후줄근히 젖었다. 기진맥진하여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고 싶었으나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옮겼다. 주저앉으면 나리님은 죽는다! 오로지 그 일념 하나로 젖 먹던 기운까지 다 내어 무너지려는 자신을 지탱해 나갔다.

 덕구는 적극분자회의를 열고 한상권에 대한 효과적인 투쟁방안을 토의하다가 늦게야 농회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우선 학교운동장부터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는 당연히 연단  위에 있어야 할 한상권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것들이 누구 맘대로 옮겨간 거야.”
 그는 다급히 한상권이 거처하는 오막살이로 달려갔다..
 “저희는 몰라요. 집에 오신 적도 없고요……”
 맏딸 한영자가 단마디로 딱 잘랐다.
 “해이나 어디로 빼돌린 건 아니겠지? 그땐 느그들 온 가족이 몬타 끝장이란 걸 명심해!”
 으름장을 놓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한상권의 행방은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잘 알 것 같아서였다. 해방이 되어 세상도 인심도 죄다 변했건만 아버지 한 사람만은 털끝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예나 다름없이 한상권을 상전으로 모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 역시 집에 없었다. 곱단이 혼자만 영식에게 젖을 물린 채 자고 있었다.
 “압씨 어디 개겼는제 몰러?”
 “글쎄요. 낮에 나가신 대로 집에 들어오지 않았슴다.”
 “뭐락꼬? 여태 집에 들어오들 않았단 말이제. 틸림없어. 압씨가 그 한지주넘얼 어딘가로 빼돌리뿌린기라. 압씨가 어찌 이럴 시가!”
 덕구는 화가 나거나 급할 때면 저도 모르게 전라도 사투리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는 선 자리에서 발길을 돌렸다.
 “어디감까? 으저는 쪼끔 그만합쏘. 마님이 죽었으면 돼쨈까. 아직도 뭐가 성차지 않아 한사코 사람으 죽이려 함까.”
 곱단은 날이 갈수록 덕구의 발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년이 뒤진 게 누 탓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디.”
 “기런 망신을 당하지 않았다면 마님이 왜 자살함까. 제발 그만 좀 합소. 기어이 그 가문의 씨를 말리고야 시름놓겠슴둥.”
 곱단은 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호물호물 젖을 빨던 영식이도 엄마가 울자 덩달아 바스러지게 울어댔다.
 “여자가 간여할 일이 앙깅께 잠자코 있어. 괜히 남자들 일에 상관말구. 아기나 잘 돌봐.”
 덕구는 씽하니 방에서 나왔다. 곱단의 말이라면 뭐나 다 들어줄 수 있지만 한상권이네 일에 한해서만은 그녀의 뜻을 따를 수 없었다.
 종수 놈을 놓쳤는데 그 아비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 사막을 훑고 바다 속을 뒤져서라도 한상권을 찾아내어 핏 값을 받아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형님은 저승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죽은 빨치산의 억울한 한도 풀어줄 수 없다. 그놈이 감춰둔 양곡을 사출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
 덕구는 잠시 사립문 밖에서 주춤했다가 금방 떠오르는 예감을 따라 은파강 쪽으로 내달렸다. 강촌을 벗어나 조선으로 도주할 생각이라면 반드시 은파강을 건너 은파 역에 가서 열차를 타야 할 것이라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는 빗물이 고여 질척거리는 진창길을 투덕투덕 달음박질쳤다.
 방죽에 올라서니 며칠 전까지도 꽁꽁 얼어붙었던 은파강이, 쩡쩡, 두터운 얼음장이 갈라터지는 소리만 들리던 은파강이 요 며칠 사이의 더위에 풀린 모양 쏴아, 하고 흘러내리는 물결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왔다.
 그 소리에 덕구는 우선 한시름 놓았다. 녹아내린 은파강이 그들의 도주를 막아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지. 하늘도 나를 돕는 거야!
 덕구는 느긋해진 마음으로 배포 유하게 스적스적 강기슭으로 걸어 내려갔다. 강가에 이르러 땅에 쭈크리고 앉아 멀리 지평선의 희미한 하늘빛을 빌어 수면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강 중간쯤에 검은 물체 하나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뛰어보았자 내 손바닥 안이지!
 코웃음을 치며 강물에 한발을 들여 놓았다. 그러나 기슭은 이미 얼음이 다 풀려 강물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냥 옷을 입은 채로 강물을 첨벙첨벙 걸어서 건넜다. 대여섯 미터쯤에서 얼음 위에 올라서긴 했으나 표면은 녹아 물이 발목까지 잠겼고 커다란 뗏목처럼 얼음장이 통째로 흔들거렸다. 그는 서커스단 배우처럼 얼음장들 사이를 흐르는 물길을 풀쩍풀쩍 건너뛰며 그 검은 물체를 향해 접근해 갔다.
 가까이에 다가가 보니 아버지는 한상권을 등에 업고서 얼음이 완전히 풀려 강물이 좔좔 흘러내리는 강 복판에 선 채 갈팡질팡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
 덕구가 느닷없이 부르는 소리에, 그러잖아도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고, 초조하고 기진맥진하여 떨고 있던 최복만은 혼비백산하며 겉물 진 얼음장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통에 간신히 최복만의 등에 걸쳐 있던 한상권의 육중한 체구가 뒤로 벌렁 넘어지며 녹은 물 위로 저만큼 쭈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최복만이 다급히 일어나며 그를 잡으려고 서둘러대는 바람에 얼음장이 휘우뚱거리며 한상권은 아예 물 속으로 첨벙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한상권은 물속에 잠겨들었다가 다시 머리를 솟구치더니 어푸어푸 손을 내밀고 허우적거리며 구원을 청했다.
 덕구는 본능적으로 빙판 위에 배를 밀착시키고 누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상권의 손이 그의 손을 꽉 잡아왔다. 덕구가 잡아당기기만 하면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될 수 있었다.
 “덕구야. 어여 손얼 땡겨올리거라. 나리님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독촉을 듣는 순간 덕구의 머릿속에는 형님의 임종유언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내가 왜 한상권을 구해줘야 하는가? 기회가 없으면 몰라도 형님을 위해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런 기회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 공작대를 암살한 자가 한상권이 아니고 양곡을 감춰둔 곳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투쟁대회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지도 모른다.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린 덕구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이래도 되나 하는 심리적 갈등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지주라고 하지만 필경은 살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의 손을 잡았던 한상권의 손을 뿌리쳐 멀리 강물 깊숙이 떠밀어버린 뒤였다. 이틀간의 투쟁 속에서 기진맥진한 한상권은, 심리적 고충으로 꼬박 이틀이나 쌀 한 알 입에 넣지 않은 한상권은 헤엄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여력도 없는지라 그냥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휘말려 강 하류로 떠내려가더니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으매! 덕구 너 이넘 지끔 머해쌓노? 나리님얼……”
 최복만은 그래도 한상권을 구해보겠노라고 허둥지둥 물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늦었어요.”
 덕구는 빙판 위에서 허둥대는 아버지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아버지의 가냘픈 체구는 그의 아름에 차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맥이 빠져 있어 꼼짝달싹 하지 못하고 그의 팔 매끼에 묶여 발만 동동 굴렀다.
 “이넘아! 네가 지끔 먼 끔찍헌 지껄일 혔냐구! 사램얼……”
 너무 기가 막힌 지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은 얼음 위에 그대로 퍼질러 앉아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덕구도 그때서야 두려운 생각이 갈마들었다. 아무리 지주라고 해도 이건 살인이고 범죄가 아닌가?! 조직에서 추궁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널이 무섭도 않느냐? 암리 죄진 사램이락꼬 그라게 무참히 죽이는 벱이 어딨냐. 아이구, 나리님 지가 나리를 지켜들디 못혔구먼유. 나리께 죽얼죄럴 지었구먼유.”
 “지두 죽일락카는 앙심까장언 없었지라. 지도 모르는 사이에 고마 그라게 된 거지라우.”
 덕구도 불안하고 당황했다.
 “압씨, 이라고 있들 말구 먼 방법얼 쬐깨 대봐유.”
 “바쁠 땐 느그압씰 찾노?”
 “지발 이러들 말구.”
 “사램얼 주게응께 먼 수가 따로 있겄냐. 이 마슬얼 떠나비는 시밲에.”
 “이곳얼 떠나다니요? 어디루요?”
 “길림의 유하라는 곳에 가먼 느그 8촌 숙부가 디는 분이 지길 거다. 최태일이락꼬. 글루다 찾아개그라. 느가베 이름얼 대먼 징하게 잘 알 팅께.”
 “그럼 여그 일은 어떡허구요?”
 “여그 일언 느가베가 알아서 처리할 팅께 이 밤으로다 떠나거라. 어이구, 나리님. 소인얼 용서하들 마이다. 나리를 죽인 놈얼 자슥이락꼬 도망치락꼬 부추기고 있는 이 천한 넘얼 귀신이 되어서락도 기언이 잡아가이다.”
 덕구는 그 길로 강물을 헤엄쳐 건너 읍내로 달려갔다.
 한편 최복만은 한상권의 집으로 돌아와 사건의 자초지종을 마님에게 이실직고했다.
 “몬타 소인의 불찰이제라우. 자식넘얼 잘못 길러서 나리님께까장 화럴 지치게 혔제라우. 마님, 소인얼 죽여주이다. 머시매가 지은 죄럴 아베가 대신 받겠나이다.”
 “그게 왜 최 서방 탓이겠는가. 세월 탓이지. 내 아들 종수가 왜놈 앞잡이질을 하여 나쁜 짓을 한 것도 그 애 탓만은 아닐 걸세. 세월이 그러니까. 그런 세월에서 먹고 살려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어쩌면 내 팔자가 기구하고 우리 집 양반이 부덕한 탓인지도 모르지. 그만하게.”
 마님은 도리어 최복만을 위로했다. 사실 사면초가에 빠진 그녀의 입장에서 그말 말고 또 다른 말을 할 처지도 못 되었다. 지금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라 최복만이었다.
 한상권의 시신은 사흘 만에 고기잡이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건져낸 시체는 물에 퍼져 코끼리몸뚱이처럼 거대하게 부풀어 있었고 살점들은 물고기들이 갉아먹어 보기 흉하게 넌덜거렸다. 하지만 그는 혁명의 타도대상인 악질지주요 친일주구의 아비였으니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그냥 강변에 땅을 파고 묻어버렸다. 그의 죽음이 자살인가 타살인가에 대해서도 추궁하지 않았다. 다만 시신을 수습하고 땅에 묻는 일은 최복만이가 스스로 자진하여 도맡아 했다.
 한상권이 죽자 최복만은 감춰두었던 한지주의 토지문서와 물레방앗간에 파묻어두었던 곡물을 꺼내어 농협에 바쳤다. 주인이 죽었으니 더 이상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가 자진해서 숭겨둔것잉께 투쟁할락카먼 지 함 사램만 허이다. 그라고 우리 덕구는 유하 사는 8촌 숙부가 느닷없이 핀찮닥꼬 기벨이 와서 그곳으로 떠나갔어라우. 오밤중에 기벨 받고 떠나다봉께 미처 알리들 못 혀 지더러 전하락꼬 허기에……”
 사실 한상권을 죽인 사람은 덕구라는 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지주이고 친일주구의 아비인지라 구당위에서는 이 사건을 슬그머니 덮어 버리고 말았다. 최복만 역시 지주를 도와준 건 나쁜 행위지만 대대로 머슴출신이고 소작농인지라 한두 번 비판하는 것으로 그치고 죄를 사면해 주고 말았다.
 그러나 최복만은 한상권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내내 가슴이 쓰렸다. 마님과 두 아가씨와 막내 도련님을 보기가 죄송스러웠다. 한상권을 대신하여 그가 황천에서 일망정 두 눈을 감고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과 아들 덕구가 한상권에게 지은 죄값을 치르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과연 무엇으로 속죄한단 말인가?
 그는 연 며칠 동안 집구석에 드러누워 애꿎은 곰방대를 뻑뻑 빨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풀풀 몰아쉬었다. 며칠 전엔 빈고농단에서 토지를 분여하여 그도 자신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박힌 땅을 분여 받았지만 한번 논밭을 빙, 둘러보고는 그냥 돌아들어왔다. 그 땅을, 한상권을 죽이고 강탈한 것만 같아서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팻말을 뽑아 개울에 던져 버리고 들어왔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생과부가 된 설움을 앓으며 밤이고 낮이고 안방에서 훌쩍거렸다.
 덕구 이놈은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찾아가기나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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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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