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문학'에 해당되는 글 151건

  1. 2012.02.15 장편연재 "붉은아침"20 by 아데라
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1장 수난의 땅 



 종철은 일요일이라 실컷 늦잠을 자고 11시가 거의 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미령이네 판잣집에서 마신 술 때문인지 위장이 칼끝으로 허비듯 쓰렸다. 미령은 끝내 아버지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긴 했지만 다시 가출했다. 숨이 막히고 눈꼴이 시여 질식할 것만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네 집에 다니는 사람들은 죄다 친일주구나 만주국시절의 관료들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깨끗하고 투명한 인간의 영혼을 가진 건 그녀 혼자뿐이었다고 했다. 정조는 비록 여러 남자들에게 유린당했지만 영혼만은 그들보다 순수하다는 걸 확신했다고 했다.
 내가 미령이와의 관계를 너무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는 건 아닌가?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미령을 만나지 않으리라! 이렇게 수백 번도 넘게 다짐을 했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한 번, 두 번 횟수가 늘어갈수록 그만큼 향란이와의 마음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향란이다. 미령이는 단지 나의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준 여자일 뿐 연인은 아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마음의 문은 닫은 채 육신의 문만 열어놓고 연인들끼리만 넘을 수 있는 성역을 범해왔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어제를 마지막으로 미령이와의 관계는 종지부를 찍으리라. 향란과 나 사이에 미령이 때문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쌓을 수는 없다.
 종철은 마당으로 나와 수돗물을 틀고 얼굴을 씻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잔뜩 흐려 있고 무겁게 드리운 축축한 공기 속으로 성긴 가랑비가 푸슬푸슬 날리고 있었다.
 거리에 나가 뭘 좀 사서 요기하려고 옷을 걸치고 하숙집을 나섰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시민들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골목은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썰렁했다. 괴괴하고 우울한 정적이, 쓰레기가 되는 대로 뒹구는 골목길에 쭈그리고 있다.
 동네 거리에 나서자 종철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파출소 주위에 새끼줄을 치고 경관들이 카빈총을 멘 채 특별경계를 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나?
 다가가서 물어 보려다가 단념했다. 그는 경찰이 싫었다. 국가의 질서를 보장하는 공권력이라고, 그 기능이 미화되고는 있지만 실은 민주를 탄압하는 악의 무장력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정이나 사정도 없는, 다만 정권의 조종을 받는 로봇에 불과할 따름이다.
 또 데모가 발생했나봐. 구석진 파출소까지 특별경계에 돌입한걸 보아 대규모 데모인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을 고르며 그냥 파출소 앞을 지나 어느 식당으로 들어가 설렁탕 한 그릇을 청해 아침식사를 했다. 옆에 있는 다방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오후 1시가 넘었다. 할일도 없고 해서 그냥 큰 거리로 빠져나왔다. 거리를 방황할지언정 오늘은 미령이네 판잣집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설득하면서.
 데모장소에나 가볼까.
 그러나 전번의 형무소사건이 새삼스럽게 기억의 자루 속을 뒤져내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거리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동네 골목에서와는 약간 다른 시민들의 불안한 표정과 심상치 않게 분주한 거리의 흐름에 종철은 약간 놀랐다. 레일 위를 덜커덩거리며 뗑뗑 종소리를 울리는 전차와 버스 그리고 4톤짜리 트럭을 개조하여 버스로 대용하는 승합차들은 예나 다름없이 덜덜덜 거리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들 버스나 전차, 승합차 위엔 시민이 아닌, 군인들이 꽉 박아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시민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힘차게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죽어서야 백골이 살아도 백골                                                       백골이 되련다. 나라 위하여
쓰러지는 전우의 시체 너머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뿐이다
 통일의 그 날이 올 때는 왔다
 백골용사 앞에는 적이 없도다.

 어디선가 들어 본적이 있는 18연대가도 들렸다. 거리복판에 갑자기 스피커를 설치한 헌병대차가 나타나 가도를 달리며 통고방송을 반복했다.
 “휴가, 외출중인 현역 국군장병들은 즉시 원대 복귀하라. 현역 군인들은 즉시 원대 복귀하라!”
 그제야 종철은 가두방송에서도 똑같은 방송을 반복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혹시 전쟁이라도?!
 시민들은 서로를 붙들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내막을 소상히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무슨 일인가 국가의 존망과 관계되는, 그것도 군대와 관계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종철은 갑자기 영문도 없이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추측과 판단을 내리고 싶었다.
 그는 무작정 버스를 탔다. 행선지도 분명하지 않았지만 우선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떠밀려 몸부터 실었다. 그러나 버스는 중도에서 군인들에 의해 통행을 제지당했고 승객들을 하차시키더니 대신 군인들을 승차시켰다. 종철은 이번에는 전차를 탔다. 전차 내에도 태반은 군인들이었다. 시민이고 군인이고 얼굴 표정들은 한결같이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종철은 전차에서 내렸을 때에야 자신이 또 해방촌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그것은 인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발길 스스로의 물리적인 동작으로도 올 수 있는 너무나 익숙한 노정이었다. 벌써 미령이네 판잣집이 저만큼 언덕 위에 보였다. 다시는 이곳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나 오늘 하루만은.
 가파른 언덕길을 거의 달음박질쳐 단숨에 올라갔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미령은 테이블 위에 놓인 육중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선생님, 마침 잘 오셨어요. 전쟁이 터졌나 봐요!”
 “네? 전쟁이라고요!”
 예측은 했지만 정작 확인이 되자 종철은 놀랐다. 조용히 그러나 재빨리 신을 벗고 구들 위로 올라가 그녀와 나란히 라디오 앞에 마주앉았다. 그 라디오는 그녀가 두 번째로 가출할 때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인제는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전혀 거부감이 없는 그녀의 체취가 콧구멍으로 솔솔 날아들며 또다시 이상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느낌은 인제는 그녀만 보면 꿈틀거리는 조건반사로 되어버린 것 같았다. 담배에 인이 박힌 골초가 담배연기만 맡아도 흡연충동을 느끼듯이 말이다. 그래서 종철은 그녀와의 물리적 거리를 넓히는 것으로 그런 충동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보려고 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앉았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시민 여러분과 함께 수도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종철과 미령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국군이 먼저 북침이라도 했단 말인가?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더 이상의 구체적 메시지는 없고 같은 내용의 방송이 수십 번이고 반복되고 있었다.
 “도대체 전쟁은 누가 도발했다는 거죠?”
 미령이도 흥분하여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글쎄요. 듣고도 모르겠습니다. 북측에서 먼저 도발했다면 인민군이 퇴각할 리가 없고 국군이 점심을 평양에서 먹을 수 있을까요?”
 “그거야 국민을 안심시키느라고 하는 선전방송일 수도 있잖아요.”
 미령은 벌써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전 아직 아침식사 전이예요. 함께 술이나 한잔해요.”
 밖에서는 금방 전까지 내리던 가랑비가 소낙비로 변하여 허름한 판잣집 동네를 단숨에 부숴버리기라도 할 듯이 기세 사납게 굵은 빗줄기를 퍼붓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 번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겼으면 좋겠어요?”
 미령은 술을 따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종철이 앞에서는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듯 속옷 바람인 그녀의 반라는 또다시 종철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종철은 그녀의 뜻밖의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솔직히 말해 그는 북쪽이 승리했으면 하고 바랐다. 한때는 계급차별이 소멸된, 모두가 잘 사는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사상에 흠뻑 빠져들었던 그다. 그래서 만주에서 북조선으로 나가 사회주의국가건설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바지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지주 아들이라는 신분의 벽 때문에 그는 북한당국의 외면과 버림을 받고 월남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사상은 좌익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었다. 지주계급의 정권이며 친일, 친미파정권인 이승만 정부를 반대했다.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된 나라인 북쪽사회제도를 찬동했다. 그런데도 지금 종철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지주계급의 신분인 그가 살아갈 수 있는 땅은 남한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생존을 용납하는 땅과 마음속으로 지향하는 땅― 어느 곳이 더 귀중한가?
 “전 북쪽이 이겼으면 좋겠어요. 친일주구와 민족반역자, 지주, 자본가계급의 천당인 남한 땅을 해방시켜 인민의 나라로 전변시켰으면 좋겠어요. 듣자니 북쪽에서는 적어도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처단했고 지주를  타도하고 토지개혁을 했다면서요. 그런데 남한은 일제 때와 달라진 게 뭐가 있어요.”
 미령이가 빨갱이였던가? 우익이 들었다면 그녀의 말은 빨갱이만이 할 수 있는 언사이다. 그러나 종철은 그 말이 과격하긴 해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엔진의 동음이 들려왔다. 판잣집창문이 드르릉, 울리기까지 했다. 그들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비행기였다. 그런데 평소 서울상공에 뜨곤 하던 관측기나 정찰기가 아니었다.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동음이 요란한 두 대의 전투기가 남산 상공을 날아 여의도 쪽으로 비행했다. 그쪽 어딘가에 이르러 비행기에서 발사하는 기총소사 소리가 귀청을 찢는 듯했다. 비행기의 엔진 음이 어찌나 요란한지 하늘땅이 드르릉 드르릉, 떨렸다. 전쟁의 공포를 실감케 했다.
 그날 밤 종철은 하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텅 빈 하숙방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미령이도 혼자 있기가 싫다며 그를 만류했다. 향란의 어렴풋한 모습을 떠올리며 또 한 번 그녀의 판잣집에서 미령이와 더불어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러다가 정말 미령이한테서도 떨어질 수 없고 향란이한테로도 다가갈 수 없는 최악의 경우로 치닫게 되는 건 아닐까?
 26일 방송에서는 옹진지구의 국군이 해주시를 점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시국이 돌아가는 형편을 알아보려고 거리로 나갔던 그들은 은행들마다에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받쳐 신은 신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걸 보았다. 부자들과 특권층들이 전황이 불리함을 눈치 채고 재빨리 자금을 빼돌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거리에는 벌써 등짐을 지거나 자가용에 가장집물을 실은 차량들이 한강대교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국군이 해주를 점령했다는 방송보도와는 달리 전세가 국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고 또다시 술상을 차리고 마주 앉았다. 술을 빌지 않고는, 취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만취한 상태에서 그대로 술상 옆에 너부러져 잠이 들었다.
 27일 아침 6시 뉴스에서는 드디어 정부의 수원천도소식이 방송되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방송국에서 천도뉴스취소방송을 내보냈다. 그리고는 또 뒤늦은 이승만의 방송연설이 생중계 되었다.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을 하고 이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으로 무기와 물자를 날라 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기운이 빠진 늙은이의 피로한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여 청취자들로 하여금 더구나 불안과 공포감에 휩싸이게 했다.
 “이건 생중계가 아닙니다. 원거리전화를 통한 목소립니다.”
 종철은 흥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이승만 대통령이 이미 서울을 떠났다는 건가요?”
 “분명 그렇습니다. 국민을 버리고 도망치다니?! 게다가 거짓말로 국민을 우롱하기까지 하면서……”
 이승만의 방송연설과 수원천도뉴스가 방송되자 서울시내는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총포소리도 귀로 들을 수 있었고 최전선에서 패전한 국군 패잔병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서울은 더 이상은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피난 가실 거예요 아니면 서울에 남으실 거예요?”
 미령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만을 골라서 던졌다.
 서울을 떠나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북쪽사회를 저주하는 사람들이다. 월남자 대부분이 지주나 친일파, 경찰, 관료출신들이다. <인민>들은 구태여 피난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피난을 가야 하는가 가지 말아야 하는가? 인민군은 과연 나의 월남 사실을 추궁하지 않고 묵과할 것인가? 지주 아들이라는 신분이 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난 여태껏 좌익을 지지했고 그들과 어울려 반정부시위에도 동참했고 형무소에 수감까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를 구해준 것은 친일주구이며 만주군 소위를 지냈던 형무소 소장이다. 난 사회주의를, 북쪽 체제를 동경하고 지지한다. 그런데도 나는 무엇 때문에 서울에 남기를 망설여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나는, 남는 것이 애국인가 피난 가는 것이 애국인가 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명철보신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해야 한다.
 “선생님, 저와 함께 서울에 남아요. 남아서 인민군을 도와 저희 아버지와 같은 친일주구와 우파들을 처단하고 인민의 정권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요.”
 미령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간절했다. 종철이를 신변에 남겨두려는 그녀의 의도에는 정치적 목적을 초월하는 어떤 은밀한 개인적 정분 같은 것도 담겨 있었다. 미령의 그 말과 포부는 향란이와 이별하고 강촌마을을 떠날 때까지도 종철의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주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인민정권의 외면과 버림을 당했을 때부터 뜨겁게 불타오르던 그의 이상은 점차 식어버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불길은 아직도 그의 가슴 속에서 완전히 꺼져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를 불태우고 뜨겁게 달구기엔 열량이 부족할 만큼 식어버렸었다. 어쩌면 미령이도 친일주구의 딸이며 이승만정권의 형무소 소장의 딸이라는 특수신분 때문에 인민정권의 외면을 받고 실망한 나머지 종철이 밟았던 전철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이념, 신념, 애국……이러한 것들은 개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사회적, 계급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우리 잠도 오지 않는데 시내로 나가 봅시다. 피난해야 할지 남아야 할지 하는 문제는 나중에 결정하도록 하고……”
 서울의 거리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가로등도 태반이 꺼져 있고 전차나 버스의 통행도 피난민 물결 때문에 정시 운행이 어려웠다. 한강 이남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한강대교 쪽으로 접근해 갈수록 피난민 인파는 거리를 꽉 메운 채 홍수처럼 느릿느릿 흘러갔다. 듣자니 오늘 낮 12시경부터 일반인의 한강교 통행이 금지되고 군인들만 통과하고 있다고 한다. 때는 이미 자정이 넘었지만 피난민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거리에 늘어선 채 다리 통행금지가 풀리기만을 애타게 고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랑비에 옷들이 후줄근히 젖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인파 속을 빠져 다리 쪽으로 접근하려고 시도했다.
 종철과 미령은 다행히도 무거운 피난 짐 같은 것이 없는 홀몸뿐이어서 사람들 속을 빠져 한강대교 북쪽 강변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새벽 두 시가 넘었다. 한강대교는 언제부터 해금이 되었는지 다리를 건너는 군인들과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지게며 보퉁이를 이고 진 피난민들과 수레, 차량, 가축들이 한데 어울려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고함소리와 아귀다툼소리가 그칠 사이 없었지만 무슨 말인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144만 6천 명의 서울시민이 죄다 피난길에 나선 것만 같았다. 시커멓게 흐린 하늘과 역시 시커멓게 흐르는 한강 사이에 괴물 같은 거대한 철근구조물로 축조된 한강대교 위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군인과 피난민의 행렬이 홍수처럼 남쪽으로 힘겹게 이동하고 있었다.
 꽈르릉, 쾅! 꽈르릉!
 돌연 하늘땅을 진감하는 굉음이 울리며 시뻘건 불기둥이 하늘공중으로 치솟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교각의 허리부분이 뭉텅 잘리며 한강 물에 곤두박인 것은 새벽 2시 30분경이었다.
 강기슭에 서서 피난민 이동을 구경하던 종철과 미령은 갑작스러운 폭음에 깜짝 놀라 혼비백산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그저 꿈만 같았다. 화광과 함께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하늘공중으로 뿌려 올라가는 사람들의 몸뚱이와 가축들, 부서진 차량과 수레, 육중한 철편들, 무슨 돌멩이같이 물속으로 떨어져 내리던 피난민들과 군용트럭, 자가용, 짐 보퉁이, 동강난 교각들이 순식간에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불붙는 여광을 빌어 끊어진 다리의 구조물 위에에 서커스 단원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구원을 청하는 피난민들과 물 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시체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아우성소리, 악다구니소리, 욕지거리소리, 울음소리, 비명소리, 엄마나 자식을 부르는 소리, 구원을 청하는 애원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그야말로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피투성이 된 채 다리난간에 걸쳐 신음하는 사람, 물에 빠져 다리기둥을 잡고 위로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 몸뚱이에서 떨어져 달아난 하신이나 팔다리를 돌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 천여 명의 수난자들이 교각과 물 위에서 폭사당하고 부상당하고 재난을 당한 채 몸부림치고 울부짖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누굴 위한 전쟁입니까? 동족 간에 무엇 때문에 이런 비극이 벌어져야 하는 거죠? 누가 저 사람들의 죽음을 책임져야 한단 말입니까? 통일을 위해서입니까, 이념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종철은 눈앞에 펼쳐지는 끔찍한 광경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그만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전신이 푸들푸들 떨렸다. 역사적인 비극 앞에서 그는 처음으로 전쟁의 원인이 된 이념이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이유에서 저주했다.
 하지만 미령은 오늘따라 강인한 모습을 보인다. 말없이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눈앞의 참상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전쟁인 만큼 인명피해는 불가피한 거잖아요. 다리가 폭파된 것이 진격하는 인민군을 위해서는 다행일 수도 있어요. 우익이나 반동분자들이 도망갈 퇴로를 차단하는 격이 될 테니까요. 물론 그건 정치적 이득일 뿐 군사적으로는 남진에 저해가 되기도 하겠지만.”
 종철은 미령의 단호함에서, 참상을 목도하면서도 냉정한 웃음까지 짓는 여유로운 모습에서 그녀의 잔인한 일면을 보는 것만 같아 몸서리를 쳤다. 아버지에 대한 저주와 증오가 그녀를 이처럼 극한에로 내몬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태껏 추구했던 사회주의사상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혁명은 폭력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 아닌가.
 “미령 씨, 전 아무래도 서울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날이 희붐히 밝아올 무렵 종철은 그녀를 따라 판잣집으로 들어가다 말고 결단을 내렸다.
 “선생님!”
 미령이 남긴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것은 의혹이었고 실망이었으며 동시에 원망과 유감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령은 구태여 종철을 만류하지도 징징거리며 붙잡지도 매달리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그들의 관계를 가능하게 했던 쌍방의 자원을 억압과 강박으로 유지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이별은 어디까지나 자원이지 강박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녀의 소신이기도 했다. 그건 이성 간에만 그런 게 아니라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흔한 “잘 가세요!” 라는 작별인사 한마디 없이 그녀는 언덕 위에 서서 멀어져 가는 종철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래주었다. 종철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언덕 위에 서 있는 그녀를 일별했을 때 미령은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눈시울에 안개가 뽀얗게 서리며 앞이 흐릿해 보였다. 사랑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삭막하고 한산하고 외로운 서울의 생활을 인간답게 만들어준 정은 있었다.
 미령 씨, 부디 행복하세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돌려 한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강변에 이르자 날이 훤히 밝았고 비도 그쳤다. 서강나루터에는 패잔병들인 국군들과 경찰, 피난민들로 붐볐다. 계급장을 뜯어버리고 민복차림을 한 군인들과 경찰들은 흙탕 물투성이 되어 초췌한 몰골을 한 채 강변에 몰려들어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지휘 체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편제도 깨져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속내의 바람에 군모조차 없이 서로 나룻배에 먼저 타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종철은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다 못해 기대를 포기하고 말았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면 언제 될지 몰라 아예 강물 속에 첨벙 뛰어들었다. 빈 집에서 떼어낸 미닫이 문짝 하나를 부여안고 헤엄을 쳐 한강을 도하했다.
 남쪽 대안에 도착하여 북쪽의 서울을 바라보면서 종철은 금방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내가 그래 친일경찰인, 형님 한종수를 찾아간단 말인가? 지주요 경찰인 부모형제와 영원히 결별하려고 맹세하고 가출한 집이 아닌가. 내가 거기 가서 할일이 뭔데. 계급이 없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위해 헌신하려던 내가 인민의 군대가 두려워 도망치다니?! 사랑하는 향란이가 속한 북쪽과 중국의 사회제도가 남한으로 확대되는 걸 환영은 못할망정 그녀와 등을 지고 점점 멀리로 도망치다니?!
 종철은 고민과 번뇌를 하면서도 결국은 피난민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는 남쪽을 바라고 걸으면서도 과연 자신의 이 선택이 스스로의 신념에 위배되는 건 아닌지, 명철보신을 위한 비굴한 도피이며 신념의 포기는 아닌지에 대해 고민했다. 어쩌면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신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신념을 상실한 생명이나 부지한다고 하여 그 목숨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러나 발걸음은 그의 방황과 고뇌를 싣고 계속 남쪽으로 움직여갔다.
 종철은 수원에 도착하자 어느 여인숙에 침소를 정했다. 시국이 돌아가는 형편을 보고 다시 남행이냐 북행이냐를 신중하게 결단내릴 생각에서였다.
 수원도 한강 이북에서 몰려든 피난민과 군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머무는 여인숙 옆방에도 민복차림의 1사단 13연대 소속 김 일병이 묵고 있었다.
 저녁에 김 일병은 혼자 있기가 무료한지 술 한 병을 들고 종철의 방으로 건너왔다.
 술이 거나해지자 김 일병은 며칠 사이에 벌어진 참담한 사건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옆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들고 보았더니 글쎄 폭격에 박 일병의 하신이 뭉텅 떨어져 나간 게 아니겠어유. 어땨, 지금 생각혀두 몸서리쳐지는 겨. 내 다리, 내 다리 어딨어? 하고 울부짖는데 으매 눈 뜨고 볼 수가 없더랑게유. 그의 하신은 저만큼 뿌려나간 채 무슨 나무토막처럼 물 위에 둥둥 떠있었구먼유. 의식을 잃은 박 일병을 내비리둔 채 소대장님의 명령에 따라 대응사격을 했구먼유. 피비린내가 역하게 풍겼고 참호에 들어찬 빗물에 핏물이 흘러들어 진득진득헌겨유. 아, 아퍼! 아이구, 아파 죽겠다! 엄마, 나 죽어요! 천수가 죽는다고요! 박 일병이 부르짖는 소리가 가슴을 허볐어유. 대응사격은 혔지만 홍수처럼 밀고 들어오는 적군의 기세를 압도헐 수는 없었디야. 하나 둘 적탄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혔고 그러자 겁이 더럭 난 병사들이 진지를 이탈하여 도망치기 시작혔어유. 주위를 둘러보니 110명이던 소대원중 남은 사람은 겨우 5~6명밖에 안 되었어유. 얼레, 여기서 더 어물거리다간 나도 언제 귀신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던 겨. 군법이구 뭐구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참호에서 뛰쳐나와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혔구먼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다 질척거리고 미끌지. 엎어지고 넘어지고 뒹굴며 겨우 임진강변까지 도망쳐 왔구먼유. 길가에 너부러진 부상병들이 살려 달라구, 같이 데려가 달라구 애원혔지만 못들은 척, 못 본 척 하구 도망쳐왔구먼유. 임진강변에는 벌써 수많은 패잔병들이 몰려 있떠라구요. 계급장을 뜯어 던진 장교들도 어느 틈엔가 그곳에 도망쳐 와 있었구먼유. 부대편제와 지휘계통은 완전히 무녀져 있었구먼유. 중화기들도 죄다 버리고 알몸뚱이로 도망쳐 왔어라유. 차량이나 박격포, 탄약상자, 휘발유통 따위는 임진강변에 버리고 온거구먼유. 소낙비에 불어난 임진강은 어둠 속에서 더구나 흉흉해 보였어유. 여울을 찾아 헤엄쳐 건넜구먼유. 간신히 대대본부에 합류했지만 북괴군 탱크의 공격으로 다시 봉일천으로 후퇴했어유. 연대의 차량과 야포, 장갑차, 탄약상자, 보급물자들을 미처 옮길 수 없어 모두 폭파해 버렸어유. 통신연락마저 두절되어 사단장부터 중대장까지 장교들은 병사들을 버리고 내꼬리 봐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구먼유. 우리 몇은 행주나루에서 민가의 이영을 헐어 단을 묶어 타고 군용 삽으로 노를 저어 한강을 도하혔구먼유. 이름이 좋아 군대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해 보고 도망치기에만 바빴어유. 난 우리 국군에 실망혔는 겨. 이런 군대를 갖고 어떻게 북괴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겠어유. 우리나라는 이제 망했어유.”
 김 일병은 땅이 꺼지도록 장탄식을 뽑아냈다. 그러나 그도 이튿날에는 자기 부대를 찾아 원대 복귀했으며 시흥으로 북진을 한다고 수원을 떠났다.
 전세가 국군에게 불리하고 인민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면 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신념을 위해서도, 향란을 위해서도 나는 인민군의 승리를 기뻐해야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서울에 남아서 인민군의 입성을 환영하지 않는, 그들의 타도대상인 지주의 아들이다.
 수원에서 이틀 밤을 묵었으나 종철은 끝내 심리갈등 속에서 해탈하지 못했다. 시흥으로 북진했던 김 일병의 부대도 다시 후퇴하여 평택으로 패퇴했고 수원에 남아 잠시 시국을 관망하던 일부 피난민들도 급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종철이도 망설이던 나머지 그 행렬에 끼어들었다. 그밖에 다른 선택이란 없었다. 지주의 아들인데다 이미 한강을 건너 인민군을 외면하고 도망친 자신의 행위가 인민군의 관용을 받을 것 같지가 않았다.
 피난민 대오는 경부도로를 따라 길게 장사진을 이룬 채 끝없이 이어졌다. 남루한 한복 치마저고리와 바지저고리를 입은 백성들과 신사복과 양복을 빼입은 특권층이 한데 어울려 아수라장을 이뤘다. 진흙투성이가 된 초라한 패전군인들과 보퉁이며 지게며 아이며 소, 돼지, 염소며 달구지며 자가용들이 뒤죽박죽 거리에 뒤엉켜 있었다. 남부여대한 피난민들과 패잔병들, 군용트럭들이 꽉 들어차 붐비며 먼지를 뽀얗게 일궜다. 귀청을 찢는 경적소리, 상스러운 욕지거리소리, 구슬픈 울음소리, 뼈를 긁는 비명소리, 사람을 찾는 목멘 소리, 소름끼치는 신음소리, 요란스레 다투는 소리, 차량의 엔진소리와 달구지의 덜커덕거리는 소리, 소나 염소의 영각소리,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
 한길은 온통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갑자기 청천하늘에 우레 같은 동음이 진동하며 미군 비행기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비행기를 쳐다보았다. 군인들만은 그것이 아군의 공중지원 전투기임을 알고 손을 저어 환영을 표시했다. 종철은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환영해야 되는지, 저주해야 되는지 양자택일이 어려웠다. 그러나 미군 비행기는 피난민들과 패퇴국군을 적으로 오인한 모양 갑자기 급강하하더니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다.
 뚜르르― 뚜르르―
 요란한 사격소리와 함께 기총 탄이 두 줄로 일매지게 땅바닥에 박혀들며 먼지를 일궜다. 순간 피난민들은 아우성을 지르며 길 옆 웅덩이와 논바닥으로 내려가 급급히 땅바닥에 엎드렸다. 종철이도 도로 옆의 배수로에 들어가 엎드렸다. 다행히도 비행기는 한 번으로 소사를 끝내고 멀리로 사라져버렸다.
 종철의 옷은 삽시에 흙탕물투성이가 되었다. 놀란 가축들이 도처로 뛰어다니고 어린애들이 바스러질 듯 울어댔다. 몇 사람이 총탄을 맞고 부상을 당했지만 큰 참사는 없었다. 피난민들은 다시 짐들을 챙겨가지고 남쪽을 바라고 걸어갔다. 난리 통에 식구들과 흩어진 사람들이 가족을 찾아 헤매며 울부짖고 다녔지만 누구도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발걸음만 재촉했다.
 평택에서 북상하는 미군부대가 나타났다. 중무장을 한 미군 군인들은 먼지 오르고 흙탕물투성이가 된, 수척하고 남루한 피난민 행렬을 동정보다는 노골적인 야유와 비난의 눈길로 대했다. 한 나라의 군대와 백성이 이처럼 힘없이 무너질 수 있느냐고 묻는 것만 같아 종철은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차라리 승전하는 인민군의 편에 서서 오만하고 건방진 이들의 콧대를 꺾어놓았던걸 하고 후회마저 갈마들었다. 아무래도 뭔가가 잘못 된 것 같았다. 자신의 선택에 실수가 있는 것만 같았다.
 국군과 피난민들은 손을 흔들어 미군의 원조에 경의와 환영을 표시했지만 종철은 고개를 수굿하고 발걸음만 옮겼다. 북한이 가장 증오하는 미제국주의자들이다. 그 자신도 좌익단체들이 조직한 미군철수집회에 한두 번만 참가하지 않았었다. 그의 눈에 미군은 한반도의 분열을 조작하고 통일을 반대하는 반동세력에 불과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철수가 아닌 미군개입을 환영할 수 있단 말인가? 남쪽 땅에서도 인민의 정권이 들어서기를 바라던 종철이었다. 미군을 철수시키고 친일파와 친미파,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던 종철이었다. 그 세상이 바야흐로 오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기다리던 세상의 도래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인민의 세상을 반대하는 미군의 부대와 어깨 나란히 서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왜 이 길에 서 있는 거지? 난 당연히 미령이와 함께 서울에 남았어야 했어!
 종철은 끝없는 번뇌와 후회, 방황과 배회를 하며 대전에까지 내려갔다. 그곳에 와서는 더 이상 남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념의 차이로 부모형제를 배반하고 가출했던 산곡리로 기신기신 기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럴 면목도 없었거니와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대전에 와서야 종철은 춘천지역전투에서 겨우 9,300명의 병력을 보유한 국군 6사단이 2, 12 두 개 사단 2만 2천 명에 독립전차연대 1,100명, 군단사령부요원 500명을 보유한 인민군과의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력차이도 인민군은 T-34 전차 30대, 122mm 야전포 36문, 76mm 야포 108문, 120mm 박격포, 82mm 박격포가 480문인데 비해 국군 6사단은 겨우 105mm 곡사포 15문, 57mm 대전차포 12문, 2.36로켓포 276문이 전부의 무기장비였다고 한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16포병대대는 화력을 집중하여 춘천북방 개활지에서 인민군 2사단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공격을 저지시켰다. 옥산포방어부대인 7연대 1대대 57mm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은 그가 보유한 화기로 su-76 자주포를 파괴하지 못하자 휘발유병과 수류탄을 휴대하고 소나무 숲 속에 매복했다가 30m 가까이에 접근하자 57mm 전차포를 발사하여 측면궤도를 명중시켜 공격을 저지시킨 후 수류탄묶음을 밀어 넣어 두 대의 su-자주포를 폭발시켰다. 6사단의 성공적인 방어 작전으로 공격당일인 25일 내로 춘천을 점령하려던 인민군은 27일 저녁에야 겨우 춘천에 진입하였다고 한다. 계속하여 6사단 19연대 대전차 특공대원들은 큰말고개로 진격해오던 인민군 T-34 전차 10대에 육탄공격을 가해 지형적으로 유리한 점을 충분히 이용하여 인민군 2개 연대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군이 열세하고 전투력이 부족하여 반드시 인민군에게 패할 것이라는 판단에 의문부호를 달아주었다. 게다가 국군의 편에는 2차대전시에 그 위력을 전 세계에 과시한 강대한 미군이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15개국 연합부대인 유엔군이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니 잠시는 인민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고 있다지만 승부는 아직 확정짓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나는 승자에게 의탁하려는 명철보신논자인가?
 신념도 주견도 없는, 한낱 가소로운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단 말인가?
 종철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인 대전에서 숨 막히는 방황과 번뇌의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보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의 길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절감했다.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연재 "붉은아침"22  (0) 2012.03.20
장편연재 "붉은아침"21  (0) 2012.03.04
장편연재 "붉은아침"19  (0) 2012.02.01
장편연재 "붉은아침"18  (0) 2012.01.14
장편연재 "붉은아침"17  (0) 2011.12.11
Posted by 아데라
l